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처럼 살다간 반항아
[폭풍 속으로]의 보디사트바(패트릭 스웨이지)
대학 미식축구 선수 출신인 신참 FBI요원 조니(키아누 리브스)는 은행을 털며 서핑을 즐기는 은행 강도단을 체포하기 위해 해변에 투입된다. 그곳에서 처음 접한 서퍼들의 세계는 뜻밖에 매혹적이다. 서퍼들의 리더 보디(패트릭 스웨이지)는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갖춘 캐릭터로 조니의 영혼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무라카미 류는 위대한 (문학)작품과 싸구려를 구분짓는 기준이 ‘생명력과 시스템의 싸움’을 다루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못말리는 아드레날린 중독증 환자들을 그린 영화 [폭풍 속으로](캐서린 비겔로우)만큼 위대한 작품도 없다.
보디는 통제할 수 없는 생명력의 화신이다. 은행 강도단의 리더이기도 한 그는 좁혀오는 수사망 때문에 동료들이 불안해하자 특유의 궤변으로 좌중을 압도한다. “우리는 돈 때문에 은행을 터는 게 아니야. 이건 시스템과의 싸움이라구. 이 X같은 자본주의사회에도 시스템을 비웃고 파괴하려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줘야 해!” 보디는 조니를 데리고 밤바다로 나간다. 조니가 아무 것도 안보인다며 꽁무니를 빼자 보디는 일축한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올라타는 게 아니야. 마음으로 하는 거야. 마음으로 느껴봐, 그리고는 파도와 하나가 되는 거야.”
보디의 풀네임은 보디사트바. ‘보살’이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의 영어식 표기다. 그러나 보디는 보살보다 미륵에 가깝고, 미륵보다 파계승에 가깝다. 한껏 이쁘게 봐줘야 ‘구도자’ 정도이니 차라리 ‘산야신(구도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의 영어식 표현)’이라는 이름을 붙여줬으면 더 어울렸을 것 같다. 그러나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자신만의 방식에 따라 살면서 시시각각 아드레날린의 삼매경에 빠져드는 그 모습은 아름답다. 그에게는 환각파티나 프리섹스, 서핑과 스카이다이빙이 서로 다르지 않다. 해변에서의 미식축구와 은행 강도질 역시 즐거운 놀이일 뿐이다. [폭풍 속으로]는 그러므로 위험한 영화다. 관객은 조니와 함께 새로운 ‘감각의 제국’에 들어서면서 보디에게 천천히 ‘전염’된다. 그리고 끝내는 한때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FBI뱃지를 가슴에서 뜯어내 내동댕이치고는, 대신 그곳에 시스템 밖의 삶에 대한 동경을 화인(火印)처럼 아로새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인간군상들 틈에서 아웅다웅 살다가 불현듯 보디 같은 캐릭터와 마주칠 때가 있다. 지레 겁먹고 피해간다면 당신의 삶은 지리한 쳇바퀴돌리기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등산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숱한 보디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배웠다. 그들 중 여럿은 영화 속 보디보다 훨씬 극단적인 방법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죽음도 삶의 한 방식일 뿐이다. 나는 “인간의 나약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50년만에 찾아온” 벨스비치의 해일 같은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보디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것도 괜찮겠군.
[동아일보] 2001년 3월 23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만큼 보디의 캐릭터는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처음엔 아니라도 나중은 그렇다.
그가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누구도 그가 살았을까? 죽었을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기다렸던 파도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닌 삶의 빛이기 때문이다. 아.. 심장이 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