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9-12-03 18:24:23 IP ADRESS: *.237.82.65

댓글

8

조회 수

2915



[img1]

바닷가우체국에서 엽서를 쓴다
제주올레 제7코스 외돌개~월평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제주올레의 전코스를 순례하다보면 세 번 들러야 되는 장소가 딱 하나 있다. 바로 외돌개다. 6코스와 7-1코스 그리고 7코스가 모두 외돌개를 출발점 혹은 도착점으로 삼고 있는 까닭이다. 외돌개는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광 때문이 아니다. 키 큰 나무들 사이 파란 풀밭에 자리 잡고 있는 야영장 때문이다. 야영장 텐트 앞 접이식 의자에 앉아 시에라컵으로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움과 시새움에 찬 눈빛으로 흘낏거리며 남 몰래 결심한다. 다음에는 이곳에 나만의 베이스캠프를 쳐야지.

내가 좋아하는 여행 혹은 산행 스타일은 베이스캠프형(形)이다. 한곳에 베이스캠프를 쳐놓고 주변을 싸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 쉬고는 다시 떠나는 스타일. 거벽등반을 위하여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찾았을 때에는 저 역사적인 써니사이드 캠프장에 베이스캠프를 쳤다. 에베레스트 북면 티베트 베이스캠프에서는 무려 두 달 가까이를 머물렀다. 동남아 여행의 베이스캠프로는 역시 태국 방콕의 카오산로드가 제 격이다.

제주올레 역시 마찬가지다. 제주 남해안 서쪽지역을 순례할 때 나의 베이스캠프는 모슬포의 펜션 겸 북카페 사이다. 동쪽지역을 순례할 때라면 제4코스 초입의 길목민박 정도가 좋겠다는 것을 이번 올레길에서 깨달았다. 그렇다면 남해안의 정중앙지역을 순례할 때는? 바로 외돌개다. 펜션이고 민박이고 예약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텐트조차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외돌개 풀밭에 배낭을 베고 벌러덩 누워 키 큰 나무들 위로 쏟아지고 있는 별빛을 헤아리다 잠드는 것보다 더 훌륭한 숙소가 따로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월평까지 이어지는 제7코스를 걷기 위해 외돌개로 모여든 일행들의 면면이 각양각색이다. 제6코스를 함께 걸었던 사람들을 비롯하여 산악회 후배에게 물어물어 찾아왔다는 낯선 청년 둘, 제주에서 근무 중인 신명희가 초대한 여고동창생 둘, 와인반 동문회원인 치과의사 박선주, 인디라이터반 동문회장인 게임전문가 차영훈 등 모두 열두 명이나 된다. 혼자 걷는 올레는 호젓해서 좋고 둘이 걷는 올레는 다정해서 좋다.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떼를 지어 웃고 떠들며 왁자지껄하게 걷는 올레도 그 나름의 맛이 있는 법이다.

수봉로로 접어들자 찬탄이 나온다. 이전까지의 깔끔한 나무데크길이나 아기자기하게 이어지던 돔배낭길과는 또 다른 맛이다. 온전히 사람의 손으로 만든 좁은 흙길이 정겹다. 제주올레의 참맛은 이런 길이다. 거의 원시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수공업적 방식으로 만든 흙길 모래길 바위길. 이쯤에서 끊어지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저만치 앞 나무 가지에서 눈웃음치듯 팔랑거리는 파란 리본들. 끊어질듯 이어지는 구비마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소풍날에 선생님이 미리 숨겨놓으신 보물처럼 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반가운 화살표들.

[img2]

막숙을 통과할 때쯤 논쟁 아닌 논쟁이 시작된다. 아니 몽고 애들이 우리나라에서 말을 키웠어요? 야 임마, 한 동안 원나라가 제주도를 지배했었다는 것도 모르냐? 아니 언제요? 놀러다니지만 말고 공부 좀 해라. 범섬 전투의 첫 무대가 바로 여기잖아. 범섬 전투는 또 뭐에요? 하이고 답답해라, 너 최영 장군은 아니? 사실 일행 중 그 누구도 제주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은 없었다. 조금 안다는 사람조차 그저 인터넷에서 흘낏 본 조악한 정보들을 주워섬길 뿐이다. 오는 길에 산 제주감귤을 오물거리며 제법 건설적인 약속을 한다. 우리 다음에는 공부 좀 해가지고 오자. 밤마다 술만 처먹지 말고 제주역사 세미나라도 한번 해보자구.

사실 역사와 동떨어진 풍광이란 일종의 판타지일 뿐이다. 탈역사화된 이미지란 광고사진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 아름다운 올레길에서도 우리 역사의 기쁨과 슬픔을 본다. 제주 역사의 고통과 자부심을 읽는다. 다만 우리 각자가 ‘아는 만큼만 보는’ 것일 뿐. 풍광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보다 많이 보고 싶다면 그 대상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대상을 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제주올레 순례는 작은 시작일 뿐이다. 제주올레는 아름답다.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 더 깊이 알아가게 될 것이다.

풍림리조트 앞에서도 풍광은 역사와 충돌한다. 풍림리조트에 이르는 해안길은 꿈결처럼 아름다운데, 그 앞에서 나부끼고 있는 노란 깃발들은 삶의 고통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깃발들은 바다 바람에 펄럭이며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해군기지 결사반대. 청마 유치환이었던가? 허공에서 나부끼고 있는 깃발을 보며 그것을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명명했던 사람은? 웃고 떠들며 이곳까지 왔던 일행들도 그 준엄한 삶의 현장 앞에서는 잠시 입을 다문다.

