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0조회 수
44332005년 9월 28일(수)부터 1주일간 인사동 노암화랑에서 박태동의 조각전이 열립니다. 친구인 그를 위해 도록에 실릴 글을 한 편 썼습니다. 본격 미술평론은 아니고 그저 가벼운 에세이입니다.
하찮음에 대한 경배
-박태동의 개인전에 부쳐
심산(작가, 심산스쿨 대표)
너, 내 전시회에 대해서 글 좀 써봐라. 그가 마치 화두를 던지는 고승처럼 그렇게 뜬금없는 숙제를 툭 던져줬을 때 나는 아연 긴장했다. 내가 워낙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써서 밥을 먹고는 있지만 미술평론이라면 언감생심 꿈도 꿔본 적이 없는 탓이다. 하긴 미술평론뿐이 아니다. 한 20여년 쯤 전, 내가 이른바 문단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을 때, 처음 쓴 글이 문학평론이었다. 악의에 가득 찬 [조세희론]을 써내고는 득의만만해하고 있다가 얼마 후 직접 당사자를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내 평생 그토록 부끄러웠던 적은 따로 없었다. 내가 했던 고민은 그가 품었던 고뇌의 100분의 1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된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종류의 평론도 결코 쓰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고 실제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내게 미술전시회에 대한 글을 써보라니? 하지만 박태동은, 언제나 그러했듯, 아무렇지도 않게 쉬운 답변을 되돌려주었다. 네 맘대로 써, 형식이고 내용이고 네 꼴리는 대로. 그것이 지금 현재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연유다. 그러므로, 행여라도 미술작품에 대한 어떤 고견 같은 것을 기대한다면, 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내게 가장 친한 고삐릿적 친구를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박태동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제일 친한 친구로 꼽을 만큼 그렇게 잦은 만남을 가졌던가 하고 반문해본다면 대답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거의 30년에 이르는 세월을 이 비좁아터진 한반도 내에서 함께 보내면서 그다지 자주 만나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와의 만남은 가령 이런 것들이다. 고등학교 미술부실에 숨어서 아그리파 밑에 숨겨놓았던 담배꽁초를 나누어 피우기, 덕수궁 안의 버려진 고건물 지하실에 만들어놓았던 우리들만의 아지트, 껄렁한 친구들을 끌어모아 학교수업을 거부하고 교문을 막차고 나섰던 일, 각자의 애인을 파트너로 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쳤던 복식탁구, 삼청동 밀주집에서 정신을 잃을만큼 마셨던 막걸리. 돌이켜보면 그리운 나날들이다. 그 유치하되 찬란했던 청춘의 기억들은 빛바랜 한 장의 스틸사진이 되어 지금도 내 뇌리 속에 아련히 각인되어 있다.
언제였던가 개차반으로 술에 취해 그의 집에서 함께 잔 적이 있다. 이튿날 아침, 잠이 덜깬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그가 바삐 길을 나섰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그의 학교 미술대학 앞마당이었다. 해가 희뿌윰하게 떠오를 무렵, 그는 나를 등 뒤에 방치해놓은 채 돌을 깨기 시작했다. 나는 쓰라린 위장 위로 다 식은 커피를 부어넣으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 일종의 질투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조각이라는 것은 참 멋진 작업이로군. 저렇게 역동하는 근육 위로 굵은 땀방울을 떨구며 하는 창작활동이란 얼마나 가슴 후련한 일일지. 돌 깨는 소리가 새벽의 교정 안에 맑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깨진 돌조각이 아침햇살 속에 독창적인 파문을 일구고 있었다. 나는 홀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보면서 담배 한 갑을 모조리 피워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와의 만남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한 컷이다.
조각가로서의 박태동에 대해서 나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가 ‘물성(物性)’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는 돌과 나무와 석고와 알루미늄과 무쇠의 속살을 안다. 그가 이 모든 존재들과 정면으로 마주 서서 그것들을 깎고 두드리고 휘고 비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에로틱한 느낌마저 든다. 흡사 오래된 애인들의 질퍽한 사랑놀음을 그들 몰래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는 돌과 대화를 나누고, 석고와 장난을 치고, 나무를 애무하고, 알루미늄과 교합하며, 무쇠와 싸운다. 나는 이 모든 창작행위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혹시 ‘유희(遊戱)’가 아닌가 넘겨짚어 본다. 내 기억 속에 그의 유희정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1998년에 열렸던 5번째 개인전 <오후에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그가 평면의 무쇠를 이리 저리 자르고 비틀어 만들어 놓은 그 ‘행복한 무의미함의 향연’은 참으로 나른하고 아름다웠다.
