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8000미터를 넘어서는 죽음의 지대에 장갑마저 벗겨 진 상태의 시신 한구가 들짐승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시신이 누워 있는 곳은 힐러리스텝(정상 직전의 50미터 정도 되는 수직의 암벽)부근으로 초모랑마를 등정하려는 산악인들이 오가는 길에 마주치게 될 정도로 지척인 곳이다. 그의 이름은 박무택, 한국 산악계의 차세대 주자로 평가받던 사내였다. 당시 박무택과 더불어 초모랑마를 등정하던 2명의 산사나이들이 사라졌다. 이들은 서로를 구하기 위해 분투하다가 시신으로 발견되었거나 흔적없이 사라져간 것이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났다. 이들과 함께 산을 오르던 사람들 사이에 그들을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 중심에 엄홍길이 있었다. 여기에 신문사의 기자들과 TV 방송팀이 가세했다. 언론의 집중된 보도로 이제 유족들과의 약속은 국민들과의 약속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엄홍길 자신의 약속이었다. 가장 사랑했던 후배를 그 삭막한 곳에서 데려와 비록 시신이지만 가족의 품안에 안겨주겠다는......... 그리하여 결성된 원정대. 이름하여 휴먼 원정대가 만들어졌다.
원정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를 가졌던 셈이다. 산소가 평지의 삼분의 일에 불과한 죽음의 지대에 서 시신 구조작업이라니. 자신의 한 몸도 간수하기 어려운 고도에서 몇 시간이 될지도 모르는 작업을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이런 일은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해야 했다. 약속이기에.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약속. 엄홍길은 히말라야 8000미터급 고봉 14개를 아시아 최초로 오른 한국 산악계의 기린아다. 그 죽음의 여정에서 엄홍길과 박무택은 4번이나 자일을 묶었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이들의 우정은 이처럼 한쪽이 죽어서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사람들은 왜 산으로 가고 산에서 죽어 가는가. 따뜻한 집과 소중한 가족들의 품을 떠나서 황량한 벌판과 눈폭풍이는 거친 그 곳으로. 히말라야 등정과 같은 죽음을 담보로 하는 산행은 알피니즘의 실현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향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속세의 삶과 긴장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다. 흰 산을 향한 열망과 자신의 모태인 가족과의 사이에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다리가 놓이는 셈이다. 어찌할 것인가. 삶은 자신만의 것인가. 책에는 망자들을 향한 가족과 살아남은 친구들의 눈물이 시종일관 베어 있다. 그 눈물을 뒤로 하고 원정대는 한 발짝식 나아간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당초 목표한대로 시신들을 찾아 가족들의 품에 인계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그토록 서 있고 싶어하던 자리에 케른을 쌓아 장사지내는 것으로 임무를 완수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가고 원정대는 돌아와 이런 기록을 남겼다. 도전속에서 죽어간 자들과 그 유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이 감동을 받는 것이 아이러니컬하기는 하지만 삶은 그런 것인가. 슬픔을 팔아 기쁨을 사듯이.
아무리 휴먼원정대이지만 100일간이나 지속된 힘들고 모진 원정에서 어찌 반목과 갈등이 없었으랴.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시종일관 연대감과 의무감 그리고 인간애에 충실한 원정대의 일정을 따라간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도 공해의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 마치 한편의 잘 짜여진 스토리의 영화를 본 듯 하다. 박인식 정광식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산악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저자의 남성적이고 시원스런 문장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악인들의 남다른 우정과 희생적인 삶이 이 각박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던져준 빛나는 그 무엇 때문일 것이다. 엄홍길이 서문에서 말한 바 '이 무한경쟁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엔가 잊어버리게 된 소중한 것들. 인간애 우정 의리 약속 희생과 같이 너무도 오랬동안 들어본 적이 없어 생뚱맞은 느낌마저 주는 빛바랜 단어들'을 이 책에서 넉넉히 확인할 수 있다.
알라딘 독자서평/이끼낀 바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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