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에서 올레로 섬에서 섬으로
제주올레 18-1코스 추자도 올레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거의 50일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김진석을 보자 어쩔 수 없이 웃음부터 터져나왔다. 그 이전에도 결코 뚱뚱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몸매였다. 차라리 건장하다는 표현이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생 장 피에 드 포르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은 다음 스페인을 횡단하여 대서양과 맞닿아 있는 땅끝마을 피니스테레까지 이르는 장장 800Km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고 돌아온 그는 삐쩍 말라 있었다. 본인 말로는 10Kg 가까이 살이 빠졌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완전히 딴 사람이다.
되짚어볼수록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튀어온 인연이다. 김진석은 사진기자 출신이다. [오마이뉴스]와 [여의도통신] 시절, 그가 주로 찍어온 사진은 정치부나 사회부 혹은 체육부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대개 죽치고 앉아서 셔터 타임을 기다리거나, 아스팔트 위를 누비며 카메라를 휘두르는 식이다. 그런 그가 나 때문에 제주올레를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제주올레를 걷던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너무 힘들어 당장이라도 카메라를 집어던지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이 ‘운동부족’의 사진작가에게 ‘걷는 맛’을 일깨워준 것이 바로 제주올레다. 제주올레를 서너 코스 쯤 끝낸 어느 날, 그가 넌지시 내게 말했다. 걷는 거 정말 좋은데요? 좀 더 멀고 긴 코스도 한번 가보고 싶어요. 그런 그에게 바람을 잔뜩 넣어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 함께 가자고 꼬드긴 인간이 바로 나다. 우리 둘은 금세 의기투합했고 함께 걷기로 굳게 약속했다. 하지만 나는 비겁하게도 그를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올봄에 절대로 집을 비울 수 없는 비상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솔직히 나는 내가 안 가면 그도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의연히 어금니를 질끈 깨물더니 저 혼자 떠나버리고 말았다. 놀랍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서명숙 이사장이 스페인의 카미노를 걸으며 제주 올레를 구상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카미노가 올레를 만든 셈이다. 여기 그 올레에서 처음으로 걷기 여행의 기쁨을 알게 된 한 사진작가가 있다. 그는 올레를 모두 걸은 다음 스페인으로 날아가 카미노를 걷는다. 참으로 흥미로운 인연의 꼬리물기가 아닌가? 김진석은 조만간 자신이 찍은 카미노의 사진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가 카미노를 걷는 동안 새롭게 생겨난 제주올레 제18-1코스를 찍기 위하여 다시 나와 함께 제주도를 찾았다.
그와 둘이서 추자도로 향하던 날은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제주항 여객선 터미널에서 핑크돌핀 호에 몸을 싣고 눈을 감은 채 전날 마신 한라산을 달랜다. 추자항에 도착하니 부슬비는 장대비로 바뀌었다. 걷는 나는 이런 날씨도 좋아한다. 하지만 사진 찍는 그는 암담할 따름이다. 추자항에 즐비한 선술집에서 아침부터 해장술이나 마시면서 하루를 보내볼까 했지만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내일은 더 많은 비가 온단다. 그렇다면 별 수 없다. 그냥 가는 거다. 빗줄기에 가려 리본도 화살표도 찾기가 힘들다. 물어물어 일단 최영장군 사당으로 무작정 올라가기 시작한다.
[img2]추자도는 제주도에서 가장 북서쪽에 위치한 섬이다. 하나의 섬이 아니라 상추자도, 하추자도, 추포, 황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군도(群島)다. 한때 전남 영암군과 완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910년부터 제주도에 편입되었고,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제 실시 이후 제주시 추자면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니까 올해인 2010년은 제주도가 추자도를 식구로 맞아들인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화장을 안한 맨얼굴일지라도 미인은 미인이다. 미인은 찰라의 눈맞춤만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각인시킨다. 추자도가 꼭 그랬다. 잠시 빗줄기가 가늘어졌을 때, 잠시 구름과 해무가 걷혀 그 본모습을 살짝 드러냈을 때, 추자도는 명성 그대로 빼어난 자태를 보여주었다. 봉글레산의 정상에서, 나바론 절벽에서, 그리고 저 유명한 추자등대에서 흘낏 훔쳐보듯 확인한 추자도의 모습은 비에 젖은 가슴마저 마른 번개를 맞이하듯 떨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추자등대의 마당에 정성스럽게 만들어놓은 추자도의 미니어처는 그 비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짜릿한 체험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었다.
움푹 패인 골짜기에 비밀스럽게 똬리를 틀고 있는 묵리 마을에 이르러 캔맥주로 목을 축인다. 김진석은 카메라에 묻은 빗방울들을 닦아내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카미노보다는 올레가 훨씬 더 아름다워요. 나 역시 노가리를 뜯으며 당연하다는듯 되받아친다. 두 말하면 잔소리지, 안 가봐도 빤해. 김진석이 큭큭 웃으며 항변 아닌 항변을 한다. 아니, 안 가보고 그런 소리 하시면 곤란하지요. 나 혼자 그 먼 길을 걷게 해놓고. 나는 뻔뻔스럽게 배낭을 메고 일어서며 말을 자른다. 자 이제 하추자도 정상까지 가보자구.
예초리 기정길은 예술이다. 제주도 본섬의 그 어떤 기정길도 여기에 비길 수 없다. 돈대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추자도는 그대로 신비의 수묵화다. 안개 속에 봉긋봉긋 솟아오른 숱한 봉우리들이 여기가 제주도의 외딴 섬임을 잊게 한다. 그것은 설악산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천상의 풍경이다. 김진석이 탄식한다. 아아 날씨가 이래서 이 모든 걸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다니. 우리 프랑스에 다녀오면 여기 한번 더 와요. 추자도를 제대로 한번 찍어보고 싶어요. 나는 그 모든 선경(仙境)들을 내 망막과 가슴에 담고 천천히 걸어내려온다. 원하는 사진을 얻지 못한 사진작가는 자꾸 뒤로 쳐진다. 나의 뒤 저 먼곳에서 울리는 그의 셔터 소리가 허랑하다.
추자도 올레의 또 다른 매력은 그것을 ‘당일치기’로 해치울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걷기 자체는 하루에 끝난다. 하지만 아침 배를 타고 들어왔다가 저녁 배로 나갈 수는 없다. 덕분에 추자항 선술집에서 한라산을 기울이다가 허름한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우리는 황혼의 선술집에서 다음 여행지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한달 반 동안의 프랑스 와인낚시기행이다. 이 글이 세상에 나올 즈음이면 우리는 론 강을 타고 올라가 부르곤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이렇게 떠돌게 될지도 모르겠다. 올레에서 올레로, 섬에서 섬으로.
[img3][제민일보] 2010년 9월 11일
여하튼 놀러가기로 결정하면 동작이 빨라진다는...ㅋ
이 글로써 올레 원고는 일단 일단락!
아마도 10월 쯤이면 서점에서 책으로 만나볼 수 있을듯...
제주올레가 모두 완성되어 완벽한 폐곡선을 이루면
책 역시 개정증보판을 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