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그의 웃음과 사랑
론 셸튼의 [19번째 남자](1988)
"나는 모든 종교를 믿어봤어요. 예수, 부처, 알라, 브라만, 비슈누...하지만 야구만한 게 없지요. 묵주에는 구슬이 108개가 있다고요? 야구공에는 바늘땀이 108개 있어요." 애니(수전 서랜던)는 캐롤라이나의 마이너 리그 야구단 ‘더램 불스’의 여성 기록원이다. 자칭 ‘야구교 신자’라는 그녀의 사랑관은 그 매혹적인 야구관 못지않게 독특하다. "난 2할 5푼 이하를 치는 선수하곤 안자요. 게다가 한 시즌에 딱 한 명의 선수하고만 사귀죠."
스포츠 영화 전문 감독으로 유명한 론 셸튼의 데뷔작 [19번째 남자](1988)는 이 사랑스러운 여자 바람둥이가 보낸 ‘특별한’ 한 시즌을 다룬다. 왜 특별하냐고? 마이너 리그에서도 최하위 팀이었던 더램 불스가 연전연승을 기록하고, 한 시즌에 한 선수만 사귄다는 그녀의 원칙이 뿌리째 흔들렸기 때문이다. 한명은 ‘100만 달러 짜리 팔과 5센트 짜리 머리’를 가진 신예 투수 애비(팀 로빈스)이고, 다른 한명은 ‘생애에 꼭 21일간 메이저리그 맛을 본’ 베테랑급 포수 크래쉬(케빈 코스트너)다.
야구팬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명품이 [19번째 남자]다. 이 영화는 마이너 리거들의 한심한 일상과 더불어 그들의 꿈과 야망 그리고 좌절과 회한을 낱낱이 보여준다. 세련된 유머로 이들의 서글픈 2류 인생을 어루만지고 대변해 주는 감독의 시선이 더 없이 따뜻하여 기분이 좋다. 다만 사랑 혹은 섹스 문제에 대한 이 영화의 ‘미국적 유머’가 아직도 여전히 ‘순결’이나 ‘정조’ 따위에 집착하는 ‘한국적 정서’와 어울리지 못했는지 국내 흥행에서 쓴잔을 마셨다.
원제는 영화 속 구단 이름을 그대로 딴 [불 더램]. 국내에서는 어떤 이유로 [19번째 남자]라는 해괴한 제목을 갖다 붙였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이 영화는 특히 유머러스하면서도 시적인 대사들이 일품이다. 크래시와 애니의 대사들은 셰익스피어나 앨런 긴즈버그를 방불케 한다. 야구와 사랑의 공통점? "여타의 종교와는 달리 야구엔 죄의식이 없어요. 지겹지도 않고. 그래서 사랑과 비슷하죠. 단지 긴장을 풀고 집중하기만 하면 돼요." 지능은 모자라는데 산만하기 짝이 없는 애비에게 주는 충고는 그래서 간단명료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그냥 던지는데 집중하라고!" 수전 서랜던과 팀 로빈스가 이 영화를 계기로 결혼에 골인한 것을 보면 꽤나 약효가 있는 처방인 것 같다.
[한겨레] 2004년 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