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유년의 여름
이민용 [보리울의 여름]
이민용 감독의 [보리울의 여름](2003)은 따뜻한 영화다. 보리울은 우리 나라 깊은 산골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오지마을. 서울 아이들은 고사하고 바로 코앞에 자리 잡은 읍내 아이들에게서조차 업신여김을 당하고 거지 취급을 받아 잔뜩 주눅이 들어온 이 마을 아이들을 한 데 묶어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축구다. 진흙탕 속의 한판승부를 통해 서로 의기투합하게된 보리울의 아이들은 이제 새로운 목표를 찾아나선다. “우리 이 기회에 아예 단일팀을 만들어서 읍내 초등학교 축구부 아이들과 한번 붙어보는 게 어때”
매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만 스포츠영화의 플롯이란 빤한 법인데 [보리울의 여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초반부의 진행이 매우 더디어 지루한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예의 장마 시퀀스를 통과하면서부터 캐릭터들이 살아나고 드라마에 윤기가 돌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는 깐깐하고 고지식해 보이지만 푼수기질과 더불어 따뜻한 가슴을 숨기고 있는 원장수녀님(장미희)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이들이 빚어내는 고만고만한 일상사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문득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리운 시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보리울의 여름]에는 그리운 것들이 넘쳐난다. 마당에 피워놓은 모깃불, 흙먼지 풀풀 이는 시골운동장, 장터에서 사먹는 잔치국수, 맑은 시냇물 속에서의 멱감기, 처녀(수녀)들의 방 훔쳐보기, 때가 꼬질꼬질 흐르는 촌스러운 아이들, 그리고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출전하는 축구경기! 폭력과 섹스만이 난무하는 작금의 영화판에서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경이롭기까지 하다. 을씨년스럽고 지루한 겨울의 한복판에서 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유년의 여름을 생각한다.
[한겨레] 2004년 1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