인간으로서의 박태동에 대해서라면 나는 몇 마디쯤 주워섬길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그토록 자주 만나지도 않으면서 무려 30년에 이르는 세월을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어떤 태도 혹은 기질 같은 것과 관련이 있을 성 싶다. 이를테면 그와 나는 삶에 대한 어떤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고교시절의 우리는 ‘삶의 비밀을 너무 일찍 눈치채버린 소년’들이었다. 우리가 너무 일찍 간파해버린 비밀들이란 어떤 것일까?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개인의 삶이란 결코 일반화시킬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삶의 무의미와 개별성을 견디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제멋대로 재단하려 든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종교와 이념이다. 나는 괴롭더라도 삶의 무의미를 직시할 것이다. 결코 종교나 이념 따위에 기대어 서툰 거짓말로 자신과 세상을 속이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어쩌면 나 혼자만의 것으로, 실제의 박태동과는 전혀 무관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내가 파악하고 있는 나와 그의 공통된 어떤 태도가 이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와 이념의 반대편에서 외로우나 자부심에 넘치는 자세로 우뚝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예술이어야 한다고.
박태동의 조각작품 역시 나는 그렇게 바라본다. 삶의 무의미에 맞서고,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과정. 종교와 이념과 저 잘난 자본주의에 대하여 콧방귀조차도 아깝다고 여길 만큼 철저히 무시하는 부정의 정신. 적어도 이번 전시회 이전까지의 그의 작품들을 나는 그렇게 본다. 하지만 이번 작품들을 보며 나의 생각에는 변화가 일었다. 작품에 임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위에 덧붙여진 것 혹은 마치 아우라처럼 어렴풋하나마 분명하게 감싸고 있는 어떤 것이 생긴 듯하다. 이 새로운 변화를 도대체 무엇이라 이름 붙여야 할까? 나는 그의 화실에서, 그의 작업실에서, 그리고 작품도록을 찍기 위하여 미리 방문한 이번 화랑에서, 그의 최근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스스로 자문해보았다. 어쩌면 그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미술평론가가 아니므로 오히려 뻔뻔스럽고 자유롭게, 그의 작품세계에서 목도되는 새로운 경향에 대하여 이렇게 이름붙이기로 했다. 이번 개인전을 관통하고 있는 그의 주제는 ‘하찮음에 대한 경배’이다.
박태동은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처음으로 자신의 자화상을 조각으로 만들어 출품했다. 그 조각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슬픔 혹은 연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여기엔 두 가지 모습이 다 들어있네. 반항적이고 자부심이 강한 소년 박태동, 그리고 이제는 세상살이에 많이 지친 중년사내 박태동.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작품을 제대로 만든 거야.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삶의 쓰라린 고통들을 낱낱이 맛보았다. 하지만 그는 힘들다며 징징거리는 타입의 사내가 아니다. 이제 그는 다시 조각가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조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조각들을 떠받들고 있는 받침대(pedestal)들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자신의 작품들을 근사한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다.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여전히 비타협적인 작가정신을 고수하고 있는 예술가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을 살아내는 과정에서의 찬란한 유희인 예술에 대하여 그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삶이 하찮다한들 그것에 대한 경배마저 없다면 너무 쓸쓸한 일이다. 어쩌면 하찮음에 대한 경배야말로 예술가 본연의 임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두서없는 글이 너무 길어졌다. 행여 이번 전시회에 대한 나의 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오히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나 아닐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박태동은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크게 괘념할 사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 그를 만나고 그의 작품세계를 즐기면서, 우리의 만남과 삶에 대하여 축배를 드는 것이다. 하찮음에 대하여 경배를, 하찮음에 경배를 표하는 예술가를 위하여 축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