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초록의 위안
제주올레 14-1코스 저지~무릉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살다보면 화려함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매일 보는 얼굴들에 지치고 꿈도 흥분도 기대도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낼 때. 온통 탈색된 듯 고만고만한 색들에 둘러싸여 어디 하나 방점 찍을 데를 찾을 수 없을 때. 그럴 때 문득 마주친 화려함은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대상 없는 설레임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러나 또한 살다보면 화려함에 싫증날 때도 있다. 마치 스마트폰의 현란한 애플리케이션들 사이에서 정신을 잃고 유영하다가 문득 예전의 투박한 유선전화기통이 그리워지는 순간과도 같이. 또는 하나 같이 컬러풀한 명품으로 도배질을 한 도시 아가씨들 사이에서 정지용의 시귀처럼 “예쁠 것도 없는 맨발의 아내”가 더욱 도드라지게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와 같이.
화려함이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화려함은 우리를 흥분시키고 꿈꾸게 한다. 오해 없기 바란다. 흥분과 꿈은 그것 자체로서 충분한 존재 가치가 있다. 다만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뿐. 구원은 보다 단순한 것과 관련이 있다. 굳이 구원까지는 아니어도 좋다. 그저 단순한 위안이어도 좋다. 무엇이 우리를 위안하고 구원할 것인가? 단순함이다. 화려한 컬러의 유화가 아니라 단순한 수묵화 또는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진수성찬이 아니라 그저 반찬 한두 개를 곁들인 소박한 밥상.
저지에서 무릉에 이르는 제주올레 14-1코스를 걸으며 내내 떠올리고 음미했던 것은 그런 것이다. 단순한 초록의 위안 혹은 원초적인 생명력의 구원. 이 길은 마치 괴테의 명언을 오감으로 체험하도록 만들어진 것 같다. “오직 영원한 것은 저 생명의 푸른 나무들뿐.” 14-1코스는 온통 숲이다. 화려한 바다의 풍경도 깎아지른 절벽의 위용도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사람살이의 흔적도 없다. 그저 숲길을 하염없이 걸어갈 뿐이다. 놀라운 것은 그래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다. 위안과 구원은 이 길의 굽이굽이마다 넘쳐나 그 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 모두를 깨끗하게 정화해준다.
정규코스 이외의 일련번호를 부여받은 길들은 모두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 제주올레는 왜 14-1코스를 만들었을까? 답변은 길 위에 있다. 너무나도 단순명쾌하여 재론의 여지조차 없다. 모슬포에서 무릉에 이르는 제주올레 11코스의 말미에서 ‘잠깐 맛만 보여준’ 곶자왈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이 거대한 곶자왈의 한 귀퉁이만을 흘끔 보여준 것만으로는 도시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14-1은 곶자왈을 ‘질리도록’ 보여준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하루 종일 곶자왈 속을 헤매어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코스명이 14-1로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곶자왈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면 11-1이라 했어도 무난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11코스의 종점이 무릉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코스는 14-1이라 명명되었고, 정방향은 저지에서 무릉 쪽으로 걷는 것이다. 직접 걸어보니 이 방향 역시 반대로 걸어도 무방하다. 정방향은 곶자왈 좁은 길(저지 곶자왈)에서 곶자왈 넓은 길(무릉 곶자왈)로 나아간다. 역방향은 그와 반대로 넓은 길에서 좁은 길로 들어간다. 걷는 이의 취향에 따라 결정할 일이다.
[img2]14-1코스의 새로운 동행은 호경미. 심산와인반 겸 김진석사진반의 친구인데 미국계 유통업체인 월마트에서 근무한다. 그녀가 이번 올레길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 독립기념일 덕분이다. 미국 본사의 스탭들이 모두 휴가를 떠나버려 업무 처리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것. 나 원 참 살다보니 미국 독립기념일 덕을 다 본다며 일행들 모두가 껄껄 웃는다.
사실 그녀는 출발 당일 아침까지도 전전긍긍했다. 평소 운동 부족이어서 과연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이다. 두 분은 제가 뒤로 쳐지면 버리고 가실 거지요? 중간에 포기하고 되돌아와도 되나요? 본래 선수들의 대답은 간결하고 무뚝뚝하다. 당근 버리고 가지. 글쎄 중간에 퇴각로가 있는지는 가봐야 알지. 하지만 실제 상황은 놀랍도록 순조로왔다. 그녀는 다리 아프다는 내색 한번 보이지 않고, 게다가 무거운 카메라 셔터를 쉬지 않고 눌러대며, 그 길고 긴 길을 행복하게 걸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친화력과 정다움이야말로 14-1코스가 선사하는 최고의 미덕이다.
저지 곶자왈에 진입하기 전에 야트막한 오름에 오른다. 초승달처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말굽형 오름이다. 문도지 오름으로 접어들자 김진석과 호경미의 카메라 셔터가 마치 속사포처럼 바삐 여닫힌다. 오름 정상 부위에 제멋대로 늘어선 채 때로는 서로를 애무하고 때로는 서로 장난질을 치고 있는 말들 때문이다. 제주 특유의 조랑말 간세가 아니라 다리가 길고 늘씬하여 잘 생긴 녀석들이다. 그들의 자유로움과 한가로움이 지나치는 과객들의 마음까지 푸근하게 한다. 호경미가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며 탄식하듯 말한다. 여기가 천국이 아닐까 싶네요.
저지 곶자왈의 좁은 오솔길은 그 자체로서 생명력의 찬양이다. 곶자왈은 단일 품종의 수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아니다. 남방 한계 식물과 북방 한계 식물이 제멋대로 어우러지고 휘감아 마치 팀 버튼 영화 속 환상의 숲길 같다. 사철 푸른 생명의 숲은 그 길을 통과하는 자에게 보다 천천히, 보다 여유롭게 살아가라며 지친 어깨를 두드려준다. 인간 세상의 더러움이 네 본성마저 더럽힐 수는 없다며 눈물겨운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 단순한 초록의 길을 걷는 동안 화려함을 그리워할 사람은 없다. 단지 이 길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만을 무맥하게 기원할 뿐이다.
오설록 티 뮤지엄에서 녹차 아이스크림을 음미하며 잠시 숨을 고르고 나면 다시 무릉 곶자왈이 이어진다. 행복한 후반전이다. 조금은 넓어진 그 숲길이 끝나갈 때 즈음이면 우리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춘다. 이 행복한 초록의 위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제주올레를 처음 걷는다면 이 14-1코스가 다소 심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제주올레를 모두 걸은 사람이라면 이 단순한 초록의 14-1코스에서 담백한 위안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img3][제민일보] 2010년 7월 31일
그거 제민일보로 보내려다가 참았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