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기 직전 웬 제약회사 사보팀으로부터 책 이야기를 해달라는 원고청탁을 받았다. 어찌어찌하다보니 거절을 못하여 여기까지 와서 원고를 썼다. 쓰고 나서 보니...왠지 모르게 재미가 없는듯 하다. 하지만 뭐...그냥 에식스일기려니..하고 여기면 그만이다...^^
[img1]그 순수했던 열정의 기록
-정해왕, [세계의 지붕에 첫발을 딛다], 창비, 2005
나의 외동딸이 영국에서 유학 중이다. 그녀의 12번째 생일을 함께 하기 위하여 영국으로 날아왔다. 출발 당일의 새벽까지도 일을 다 끝내지 못한 나는 마구잡이식으로 허겁지겁 여행가방을 챙기면서도 서재에 꽂힌 책들을 힐끗거렸다. 아무리 바빠도 반나절은 족히 걸릴 비행시간과 축복처럼 주어진 보름 간의 휴가 동안 하릴없이 뒤적거릴 책 서너 권 정도는 필요할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을 떠나올 때 내가 여행가방에 쑤셔넣은 책은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 존 뮤어의 [마운틴 에세이], 그리고 정해왕의 [세계의 지붕에 첫발을 딛다](이하 [세계의 지붕]으로 약칭)였다.
영국에서 보내는 나날들은 한가롭고 고즈넉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던 핸드폰이 한낱 무용지물로 변해버렸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만한 느낌이다. 어제는 종일토록 바람이 불고 찬비가 내려 일상처럼 즐기던 동네 산책마저 접어두고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읽어 내린 책이 바로 [세계의 지붕]이다. 사실 이 책에 쓰여진 내용들은 내가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것들이다. 1977년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와 관련된 책들은 이전에도 여러 권 출판된 바 있는 것이다. [세계의 지붕]은 그 ‘오래된 이야기’를 ‘어린이용’으로 쉽게 풀어 쓴 것일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읽을 때마다 늘 새로운 감동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들도 있다. 이른바 텍스트가 두껍고,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어, 끝내는 ‘고전’의 지위에 올라서는 이야기들이다. 1977년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내년이면 한국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이 된다. 세월의 느낌이란 참으로 주관적인 것이어서 ‘벌써’ 30년이 되었나 싶기도 하고 ‘아직’ 30년도 안 되었나 싶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그날의 감격은 이제 역사 속의 한 페이지가 되어 버렸다. 그 ‘역사’를 바로 오늘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숨결로 되살려 놓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지붕]은 반갑고 고마운 책이다.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딸에게 줄 생일선물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깨달았다. 이 책은 나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 남을 것이다.
2006년 4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