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현실을 위무한다
우디 앨런 [애니 홀](1977)
지식인의 사랑놀음을 가장 적나라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해낼 줄 아는 작가 겸 감독이 우디 앨런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을 그렇게 희화화할 줄 안다는 점에서 그는 뛰어난 예술가다. 우디 앨런의 작품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애니 홀](Annie Hall, 1977년)이다. 그가 남우주연상까지 탔더라면 아카데미 사상 세번째의 ‘빅5’(작품·감독·각본·남우주연·여우주연상)수상작으로 기록됐을 걸작이다.
영화는 주인공 앨비(우디 앨런)가 애니(다이앤 키튼)와의 만남과 사랑, 실연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과정에 담뿍 담긴 아이러니와 페이소스가 보는 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우디 앨런의 분신처럼 보이는 앨비는 섬세하되 소심한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는 별것도 아닌 일에 신경질을 내고 과대망상에 시달리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생떼 쓰기로 사랑을 망친다. 이 영화는 개봉 직전까지 ‘안도헤니아(Andohenia)’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행복 불감증을 뜻하는 정신의학용어다. 자고로 자의식 과잉인 자가 행복을 맛보는 경우란 없다. 차라리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를 줄 아는 자가 사랑에 훨씬 가까이 다가서는 법이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애니가 앨비의 청혼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바로 그 직후 앨비 최초의 희곡에 인용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연극의 내용이 현실의 그것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즉 현실에서 겪은 사랑의 좌절이 예술 속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변주된다. 예술은 거짓말이다? 예술가의 창작 의욕을 자극하는 것은 사랑이다? 예술은 현실을 위무한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매혹적인 텍스트다.
해피엔딩의 반대말은 ‘비터스윗(bittersweet)’엔딩이다. 나는 [애니 홀]처럼 ‘쓰라리되 달콤하게’ 끝나는 사랑영화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된다면 당신도 나처럼 ‘재수없는 지식인’일 가능성이 많다.
[동아일보] 2002년 3월 12일
앨비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사랑과 아픔이 내것처럼 전율되어 왔다..
사랑은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잘나도 별 수 없는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