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6-01-09 11:32:43 IP ADRESS: *.16.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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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버린 여자

  시드니 폴락의 [추억]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커플들이 있다. 가령 사회변혁에 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운동권의 열혈 여전사와 정치에 대하여 냉소적일뿐더러 플레이보이 기질이 다분한 소설가 지망생. 더 나아가 여자는 가난한 고학생인데다가 외모마저 보잘 것 없는 반면 남자는 부르조아 계급 출신의 화려한 꽃미남이라면 사태는 절망적이다. 시드니 폴락의 ‘추억(The Way We Were, 1973)은 이 양극단의 두 캐릭터가 오랜 세월을 두고 변주하는 사랑의 역사를 품위 있게 그려낸 영화다.


   케이티(바브라 스트라이전드)와 허벨(로버트 레드포드)이 함께 보낸 첫날밤은 인상적이다. 대학 졸업 이후 술집에서 우연히 재회한 그들은 전쟁의 광기를 핑계삼아 침대로 직행한다. 학창시절부터 먼발치에서 짝사랑해온 남자를 품에 안은 케이티에게는 황홀한 순간이었겠지만 정작 술에 취한 허벨은 정사 도중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곯아떨어지고 만다. 짝사랑의 비참함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이다. 이튿날 아침, 자신의 와이셔츠를 다리고 있는 케이티를 보고서 간밤의 사태를 깨달은 허벨의 표정은 또 얼마나 황망했던지.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언제나 일방통행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뒤늦게나마 케이티의 진가를 발견한 허벨의 열렬한 구애 끝에 결국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한다.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천만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결혼 이후 그들이 펼쳐보이는 애증의 전면전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삶의 태도나 성격적 차이 혹은 정치적 견해의 충돌 따위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의 장밋빛 프로파갠다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케이티와 허벨은 정말 서로를 사랑했을까? 의심의 여지가 없이 그렇다. 하지만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과 함께 잘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들은 서로에게 쓰라린 결별을 고한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추억 속에서만 아름답다. 함께 있을 때면 불꽃 튀듯 격돌하며 서로의 가슴에 손톱자욱을 내다가 뒤돌아서서 추억에 잠길 때면 허허로운 그리움의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사회변혁운동이 시대정신처럼 받아들여지던 1980년대에 자신의 청춘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케이티라는 캐릭터가 낯설지 않다. 당시 우리는 모두 케이티였고 우리의 애인들 역시 케이티였다. 하지만 2000년대의 나는 허벨에 가깝다. 소설을 쓰다가 시나리오작가로 변신했고 정치를 혐오한다는 점까지 빼다닮았다. 한 인물 속에 양극단의 두 캐릭터가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과연 1980년대의 나는 2000년대의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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