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김홍성 시집, 문학동네, 2006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시 한편에 가슴이 저릿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제목은 [다시 산에서]라는 작품이었지요. 그 전문은 이렇습니다.
다시 산에서
친구여
우리는 술 처먹다 늙었다
자다가 깨서 찬물 마시고
한번 크게 웃은 이 밤
산 아래 개구리들은
별빛으로 목구멍을 헹군다
친구여
우리의 술은
너무 맑은 누군가의 목숨이었다
온 길 구만리 갈 길 구만리
구만리 안팎에
천둥소리 요란하다
시인 김홍성의 작품입니다. 저는 그를 아주 친숙하게 느끼고 있는데...곰곰히 생각해보니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한때 [사람과 산]의 편집자였고, 인도와 히말라야의 방랑자였으며, 네팔 카트만두에 '소풍'이라는 김밥집을 내고 그곳에 눌러살던 사람이었지요. 배경이 이러하다 보니 그의 허공집(홈페이지)에 자주 놀러가게 되었고...그러다 보니 마치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지고 있는 것이지요. 언젠가 제가 언급한 적이 있는 '히말라야 어깨동무' 사업도 그의 오지랖 안에서 탄생된 작품입니다. 그런 김홍성님이...오랫만에 새 시집을 상재했네요. 가끔씩은 태작들도 눈에 띄지만 여전히 비수와 같은 시편들이 곧장 가슴으로 날아와 박힙니다. 다른 작품을 하나 더 읽어볼까요?
룽따가 있는 풍경
이 세상 낯설어
선잠 깬 아이 우는데
바람 분다
바람 부는 세상에 갇혀서
룽따가 나부낀다
울면 울수록 무정한 설산
울면 울수록 커지는 바람소리
더운 눈물은 찰나에 식고
또 배가 고프다
큰 독수리 날개 펼친다
룽따란...오색헝겁에다가 불경을 새겨넣은 바람깃발입니다. 히말라야 부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지요. 시를 읽는 동안 그 황량한 풍경들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내가 너무 오래 산으로부터 떨어져 있구나...하는 쓰라린 자책감(?)과 함께 말이죠. 최근 김홍성 님은 아주 커다란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저희 설산파(!)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던 그의 젊은 아내가 그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아내가 떠나기 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게 그나마 작은 위안거리처럼 느껴집니다. 엊그제가 그녀의 49제였는데...가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이번 시집에서 가장 강렬한 '방랑자의 노래'는 [귀 후벼주는 남자의 노래]입니다. 가슴 속을 쾅쾅 울리는 광란의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귀 후벼주는 남자의 노래
벌판에서 태어나리라
드넓은 벌판 보리수 밑에
버려진 아이로 태어나리라
김매러 나온 늙은 아낙 땀에 절어 찝찔한 젖 빨며
업둥이로 자라리라
물소 등에 앉아 풀피리 불고
벌판에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자라리라
말라리아도 코브라도 콜레라도 굶주림도 겪어보리라
늙은 어미 먼저 죽고 없어도 혼자 살아보리라
맨발로 벌판을 걸으며 독수리 밥 빼앗아 날로 먹으며
벼락도 맞고 짱돌 같은 우박도 맞고 몰매도 맞으면서
질기게 살아보리라
한번 울면 천둥같이 울면서
한번 걸으면 백 리를 내달으며 설산까지 가보리라
설산 어귀에 이르기도 전에 자랄 건 다 자라리라
잔뼈도 주먹도 콧수염도 턱수염도 다 자라고
불알 두 쪽도 거치적거릴 만큼 자라리라
이제 무엇이 더 될까 고민할 만큼 자란 몸
벼랑 아래로 던지고 싶을 만큼 자라리라
굶고 또 굶어서 독버섯 먹고 미쳐서
벼랑 아래 몸 던지고도 안 죽고 살면 더 살아보리라
마을에 내려가 양치기네 곰보 딸 사위도 돼보고
애비 노릇도 해보리라 도적질도 해보리라
밤이면 집 없는 개를 껴안고 자면서
또다시 귀이개 하나로
뉴델리 봄베이 캘커타 마드라스 코친
역에서 역으로 떠돌아보리라
세상 귓구멍 만 개는 더 후벼보리라
후벼낸 귓구멍마다 속삭이리라
이 세상 몇 번이고 다시 와서 살고 싶다고
다시 와서 이렇게 저렇게 닥치는대로 살고 싶다고
그리고 꼭 한마디 덧붙이리라
못 오면 말지요 라고
...김홍성 형님, 시 참 좋습니다. 형수님 먼 길 가시는데 배웅도 못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조만간 작은 탁자 위에 "너무 맑은 누군가의 목숨"을 올려놓고 마주 앉아 곯아 떨어질 때가지 한번 마셔보고 싶습니다. 나팔꽃 피는 창가에 앉아서 말이죠...부디 몸과 마음 잘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심산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