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함께 자일을 묶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이거빙벽](1975)
빙벽에 매달린 스파이와 킬러 예술대학의 교수인 조너선 헴록(클린트 이스트우드)은 골동품수집이라는 호사스러운 취미를 갖고 있다. 엄청난 돈이 드는 이 취미를 위하여 그가 비밀리에 부업 삼아 하는 일이 흥미롭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의뢰를 받아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이다. 이번에 부여 받은 임무는 극히나 위험스럽다. 아이거북벽 등반팀원 중의 하나가 소련의 스파이니 그를 제거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정체불명의 적과 함께 자일을 묶고 아이거북벽에 올라야만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이거빙벽](1975)은 그래서 첩보스릴러인 동시에 산악 영화가 된다.
베일에 싸인 스릴러 작가 트레바니안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이 작품을 보면서 가장 감탄스러운 것은 그 모든 장면들을 직접 연기해 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가 제작될 당시만 해도 컴퓨터 그래픽이란 꿈도 꾸지 못할 기법이었다. 덕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고난도의 암벽과 빙설벽 등반을 직접 실현해내면서 이 영화를 찍어야만 했다. 게다가 연기만도 힘겨운데 감독까지 겸하다니, 등반과 암살을 동시에 수행해내야만 하는 헴록 교수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말한다. “아무도 감독을 안 하려 해서 내가 직접 연출했지요.”
영화 속의 등반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헴록이 등반교육을 받기위하여 선택한 대상지는 미국 유타주 모뉴멘트 벨리에 있는 토템 폴 지역이다. 나바호 인디언 구역에 우뚝 솟은 이 ‘지구의 기념비’위에서 날렵한 등반동작을 선보이는 그의 모습은 예민한 야생의 표범이다. 영화의 대단원에 해당하는 북벽등반의 조난 장면은 절로 비명을 터뜨리게 한다. 북벽의 철도창 앞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등반용 칼을 꺼내 자신의 자일을 자를 때 헴록의 표정위로 번지던 죽음의 공포와 마음의 지옥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엔딩 크레딧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 영화에 참여했던 당대 최고의 클라이머들을 확인할 수 있다. 등반을 위한 원정대를 꾸리고 그것을 총지휘한 사람은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당시 세계 산악계의 거목으로 추앙받던 노먼 디렌퍼스다. 실제로 토템 폴과 아이거 북벽에 붙어 등반의 전 과정을 책임진 팀은 듀걸 해스턴이 이끌던 스위스 레이신 국제등산학교 소속 클라이머들이었다. 하긴 이 정도의 든든한 백업 팀들이 없었더라면 ‘적과 함께 자일을 묶는’ 모험 따윈 애당초 불가능 했을 것이다.
[한겨레] 2003년 1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