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이 꽂히는 순간들
제리 리스 [결혼하는 남자](1991)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빨리 맞는 게 낫다. 모두 다 결혼과 관련된 조크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들 중 결혼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도 따로 없을 것이다. 덕분에 결혼과 관련된 조크들은 나날이 버전업 되어간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빨리 맞으라고?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그 매는 죽을 때까지 맞아야 된다. 그러니 하루라도 늦게 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나?
제리 리스의 [결혼하는 남자](The Marrying Man, 1991)는 결혼과 관련된 조크들 중에서도 최상급이다.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뜻이 아니다. 너무도 가벼워 마치 거위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다닌다. 치약 재벌의 상속자이자 젊은 플레이보이인 찰리(알렉 볼드윈)는 이 영화 속에서 무려 세 번을 결혼하고도 모자라 네 번째 결혼을 꿈꾼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실제로 일곱 번씩이나 결혼했는데 그게 무슨 대수냐고?
찰리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의 싸구려 가수인 비키(킴 베이싱어)라는 여자하고만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한 다음 또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결혼하다’라는 동사(marry)에 현재진행형(ing)이 붙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도무지 가벼운 웃음 따윈 용납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쥐약’이다. 결혼이나 사랑에 관련된 심오한 통찰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쓰레기다. 실제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국내외에서 모두 경멸적인 혹평을 받았다. 꼬투리를 잡으려면 한이 없다. 지나치게 희화화된 캐릭터, 개연성 없는 상황, 견강부회식의 끝없는 도돌이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하는 남자’는 즐길 만한 영화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사랑에 빠지는 그 달콤한 마술의 순간을 익살맞게 클로즈업한다. 옛날말로 ‘뿅 가는’ 순간, 요즘말로 ‘필이 꽂히는’ 순간을 네 번씩이나 음미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일찍이 1970년대 이후 브로드웨이를 평정해온 코미디의 황제 닐 사이먼이 썼다. 덕분에 특유의 감칠 맛 나는 대사들이 시종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연인 혹은 부부가 러브체어에 나란히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낄낄대며 보기엔 그만이다. 할리우드에서도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두 남녀는 이 영화의 촬영 도중 실제로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했다. 덕분에 ‘사랑에 눈이 먼’ 그들의 연기는 연기 이상이다. 가만 있자, 그러면 도대체 볼드윈은 베이싱어와 몇 번을 결혼한 거야?
[동아일보] 2002년 5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