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헥토르 바벤코 [거미여인의 키스](1985)
남미의 한 독재 국가의 교도소 감방에 두 남자가 갇혀 있다. 루이스(윌리엄 허트)는 미성년자 약취혐의로 구속된 파렴치범이고, 발렌틴(라울 줄리아)은 반체제 운동으로 구속된 양심범이다. 닮은 데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을 만큼 대척적인 이 두 캐릭터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숨겨진 실상을 알고 보면 더욱 절망적이다. 루이스는 발렌틴으로부터 반체제 조직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투입된 교도소의 첩자다. 게다가 루이스는 게이인데, 발렌틴은 동성애자들을 혐오한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사랑이다.
헥토르 바벤코감독의 [거미 여인의 키스](Kiss of the Spider-woman, 1985)는 이 두 재소자들의 사랑 이야기다. 각자의 사랑이야기냐고? 아니다. 이 두 남자는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각자의 마음과 몸을 열고 서로를 절망적으로 사랑한다. 그렇다면 게이영화? 맞다. 내가 아는 한 [거미여인의 키스]야말로 가장 대중적 호소력이 강한 게이영화다. 얼마나 가슴 아프고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지 제 아무리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옭아맨 이성애자들도 어느 순간 무장해제되어 속절없이 빨려들고 만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이 그들이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액자영화다.
루이스가 할리우드식 ‘싸구려 멜로영화’를 제멋대로 지어내면, 그것을 듣는 발렌틴 역시 제멋대로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 때 가슴 아픈 것은 발렌틴의 상상 속에 나오는 여배우(소니아 브래거)의 존재다. 루이스가 어떤 영화를 이야기해도 발렌틴은 항상 자기 애인의 모습만을 떠올린다. 그 여인은 결국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거미여인으로 변신하여 발렌틴에게 키스를 한다. 거미여인의 키스란 곧 죽음이다.
그렇다면 루이스의 거미여인은? 다름 아닌 발렌틴이다. 루이스는 발렌틴과 영혼의 키스를 나눈 대가로 반체제 조직으로부터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죽음의 순간 루이스가 지어보인 희미한 미소다. 그는 행복하게 죽어갔을까? 그런 것 같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던 그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을 대등한 인간으로 대해주고 그 영혼까지 사랑해준 사람에게 보내는 행복한 답신이 루이스의 미소였다. 여기서 그 대상이 동성이냐 이성이냐를 따지는 것은 어린애 같은 짓이다. 그렇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때론 너무 혹독한 대가를 요구해와서 탈이긴 하지만.
[동아일보] 2004년 4월 9일
동성애 보다는 감옥이란 공간을 보는 것 자체가 암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