풍림리조트에는 바닷가우체국이 있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체국이다. 사면이 툭 트인 정자의 통나무 밑둥 의자에 앉아 저마다 엽서를 쓴다. 어떤 이는 오래 전에 떠나간 옛사랑에게 회한에 젖은 안부를 전하고, 또 어떤 이는 이틀 전에 떠나온 집의 어린 딸아이에게 사랑의 인사말을 건네고, 또 다른 이는 불현듯 떠오른 고마운 어르신에게 존경이 담뿍 담긴 엽서를 보낸다. 우표를 붙일 필요는 없다. 그저 그렇게 몇 자 끄적거린 다음 옆에 있는 빨간색 우체통에 넣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엽서는 마술처럼 하늘을 날아가 그리운 이의 우편함에 꽂힐 것이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말했다. 내 안에는 정착민과 유목민이 있다. 그 둘은 서로 싸우며 함께 산다. 사람들과 더불어 올레길을 걸으며 깨닫는다. 혼자 걸을 땐 여럿이 그립다. 여럿 속에 섞여 있을 때는 혼자되기를 원한다. 그토록 유쾌하게 웃고 떠들며 걷던 일행들이 바닷가우체국에 이르자 마치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작은 엽서를 끌어안고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머무르다 보면 떠나고 싶고 떠나가면 돌아오고 싶은 법이다. 우리는 그토록 모순된 존재다. 하지만 삶 자체가 모순투성이인 것을 어찌 하랴. 그저 더불어 함께 살아갈 뿐이다.

풍림리조트에서 빠져나오는 숲길이 온통 초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환상적인 숲길을 취한듯 걷고 있자니 언제 그렇게 내 안에 침잠하여 조용히 엽서를 끄적거렸던가 싶다. 일행들 사이에 다시 웃음꽃이 터져나온다. 내딛는 발걸음에 힘이 솟는다. 강정 포구를 지나니 알강정이 저 앞이다. 누군가 불기 시작한 휘파람을 하나 둘씩 따라 부는가 싶더니 어느새 유쾌한 오케스트라 행진곡이 되어간다. 월평 포구가 여기서 멀지 않다. 우리들의 올레길 혹은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img3]

[제민일보] 2009년 12월 5일

최준석

2009.12.03 23:53
*.152.24.74
갈데는 너무 많군요.. 1월에 일 다 째고 함 내려갈까나..ㅋ
profile

윤석홍

2009.12.04 08:43
*.229.145.41
안도현의 <바닷가 우체국>이란 시가 생각나는 아침!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 우체국이 있다 /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중략)
profile

심산

2009.12.04 08:57
*.110.20.43
준석아 나 어제 뱅기표 예매했다
1월 8일 금요일에 내려갔다가 1월 18일 월요일에 올라온다
그 사이에 아무 때나 내려와라...^^
profile

명로진

2009.12.04 15:02
*.192.225.223
우리의 삶은 모순 투성이.....
그게 정답인 듯 싶습니다.
한 때 그토록 하나의 답을 찾아 헤매었으나
답이 여러 개 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부터는
삶이 조금은 편해 집디다.
좋은 글 입니다.^^
profile

심산

2009.12.04 15:10
*.237.82.39
맨 마지막 사진 속의 아가씨가 누구냐고...소개 좀 시켜달라고...
쪽지 보내는 놈들이 많은데...
몰라! 모른다고! 그냥 모르는 아가씬데 진석이 카메라에 찍힌 거라고!!!
(한번만 더 쪽지 보내봐라 걍 죽는다...ㅋ)

김진석

2009.12.04 17:09
*.12.40.230
음 난 노 코멘트. ㅎㅎ(다시 보니 이쁘게 나왔네 ㅎㅎ)

최운국

2009.12.06 20:10
*.202.180.46
잘다녀오셨나요?
모슬포의 팬션 겸 북카페사이 가 아니라
제주올레 게스트 하우스 사이에 북카페가 있슴돠^^
개눈에 똥만 보이나 봅니다^^
profile

심산

2009.12.07 13:36
*.241.46.65
흠 운국, 그렇군...ㅋ
1월달에 내려간다 그때 보자!^^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3 샤또몽벨 송년회 사진전(2) + 10 file 심산 2009-12-21 2696
112 샤또몽벨 송년회 사진전(1) + 7 file 심산 2009-12-21 2481
111 할매의 절벽과 추사의 계곡 + 4 file 심산 2009-12-20 11376
110 젊음이 넘쳐나는 화려한 올레 + 9 file 심산 2009-12-11 2507
» 바닷가우체국에서 엽서를 쓴다 + 8 file 심산 2009-12-03 2915
108 심산이 찍은 발리 사진들 + 16 file 심산 2009-12-01 5100
107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 11 file 심산 2009-11-26 2525
106 맑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 5 file 심산 2009-11-17 2691
105 다정한 사람과 와인을 홀짝 물회를 후루룩 + 11 file 심산 2009-11-11 2798
104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길 + 7 file 심산 2009-11-06 2490
103 두모악에 그가 있었네 + 5 file 심산 2009-10-26 2487
102 제주 삼신인이 신접살림을 차린 곳 + 8 file 심산 2009-10-22 2531
101 제주올레의 ‘스토리’가 시작된 곳 + 7 file 심산 2009-10-16 2469
100 제주올레의 맛뵈기 혹은 축소복사판 + 15 file 심산 2009-10-05 2635
99 내 인생의 비틀즈 + 5 file 심산 2009-09-16 3146
98 딴지총수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 22 file 심산 2009-08-28 4283
97 길은 그리움이다 + 9 file 심산 2009-07-08 2812
96 서문/올레를 생각한다 + 6 file 심산 2009-07-08 2491
95 심산 in 제주올레 by 김진석 + 9 file 심산 2009-07-05 2310
94 사이의 소주와 맥주(2) + 10 file 심산 2009-07-01 26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