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릴 없는 빈둥거림의 미학
[모아이블루]/사진작가 이해선의 이스터섬 체류기/그림같은 세상/2002년
내가 가장 즐기는 일은 여행이다. 매주 즐기고 있는 산행 역시 여행의 특수한 한 형태일 따름이다. 어떤 때 나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매순간 여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여행을 준비하고 있거나, 남들이 남긴 여행의 기록들을 읽고 있거나, 실제로 여행을 즐기고 있거나.
덕분에 내 서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책들이란 온통 이런 부류의 것들뿐이다. 산악문학 분야에 이어 가장 많은 선반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여행서들인데, 이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쳐서, 불현듯 내게 막막한 절망감을 선사하기까지 한다. 맙소사, 이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는담? 아니, 저 많은 산과 도시와 유적지들을 도대체 언제 다 돌아본담? 단언컨대 흡족하게 놀고 가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이 너무도 짧다. 그러니 별 수 없다. 이번 삶을 못다놀고 끝마친다면 다음 삶에 다시 와서 마저 놀아야지.
여행서들만을 전문적(?)으로 읽어오다 보니 이젠 나름대로 풍월도 생겼다. 가장 한심한 여행서? 이른바 '최신여행정보'들을 빼곡히 모아놓은 책이다. 어디서 어떤 비행기를 타고 무슨 방향으로 몇 시간 가면 어디가 나오는데…하는 식으로 써놓은 책들 말이다. 활자매체가 인터넷의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여행정보를 책의 형태로 묶어놓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습다. 이 방면의 최악은 '증명사진파'와 '요점정리파'의 결합이다. 유럽9개국을 보름만에 여행하는 방법이라든가 인도와 네팔을 결합하여 일주일만에 해치우는 방법에 대하여 마치 쪽집게 과외선생처럼 쌈빡하게 정리해놓은 저 위대한 책들!
[img2]여행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느냐?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답안지를 제출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내 답안지는…조금 썰렁하다. 나는 무언가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에펠탑 앞에서 기념사진 찍기가 무섭게 곧바로 루브르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 여행은 "쓸데없는 짓"이어야 한다. 여행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쓸데없이 빈둥거리는 자만이 이따금씩 축복처럼 누릴 수 있는 내면 가득한 행복감"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 하릴없는 빈둥거림의 미학이야말로 여행의 핵심이다. 이 핵심을 제대로 낚아채어 빛나는 문장과 잊지 못할 이미지로 담아낸 책은 흔치 않다.
여행사진작가 이해선을 나는 꼭 한번 만나본 적이 있다. 자신의 사진작품만큼이나 선이 굵고 분방하면서도 한없이 겸허한 인상이었다. 일찍이 그녀가 필름에 담아온 만다라나 카일라스를 볼 때마다 찬탄을 발해왔던 터라 서점에서 [모아이블루]를 집어드는 데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햇살 나른한 오후, 베란다의 긴 소파에 누워 나는 지구 저 반대편, 남태평양의 절해고도 이스터섬으로의 여행을 꿈꾼다. 서두를 필요 없다. 이해선의 말투는 느리다. 기념사진을 찍을 필요도 없다. 이해선의 카메라는 민박집 라파누이 여인네의 여유로운 미소를 설핏 잡을 뿐이다. 책을 뒤적거리다 보니 졸립다고? 책을 잠시 저쯤 밀쳐두고 낮잠이나 한숨 때리면 그만이다.
[모아이블루]는 1급여행서다. 이 책에는 여행의 꿈이 있고 향기가 있고 여백이 있다. 책 속의 작가는 여행지의 일상 속으로 녹아든다. 영리한 작가는 그래서 이 책에 '여행기' 대신 '체류기'라는 문패를 달아놓았다. 시새움에 겨운 나는 책을 뒤적거리며 계속 투덜댄다. 쳇, 여기 사람들은 정말 할 일도 되게들 없군! 흥, 이 작가는 정말 빈둥빈둥 잘도 노는군! 제기랄, 무슨 놈의 석상과 바다가 이리도 잘 어울린담?
[필름2.0] 2005년 2월 9일
여름도 오고, 하루에 많은 시간은 놀기 위한 투자로 생각하고. ^^
[None다]는 말이 이제 철학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이 나이. 한 발 더 나가 삶의 목표를 [None다]에 두고 있는 이 나이. 이 나이 정말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