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없는 아침
송능한 감독의 데뷔작 <넘버3>를 보면 재미있는 대사가 나온다. 깡패조직의 '넘버3'인 한석규가 퇴근길의 승용차 안에서 푸념하는 장면이다. "원래 놀고먹자는 게 건달인데 이건 뭐 회사원보다도 더 바쁘니…." 내 꼴이 꼭 그렇다. 내가 작가가 된 것은 순전히 놀고먹기 위해서였다. 남한테 고개 숙일 줄 모르는 성격이니 취직하긴 애당초 글러먹었고, 꼴에 그래도 결혼이란 걸 하여 아이까지 생겼으니 돈은 벌어와야 될텐데, 혼자 깔짝깔짝대서 밥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작가가 되는 것 밖에 없으리라 싶었던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시간마저 남아돈다면 설렁설렁 놀러다니기에도 그만일듯 싶었고.
하지만 정작 작가생활이라는 걸 해보니 실상은 정반대다. 이 땅에서 전업작가로 산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회사원보다도 더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걸 뜻한다. 수입이 불규칙적이어서 당장 내일 모레가 불투명하니 들어오는 일을 마다할 수 없다. 그 바람에 여기 저기 원고약속을 해놓고 나면 하루가 스물 네 시간이라는 게 저주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아직도 작가란 곧 백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덕분에 온갖 시시콜콜한 집안일들은 물론이고 남의 집 경조사 뒤치다꺼리까지가 모두 내 차지다. 그 결과 매일 매일 스스로도 뭘하는지조차 모르게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만취가 되어 곯아떨어지는 게 그 알량한 작가생활이다.
느즈막한 아침나절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오늘 해치워야할 일정들을 하나하나 체크해보는 것이다.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따져봐도 "오늘 내로 꼭 해야만 될 일"의 목록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술에 너무 찌든 나머지 뇌세포에 버그가 발생했나?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수첩까지 꺼내들고 일정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일년을 끌어오던 시나리오는 지난 주에 넘겼고, 새로 시작한 시나리오는 일단 감독의 검토기간을 거쳐야 한다. 일간지 원고는 미리 써서 넘겼고, 두 개의 월간지 원고는 다음 주말까지만 쓰면 된다. 워크숍 수업은 내일부터고 원래 오늘밤으로 잡혀있던 동창모임은 회장의 외유로 무기한 연기됐다. 그렇다면, 그렇다, 오늘 아침은 축복 받은 시간, 바로 '약속 없는 아침'인 것이다!
핸드폰을 끈다. 커피를 끓인다. 브라암스의 현악 6중주를 올려놓는다. 아내와 딸은 벌써 학교로 가고 없다. 온 집안에 약속 없는 아침의 휴지부(休止符) 같은 행복감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내게 주어진 이 축복 같은 하루를 어디에 쓸까? 오랜만에 카메라를 꺼내들고 촬영이나 할까? 홀로 배낭을 꾸려 북한산의 능선을 밟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약속 없는 아침은 그 모든 가능성의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행복한 삶이란 꽉 찬 스케줄의 반대편 저 끝에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될 때 우리는 문득 잊고 살았던 행복의 낯선 얼굴과 마주 앉게 된다. 바라건대 내 삶의 남은 나날들 중에 '약속 없는 아침'이 많고 많기를!
[월간 에세이] 2003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