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회적 사랑의 원자적 익명성
애드리안 라인의 [나인하프위크]
언젠가 웬 대학교수니 평론가니 하는 "가방끈 긴" 인간들과 술을 마시다가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언성을 높인 적이 있다. 그들이 보기엔 형편없는 싸구려 영화를 내가 적극 옹호한 탓이다. 이런 종류의 논쟁은 사실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서로가 상대방을 설득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여하튼 그들이 뭐라해도 나는 애드리안 라인의 '나인하프위크(9 1/2 Weeks, 1986)'를 좋아한다. 적어도 일년에 한번쯤은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며 이 세련되고 외로운 사랑이야기의 영상과 음악을 즐긴다.
'나인하프위크'는 전형적인 뉴욕 여피들의 사랑이야기다. 두 남녀의 직업조차 대단히 '뉴욕적'이어서 존(미키 루크)은 월스트리트의 주식브로커이고 엘리자베스(킴 베이싱어)는 소호의 큐레이터다. 엘리자베스는 존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든다. 하긴 존처럼 부와 미모(!)를 갖췄을 뿐 아니라 허공에나 속할듯한 신비한 미소를 지어보일 줄 아는 남자에게 빠져들지 않을 여인이 있을까? 그런데 이 남자의 사랑법은 조금 독특하다. 은근히 강간할 의도를 내비치는가 하면 마루 위를 기어가라면서 채찍을 휘두르기로 하고 눈을 가린 다음 엉뚱한 음식을 입 안에다가 처넣는 식이다. 이 매혹적인 소프트 SM(사도-마조)적 사랑놀음은 정확히 9주 반만에 파경에 이른다.
이 영화는 영상과 음악 그리고 편집에서 모두 당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준다. 미키 루크와 킴 베이싱어 역시 자신들의 매력을 백퍼센트 드러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내 마음을 끄는 것은 그 도회적 감수성이다. 존은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은 물론 상대방의 과거나 개인사 따위엔 눈꼽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풍기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사실 여기에서 나온다. 그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이 구질구질한 현실세계와는 전혀 무관해보이는 인물인 것이다.
이 원자적 익명성이야말로 도회적 사랑의 핵심이다. 엘리자베스가 더 이상은 이 비현실적인 무중력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파경을 선언하자 존은 뒤늦게 고백을 시작한다. "나는 시카고의 빈민가에서 자라난 5형제의 막내야. 아버진 주물공장의 노동자였고 엄마는 식료품가게의 점원이었지…." 이 빤한 대사들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친다. 도회적 사랑은 외롭다. 우리는 모두 유명 브랜드로 치장하는 대신 자신의 본모습은 꼭꼭 감춘 채 석 달도 못 버틸 사랑을 찾아 도시의 밤거리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2002년 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