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0-05-06 18:38:08 IP ADRESS: *.237.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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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랫만에 글을 쓰는군요
검색해보니...제주올레 글은 2009년 12월 24일 이후 처음으로 씁니다
그 사이에 제주올레 책을 포기(!)했다가
이러 저러한 과정을 거쳐 올 여름쯤 내기로 했습니다
영화 속 와인...이란 주제의 글은 2009년 5월 이후 멈춰있군요?
이것도 빨리 완결시켜서 책으로 내야할텐데...
게다가 [대부: 시나리오와 제작노트] 번역 껀은 또...
출판사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고...
이제 다시 시작했습니다
어찌되었건 좀 더 부지런해져야 되겠다(!)고 다짐해봅니다

[img1]

봄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 물결
제주올레 10-1코스 가파도 올레

글 사진/심산(심산스쿨 대표)

유난히도 긴 겨울이었다. 나라 안팎으로 악재들이 넘쳐나고 세월이 하도 뒤숭숭하니 봄이 와도 온 것 같지 않다(春來不似春). 인간사와 세상사에 치이는 것이 싫어 애써 무심해지려하는 사람일지라도 습관처럼 기다리는 것이 봄이다. 봄이 온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계곡의 얼음 아래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파릇한 새싹들 사이로 꽃망울들이 봉긋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 명치 아래로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법이다.

내 집필실이 들어있는 빌딩의 유리창이 온통 뿌옇다. 이따금씩 빗줄기라도 들이칠 때면 누런 색으로 일그러지는 추상화가 음울하고도 기괴스럽다. 창틀에 내려앉은 황사모래는 아예 그곳에 똬리를 틀 기세다. 답답한 마음에 집필실을 박차고 나와 거리를 배회한다. 하지만 거리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바쁜 사람들과 자동차 배기통에서 내뿜는 매연가스만이 가득할 뿐이다. 별 수 없다. 배낭 하나 들쳐 매고 제주행 비행기에 오른다. 제주올레는 그럴 때 오라고 거기에 있는 것이다.

숙소인 모슬포 사이에 짐을 푸니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 가파도에 올레길을 내고 10-1이라는 코스명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꼭 반가운 것만도 아니다. 남 몰래 아껴두었던 보물이 만천하에 공개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긴 제주도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이없어 하며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제주올레라는 것 자체가 제주의 숨겨진 비경들을 외지인들에게 아낌없이 공개하고 함께 걷자고 만드는 길이 아닌가. 그러므로 사심(?)없이 이야기하자. 제주에 속한 많은 섬들 중에 가파도가 우도에 이어 두 번째 올레길로 지정된 것은 축하해 마땅할 일이다.

하지만 가던 날이 장날이었다. 가파도행 배를 타려 모슬포항에 도착한 우리는 혼비백산했다. 승선티켓을 사러 늘어선 사람들의 줄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30분 넘게 줄을 서서 겨우 매표구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탈 수 있는 배의 출발시간이 다시 늦춰졌다. 한 마디로 앞의 배가 매진되어버린 것이다. 하필이면 일요일이었다. 게다가 매년 4월 초에 5일간 지속되는 ‘가파도 청보리 축제’ 기간이었던 것이다. 제주에서 보내는 귀한 휴가를 ‘승선 대기 시간’으로 허비할 수는 없다.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며 두말없이 포기하고 산방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아침술(!)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딱 한잔만, 하고 시작한 아침술이 끝날 기미를 안 보인다. 시원한 밀면 육수와 기름기를 쪽 뺀 수육이 한라산 소주와는 천상의 궁합니다. 혀가 꼬이기 시작한 일행들 사이에서 결론 없는 논쟁이 시작된다. 우리가 제주올레를 찾는 것은 한적함을 즐기기 위해서잖아? 근데 제주올레가 유명해지면서 점점 북새통이 되어가고 있어. 이 딜렘마를 도대체 어떻게 한담? 똑 부러지는 답변이 있을 수 없다. 덕분에 식탁 위의 한라산 병만 자꾸 늘어난다. 야, 하나마나한 이야기 집어치우고 걷기나 하자. 대낮부터 불콰해진 얼굴로 숙소를 향해 내쳐 걷는다. 그렇게 걷는 길 역시 제주올레다.

[img2]

월요일 아침의 모슬포항은 한적했다. 저 멀리 보이는 가파도가 온통 푸르다. 저 유명한 가파도의 청보리밭이다. 우리나라의 봄은 어떻게 오는가. 17만평에 이르는 가파도의 보리밭을 파랗게 물들이며 온다. 올해 가파도 청보리 축제에서는 많은 행사들이 유보되었다. 천암함 사태로 인한 전국민적 애도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한 것이다. 덕분에 축제라고 하기에는 다소 차분한 분위기였고, 그 고즈넉한 빈 공간 사이로 봄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올해 봄을 어떻게 맞았는가. 따사로운 햇살 아래 풍요롭게 넘실대는 가파도 청보리밭에서 맞았다. 잠시 세상사의 근심 걱정을 잊어도 좋을만한 순간이었다.

