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끼리도 즐거웠어
페니 마셜의 [그들만의 리그]
1943년 미국 사회는 일대 위기에 봉착했다. 뒤늦게 참전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없이 확전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전쟁 그 자체 때문에 맞은 위기는 아니다. 문제는 남자들이 모두 전쟁터로 달려가 버려 더는 프로야구경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을 하면서도 살 수 있지만 야구시합을 볼 수 없으면 못사는 것이 바로 미국인들이다. 궁지에 몰린 구단주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바로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프로야구리그(AAGPBL)를 만드는 것.
따뜻한 감성의 여성 감독 페니 마셜의 [그들만의 리그]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야구 영화다. 물론 미국 여성프로야구리그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남자야구선수들이 속속 복귀하면서 차츰 뒤쪽으로 밀려 어느새 잊혀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그들만의 리그]가 일회성 행사로만 그친 것은 아니다. 그들만의 리그는 무려 11년 동안이나 존속했으며, 이 기간에 14개 팀에서 545명의 선수들을 배출해냈다. 도대체 여성들만의 프로야구리그의 그 무엇이 그토록 많은 선수와 관객들을 끌어 모았을까?
[그들만의 리그]는 ‘그래봤자 심심풀이 땅콩이겠지’하는 식의 남성적 편견들을 유머러스하고 솜씨 좋게 제압해 나간다. 이 영화의 매력은 다채로운 여성캐릭터들의 충돌과 조화다. 강한 리더십을 가진 장신 여성포수 도티(지나 데이비스), 그녀의 질투심 많은 동생이자 투수인 키트(로리 페티), 자유분방한 날라리 메이(마돈나), 덩치 큰 남자를 연상시키는 도리스(로지 오도넬), 예쁜 외모 때문에 언제나 스캔들을 불러일으키는 베티(트레이시 레이너). 이 제멋대로의 오합지졸들은 그러나 경기가 횟수를 더해감에 따라 야구 경기의 매력과 팀플레이의 미덕을 깨쳐나간다. 팬서비스 차원에서 팬티가 보이는 미니스커트를 입어야 한다는 굴욕적 조건들도 그들의 ‘인간적’ 성숙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영화의 라스트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명예의 전당에 모여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할머니들을 비춰준다. 그곳에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40년대의 야구 풍속도가 멋지다. 하지만 뜨거운 청춘시절을 보낸 뒤 그 세월의 자부심으로 남은 할머니들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다.
[한겨레] 2003년 1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