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의 스윙을 되찾아라
로버트 레드퍼드 [베가번스의 전설](2000)
아마추어 청년 골퍼 주너(맷 데이먼)가 미국 남부의 최강자로 떠오른 것은 1916년의 일이다. 당시 그와 사랑을 나누던 아델(샤를리즈 테론)은 조지아주 사바나시를 대표하던 대부호의 딸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주너에게서 골프와 사랑을 모두 앗아간다. 전쟁의 참상이 청춘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겨 세상을 등지게 된 것이다. 그가 고향을 떠나 있던 10년 사이 아델의 아버지가 건립한 골프장은 대공황을 맞아 파산한다. 채무자들에게 둘러싸인 아델은 최후의 승부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미국 최고의 골퍼들을 불러들여 시범경기를 여는 특급 이벤트를 마련한 것이다.
로버트 레드퍼드 감독의 영화 [베가 번스의 전설](2000)은 바로 이 시범경기의 전개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틀 동안 4라운드로 펼쳐진 골프경기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니 지루함은 필연적인 결과일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 간의 충돌이 더 없이 흥미진진한 것이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는 신비한 캐디 베가 번스(윌 스미스)의 존재는 그야말로 ‘전설’의 요건들을 두루 갖췄다. 꼼꼼한 고증을 거쳐 완벽하게 재현해 낸 1920년대의 소박하고 우아한 미국 풍속화들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과거의 상처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폐적 인간 주너에게 골프의 스윙은 이제 ‘낯선 몸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베가 번스는 아이언을 골라주며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날 때 ‘자신만의 스윙’이라는 것을 갖게 되지. 다만 세파에 시달리면서 그걸 잃어버리게 되는 것 뿐이야. 승리는 중요하지 않아. 자신만의 스윙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지.” 이쯤 되면 골퍼를 돕는 캐디가 아니라 ‘인생의 조언자’라 할만 하다. “필드를 공략한다는 생각 따위는 버려. 중요한 것은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야.”
마이클 볼하우스의 유려한 촬영과 로버트 레드퍼드의 절제된 연출은 이 영화 속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 예술적 성취가 너무도 빼어나 평소 이 스포츠를 시큰둥하게 보아 왔던 나 같은 사람조차 골프의 매력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들게 만든다. 한때의 꽃미남 배우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것을 보면 ‘신은 인간을 편애한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내게도 베가 번스 같은 친구를 보내주지 않는 한, 신이 이 혐의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 같다.
[한겨레] 2003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