독립된 코스명을 가지고 있는 제주올레들 중에서 가파도 올레가 가장 짧다. 총연장이 5Km에 불과하고 높낮이도 거의 없어 빨리 걸으면 한 시간 안에라도 주파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가파도까지 가서, 빨리 걸을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일행들은 저마다 느릿느릿 제 갈 길로 간다. 길에서 벗어난다 해도 서로를 빤히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조그만 섬이다. 섬의 최고점이 해발 20.5m에 불과하니 거의 평지라 해도 무방하다. 바다 위에 ‘살짝 얹혀진’ 형국인 까닭에 파도의 영향을 크게 받고 따라서 이따금씩 배가 못 뜨기도 한다.

올레로 지정되기 이전부터 가파도는 내게 ‘산책하기 좋은 섬’이었다. 축제 때가 아닌 평시에 가파도 가는 배는 하루에 세 번 뜬다. 나는 보통 아침 9시 배를 타고 들어가 두 어 시간 거닐다가 정오 배를 타고 나온다. 내게 있어 가파도는 ‘점심 먹으러 가는 섬’이기도 하다. 가파도민박은 가파도의 터주대감격 식당이자 숙소인데, 이 집 정식이 한마디로 예술이다. 호화롭지 않되 맛깔난 제주 토종 반찬들이 무려 스무 종류 이상 쫙 깔린 밥상을 받아들면 절로 헤벌쭉 웃음이 나온다. 오늘따라 갖가지 반찬들에서도 봄내음이 물씬 난다.

숲에 들어가면 코 앞의 나무만 보인다. 숲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야 한다. 우도나 가파도를 올레코스로 넣은 속뜻을 나는 그렇게 읽는다. 제주도 안에 있으면 제주도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우도나 가파도에서 ‘바다 건너로’ 보는 제주도야말로 정말 근사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가파도에서의 풍광을 더욱 높이 친다. 바로 앞에 보이는 송악산과 그 너머의 산방산이 그대로 한폭의 그림이다. 제주의 산세(山勢)에 대하여 제법 눈썰미를 갖춘 사람이라면 그 몽환적인 화폭 안에서 한라산과 군산, 그리고 고근산과 단산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제주의 모든 올레가 ‘휴식’을 표방하고 지향하지만 가파도 올레는 ‘휴식’ 그 자체다. 다른 올레들은 모두 하염없이 걸어야 하지만 가파도 올레는 걷지 않아도 좋다. 바다 건너의 제주도와 마라도를 감상하고, 청보리밭 사이에 뜬금없이 놓여져 있는 고인돌들을 보며 고대의 삶을 상상하고, 이 작은 섬에서의 단아하고 정갈한 삶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 고즈넉한 휴식 속에서 남은 삶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충전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 않은가.

[img3]

[제민일보] 2010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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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10.05.06 18:42
*.237.80.2
10-1 가파도 올레를 김진석은 아직 못 걸었다
그래서....별 수 없이 똑딱이로 찍은 내 사진을 올렸다
김진석은 7월초에 나와 함께 다시 제주도로 향할 것이다

김명수

2010.05.06 21:40
*.253.60.34
사진 좋은데요^^ 가파도도 가봐야 하는군요...

신명희

2010.05.07 09:42
*.99.151.65
헉~~ 제민일보 연재 다시 시작하시나요?
음~~ 저~~어기 또 둥장하는군요!!!ㅋ

이유정

2010.05.07 10:00
*.219.73.120
산방산과 송악산이 그대로 보이는군요. 마라도와 우도 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가파도라....갈 곳이 점점 늘어가요.
profile

심산

2010.05.07 14:06
*.237.80.149
단골출연자 명희...의 뒷통수가 조~오기 보이네....ㅋ
profile

윤석홍

2010.05.07 16:57
*.229.145.41
심샘, 슬슬 시동을 걸었으니 잘 달리겠지만 설렁설렁 손 놀리시길^^

강지숙

2010.05.07 19:19
*.131.155.117
명희 언닌 모델료 받아야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
드넚은 초록에 보라색 점 하나로 상콤함을 더해주시네요.

최상식

2010.05.08 00:29
*.133.10.24
가파민박 정식 참 맛있었는데^^

김주영

2010.05.17 17:09
*.98.10.189
청보리밭길을 오누이가 나란히 나란히...ㅋ
7월초 일정 나오면 올려줘..
profile

심산

2010.05.18 01:13
*.110.20.206
나와 김진석의 스케줄은 일찌감치 결정되어 있다

7월 1일 목요일 오후 4시 45분>5시 50분
7월 6일 화요일 오후 5시>6시 5분

문수지

2010.05.20 09:48
*.32.31.238
어우.... 자꾸 제주도 여행가고픈 욕망을 불러일으켜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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