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견디어줘서 고마워
스크린 속 나의 연인/[프라하의 봄]의 테레사
한때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을 즐겨 읽었던 적이 있다. 그의 단편들은 언제 들추어보아도 보석 같다. 그의 몇몇 작품들은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져 막막한 절망감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어떤 뜻에서 그는 나로 하여금 소설쓰기에 흥미를 잃도록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다. 마치 B. B. 킹의 연주를 직접 듣고 나서 감당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들어 연신 담배만 뻑뻑 빨아대던 한국의 숱한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처럼.
하지만 그가 쓴 장편소설들의 수준은 들쭉날쭉하다. 나는 [농담]을 여전히 그의 베스트로 꼽는다. [생은 다른 곳에]는 찬탄을 자아낼 만한 형식미를 갖췄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대중과의 접점이 가장 넓은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의 ‘부질없는 따스함’을 사랑한다. 그 이후의 작품들은 별로다. 괴팍하게 늙어가는 노인의 꼬장꼬장한 푸념 같다. [농담]은 물론 명품이지만 두 번 읽기엔 버거울 만큼 냉혹하다. 결국 내가 이따금씩 들추어보는 그의 장편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뿐이다. 이 작품을 더할 수 없이 세련된 영상에 담아낸 [프라하의 봄] 역시 내가 즐겨보는 영화다.
언젠가 나는 사비나(레나 올린)야말로 “모든 남성들이 꿈에 그리는 연인”이라고 쓴 적이 있다. 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 이즈음 들어 [프라하의 봄]을 볼 때마다 눈에 밟히는 것은 오히려 테레사(줄리엣 비노쉬)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여인,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없는 여인, 나의 바람둥이 기질에 상처 받고 악몽에 시달리는 여인, 나와 함께라면 몰락까지도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여인. 테레사에게 쿨한 사랑은 없다. 그녀는 사랑으로 나를 옭죄고, 질투로 병들며, 그렇게 한 세월을 함께 견딘다.
사비나에게 사랑은 우정의 한 형태다. 그것은 에로틱한 우정이며 삶의 비공식 부문에 속한다. 테레사에게 사랑은 우정과 공유될 수 없다. 그녀는 차라리 사비나와 우정을 나눌지언정 토마스와는 그럴 수 없다. 그녀에게 사랑은 일대일 대응이며 우정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랑은 그녀에게도 괴로움이다. 그래서 그녀는 당장에라도 깔아뭉갤듯 부릉부릉 대는 소련군 탱크의 캐터필러에 맞서 겁도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것이다. 오오 테레사, 제발 그런 식으로 네 삶을 함부로 내동댕이치지 말아줘.
[프라하의 봄]을 보며 내가 만났던 테레사들을 생각한다. 내가 받았던 따스한 온기와 내가 줬던 차가운 상처를 생각한다. 저기 도심을 가로지르는 더러운 흙탕물 속에 둥둥 떠내려가는 공원 벤치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테레사가 있다. “이곳은 너무 더러워요, 우리 시골로 떠나요.” 나는 영화 속으로 걸어들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고 싶다. 죽기 직전의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요?” 토마스(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대답한다. “나는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 테레사,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믿어줘. 네가 질투와 속박으로 나를 나락까지 끌어내렸다는 자책감 같은 건 떨쳐버려. 이 비루한 삶을 나와 함께 견디어줘서 고마워.
[한겨레] 2005년 2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