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로 표출된 흑인들의 절망
노먼 주이슨의 [허리케인 카터]
내가 허리케인이라는 복서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된 것은 까까머리 ‘중딩’시절, 밥 딜런의 노래 [허리케인]을 통해서였다. 노래 속의 그가 살인죄로 복역 중인 무기수라는 사실은 그때에도 알고 있었지만 관심 밖이었다. 나는 다만 밥 딜런의 반항적인 목소리와 신나는 비트의 하드록포크에 반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대형스크린을 동해서 비로소 그의 실체와 마주치고는 전율에 몸을 떤다.
루빈 카터는 전형적인 미국 슬럼가의 흑인 소년이다. 열 살 때 이미 10년형을 선고받고 소년원에 수감된 그는 8년 만에 탈출하여 신분을 속이고 미군에 입대한다. 군 생활은 비교적 평탄하여 장교로까지 승진하지만 평생토록 그를 뒤쫓는 악질 백인형사는 그를 기어코 다시 재수감시킨다. 카터가 이를 악물고 복서로 성장한 것은 그 안에서이다. "이 사회에서는 아무 것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무기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복싱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카터는 프로복싱선수로서 대성공을 거둔다. 마치 태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그의 펀치 덕분에 ‘허리케인’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하지만 1960년대 주류 미국사회에서 전과자 출신 흑인의 성공은 눈엣가시일 뿐이다. 그는 백인들의 조작 수사와 여론공세에 밀려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로 무려 세 번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여생의 대부분을 교도소 안에서 보내게 된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내동댕이쳐진 카터는 철창 안에서 눈물 젖은 자서전 [제16라운드]를 써 세상을 향해 포효한다.
할리우드 사회파의 거장 노먼 주이슨의 역작 [허리케인 카터]는 바로 이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전기 영화다. [허리케인 카터]는 권투영화라기 보다는 인권영화에 가깝다. 실제로 훗날 그의 출옥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흑인소년 레즈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종의 성장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권투는 흑인들에게 강요된 절망의 표출이다. 암울했던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의 절망적인 삶은 그러나 다음 세대 흑인들의 대중적인 자각으로 이어졌다. 이 극과 극을 오가는 복잡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 덴절 워싱턴의 연기가 놀랍다. 1993년 세계권투연맹은 무려 22년 만에 출옥한 루빈 카터에게 세계미들급 챔피언 벨트를 수여한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