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푼수
[형사 매드독]의 웨인
[파이란]의 ‘강재’가 인상적인 것은 최민식 때문이다. 만약 최민식이 [쉬리]의 ‘박무영’ 역할을 맡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파이란]을 보는 재미는 훨씬 덜 했을지 모른다. 극단적인 캐릭터들 사이를 오가면서 놀라운 변신을 거듭하는 배우들을 보면 저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가 아닐까 하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엉뚱한 상상을 해보자. 만약 로버트 드 니로가 [파이란]의 강재 역을 맡았다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 찍어놓고 보면 결론은 “그레이트(Great)!”가 될 것이다.
이 생뚱맞은 가설을 증명하는 영화가 바로 [형사 매드독]이다. 냉혹하고 강인한 남성캐릭터는 로버트 드 니로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런데 이 위대한 배우는 이따금씩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지배적 이미지를 배반하고는 아예 정반대편으로 나있는 볼품없는 오솔길을 유유자적 소요한다. 이를테면 [재키 브라운]의 ‘루이스’ 역이 그렇다. 모자라는 머리에 비루함과 난폭함을 고루 갖춘 루이스 역을 능청스럽게 해내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래도 어디까지나 조연일 뿐이다. [형사 매드독]의 주연은 로버트 드 니로다. 그는 이 영화에서 ‘완전히 스타일 구기고 망가지는’, ‘웨인’이라는 캐릭터를 맡아 전혀 새로운 연기를 보여준다.
시카고경찰청 소속의 형사 웨인은 별명이 매드독, 우리말로는 ‘미친 개’다. 얼마나 터프한 녀석이면 이런 별명이 붙여졌을까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 고교시절 우리 학교에는 ‘자이언트’라는 별명을 가진 국어선생님이 계셨다. 150cm를 조금 넘는 키에다가 극히 왜소한 체구를 가진 분이셨는데 성격마저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걸핏하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하소연을 늘어놓곤 했다. 이를 테면 반어법적 별명이었던 셈이다. 웨인이 동료형사들 사이에서 ‘매드독’이라 불렸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무장강도와 마주친 웨인을 보라. 외모는 나름대로 터프하여 한가닥하게 생긴 주제에 권총을 꺼내어 마주 겨누긴커녕 이빨이 서로 부딪히도록 발발 떨기만 한다. 이 한심한 형사에게 어느날 뜻밖의 선물이 주어진다. 본의 아니게 마피아 두목의 생명을 구해준 덕분에 그로부터 어여쁜 아가씨인 글로리(우마 서먼)를 일주일 간 대여(?)받게 된 것이다. [형사 매드독]은 이 어눌하고 소심한 겁쟁이형사 웨인이 ‘감히’ 마피아의 여인에게 빠져들고 결국 그녀의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을 따뜻한 코믹터치로 묘사한다.
사랑은 구름 위를 걷게 한다. 글로리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눈 직후의 웨인을 보라. 평소에는 시체를 보면 구토부터 해대던 그가 이제는 피범벅의 살인현장마저도 즐겁다. 저 녀석이 미쳤나, 하는 동료형사들의 시선도 아랑곳 않은 채, 비닐장갑을 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시체를 깡총 뛰어넘어 주크박스의 음악을 틀고, 되지도 않는 스텝으로 해괴한 춤을 추며 그저 싱글벙글 좋아 죽는다. 나는 이 장면에서 완전히 뒤집어졌다. 단언컨데 로버트 드 니로가 이보다 더 푼수짓을 하며 관객을 웃길 수는 없다. 그가 삼류 양아치이건 겁쟁이 형사이건 상관없다. 사랑으로 변해가는 캐릭터들은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혼신의 노력으로 그런 캐릭터들을 연기해낸 모든 위대한 배우들에게 축복 있으라.
[동아일보] 2001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