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6-02 00:32:27 IP ADRESS: *.147.6.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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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사스 깡촌의 유소년 축구단

  홀리 골드버그 슬론 [빅그린](1995)

 

영국 출신의 교환교사 앤나(올리비아 다보)는 새로 부임해온 학교에 절망한다. 텍사스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여서 끝없는 잡초밭만이 우거져 있는 시골깡촌 엘마의 아이들은 스스로를 지레 ‘패배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문제를 내주면 아이들은 반문한다. “어차피 가게 점원이 될 텐데 이런 걸 왜 풀어야 하죠” 점원에게도 수학 능력은 필요하다고 윽박질러도 소용없다. “그런 건 전자계산기가 다 해줘요.” 지리수업 역시 지리할 따름이어서 하품만을 자아낸다. 궁지에 몰린 앤나는 지구본을 떼어내 헤딩으로 하는 볼트래핑 묘기를 보여주며 뜻밖의 제안을 한다. “그럼 우리 이런 걸 해볼까”

앤나가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축구다. 하지만 미국 깡촌의 아이들에게 축구란 생소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공놀이일 따름이다. 그들은 ‘풋볼’과 ‘사커’를 구분할 줄 모르는 것이다. 영국 출신의 축구광 여교사와 미국 깡촌의 지리멸렬한 아이들. 홀리 골드버그 슬론 감독의 영화 [빅그린](1995)은 이 대목에서 일찌감치 코미디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이 오합지졸의 유소년축구단에 앤나에게 반한 마을 유일의 경찰 톰(스티브 구텐버그)이 코치를 자처하며 가세하면서 점입가경의 유쾌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빅그린]은 디즈니영화답게 아이들의 숨겨진 내면과 잠재된 능력의 표출에 주목한다. 무능한 알코올중독자 아버지를 증오하는 불량소녀, 발육이 늦어 또래집단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꼬마, 상대편 공격수들을 상상 속의 악당들로 착각하여 매번 눈을 감아버리는 엉터리 골키퍼, 천부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뒤켠에 숨어있어야만 하는 멕시코계 불법이민 소년. [빅그린]은 축구가 어떻게 이들 모두에게 내면의 억압을 깨부수고 당당하게 세상과 맞설 용기를 주게 되었는가를 디즈니 특유의 만화적 상상력을 통하여 보여준다.

디즈니가 만든 아동용 영화에서 심오한 작품성을 찾으려 한다면 넌센스다. 하지만 유쾌하게 배를 잡고 웃는 과정에서 ‘건전한 교훈’을 한 두 개쯤 낚아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작품의 존재가치는 충분한 것이 아닌가 [빅그린]은 소외된 아이들을 감싸안으며 넌지시 말한다. 패배자는 없다. 네 꿈을 펼쳐라.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모처럼의 성탄연휴를 맞아 온가족이 함께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영화다.

[한겨레] 2003년 12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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