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악에 그가 있었네
제주올레 제3코스 온평~표선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초여름의 뙤약볕이 따갑게 내리쬐던 날이었다. 반팔과 반바지 밖으로 삐져나온 나의 수족은 곧 익어버릴듯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늘에 앉아 땀을 훔치며 찬 물을 벌컥벌컥 들이킬 때마다 나는 투덜거렸다. 뭔 놈의 코스가 이 모양이람? 잠시 바다를 버리고 중산간으로 접어든 것까지는 좋아. 그렇다면 제대로 된 흙길이 깔려 있어야 될 것 아니야. 뙤약볕 아래 아스팔트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도록 만들어놓은 건 도대체 무슨 심뽀야?
하지만 푸념도 괴로움도 이내 무디어진다. 실연당한 이의 가슴앓이에도 유통기한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걷기에는 나름대로의 자정능력이 있다. 하염없이 걷다보면 행복한 상상도 불행한 기억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상념 없이 무작정 걷는 것을 ‘명상’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제3코스를 나는 그렇게 걸었다.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다만 뼈와 근육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렇게 걷는 것을 ‘평화’라고 해야할지 ‘순응’이라고 해야할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삶’이라 해야할지.
통오름 위에서 방목 중인 말들을 만났다. 녀석들의 순한 눈빛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독자봉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할 때 즈음이면 새삼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가를 깨닫고는 피식 웃는다. 산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비탈진 나무 그늘에 주저앉아 숙소에서 싸온 주먹밥을 먹으며 허기를 달랜다. 사위가 고즈넉하다. 바람소리와 매미소리 그리고 내 턱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전부다. 뙤약볕이 만들어낸 아지랑이 너머 저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일렁거린다. 문득 삶이란 ‘그저 견디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온평에서 표선에 이르는 제주올레 제3코스는 삶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든다. 이 길은 화려하지 않다. 어찌 보면 지루하고, 심심하고, 외롭고, 고즈넉한 길이다. 덕분에 이 길을 걷는 사람은 별 수 없이 자기 자신에게 빠져들고 만다. 자신과, 자신의 삶과, 인간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그 상념의 실타래들이 얽히고 설켜 육신이 무겁게 느껴질 즈음 한 예술가와 그가 남긴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다.
살아생전의 김영갑과 나는 단 한번 스쳐지나간 적이 있다. 1980년대의 후반이니 그가 이미 제주에 정착한 다음의 일이다. 아마도 어떤 전시회의 뒷풀이 자리가 아니었나 싶다. 인사동의 허름한 술집은 저마다 한 가닥씩 한다는 가난한 예술가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술상 끄트머리쯤에 자리 잡고 있던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나마 오래 앉아 있지도 않고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더니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내 앞에 앉아 있던 선배 시인이 지나가는 말투로 툭 내뱉었다. 김영갑이라고, 사진 찍는 친군데, 제주에 완전히 미쳐있는 녀석이야.
당시의 그는 제법 건장한 체구에 개량한복을 걸치고 댕기머리를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인사동 예술가’ 타입이다. 나는 곧 그를 잊어버렸다. 내가 본래 ‘예술가연’하고 돌아다니는 인간들에 대하여 내심 경멸 내지 혐오를 품고 있었던 까닭이다. 훗날 누군가 내게 그의 사진산문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선물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김영갑을 영원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의 사진산문집은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다. 그의 사진은 너무 아름다웠고, 그의 산문은 너무 진정했는데, 그의 삶은 너무 피폐해져 있었던 것이다. 김영갑은 그 책을 출간한 이듬해인 2005년 영면에 들어갔다. 화장하고 남겨진 그의 뼛가루들은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의 앞마당에 속절없이 뿌려졌다.
[img2][img3]그의 사진산문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이 너무 좋아 몇 년 전 나는 일부러 두모악을 찾아왔었다. 책에 인쇄되어 있는 사진이 아니라 원본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렌트카를 타고 휑하니 달려와 두모악을 둘러보고는 바삐 떠나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걸어서 갔다. 온평에서 걸어서 두모악까지,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오래동안 내 망막에 새겨넣은 다음, 다시 걸어서 두모악부터 표선까지. 그리고 이제 확신한다. 김영갑의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걸어가야 한다. 마침 두모악은 제3코스의 한 가운데 있다. 온평에서 두모악까지 걷는 길이 그를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면, 두모악에서 표선까지 걷는 길은 그 만남의 여운을 오래도록 음미해보기 위한 소화과정인 셈이다.
김영갑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제주는 도무지 현세의 땅 같지가 않다. 다만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사랑한 제주는 ‘인연의 저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다. 그 땅 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기쁨이나 슬픔 혹은 고통 따위는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 다만 땅이 있고, 오름이 있으며, 바다가 있고, 바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슬픔에 가슴이 저려온다. 아니다. 슬픔이라 말하는 순간 틀리게 된다. 체념, 순응, 평화, 열반, 삶...그 어떤 단어를 들이대도 작품을 배신하게 된다. 하긴 말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굳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단 말인가? 김영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자신의 사진 속에 담았다. 그것이 김영갑의 제주다.
제주올레를 걸으며 우리는 두 명의 예술가를 만나게 된다. 하나는 제3코스에서 만나는 김영갑이고 다른 하나는 제6코스에서 만나는 이중섭이다. 두 코스 모두 어찌 보면 그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길을 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좋다. 아니 그래서 좋다.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코스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길이 너무 단조롭고 지루하다고? 온몸이 마른 장작개비처럼 말라가는 루게릭병에 걸려 그토록 사랑하던 카메라 셔터 누르기조차 못하게 되었던 김영갑을 떠올려보라. 삶의 의미도 모르겠고 너무 지쳐 있다고? 김영갑의 사진 속 제주와 마주 서 보라. 어쩌면 남은 길을 걸어갈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두모악에서 신풍을 거쳐 표선과 당케에 이르는 길은 그러므로 ‘긍정’의 길이다. 신풍에 이르러 탁 트인 바다목장을 걸어갈 때쯤이면 여지껏 보아왔던 바다조차 달리 보인다. 목장을 어슬렁거리는 게으른 소떼들도 갯바위에 붙어 앉아 무언가를 캐내고 있는 이름 없는 아낙들도 모두 두 팔을 벌려 안아주고 싶다. 표선 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모래밭 오솔길은 정겹기 그지없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면 이내 시야에 가득 펼쳐지는 천혜의 해수욕장 표선! 이제 신발을 벗을 때가 되었다. 하루 종일 무거운 육신을 이끌고 온 내 두 발에게 경의를 표할 시간이다. 평생토록 무거운 상념들을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이곳까지 온 내 몸뚱아리에게도 그에 합당한 세례를 베풀어야 될 순간이다. 배낭을 벗어던진다. 신발도 내팽개친다. 그리고 표선의 고운 모래사장을 핥듯 애무하고 있는 그 아름다운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풍덩!
[img4][제민일보] 2009년 10월 31일
그리고 '두모악'은...'한라산'의 옛이름, 그러니까 '본디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