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우수(雨水)였다. 우수답게 봄비가 내린 덕에 수락산 청학골에 계곡 물소리가 우렁찼다. 겨울 내내 막혀있던 귀가 뻥 뚫리는 듯했고 덩달아 가슴도 크게 열렸다. 몇 단으로 이루어진 폭포들을 거슬러 오르며 풍광이 좋은 곳마다 주저앉아 낮술을 기울였다. 오후로 접어들어 빗방울이 듣기 시작할 무렵 산을 빠져나와 중국요리를 먹으러 갔다.
위의 세 번째 사진 속 <玉流洞>이라는 바위글씨(암각문)에 주목. 저것은 원래의 바위글씨가 아니다.
<옥류동> 암각문의 유래에 대해서는 내가 아마도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저 글씨는 지촌 이희조(1655-1724)가 일찍이 우암 송시열(1607-1689)에게서 받아 간직하고 있다가, 우암이 사망한 후 1704년에 새긴 것이고, 그 상세한 내역을 1709년에 글로 남겨놓았다. 이 기록은 소수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제법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의 암각문은 어디에 새겨져 있는지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2019년 5월 28일 우리 화산회가 산행도중 처음으로 발견하였다(이 내용은 나의 졸저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2019)에도 일부 기재되어 있다). 그 이후 나는 당시의 정재숙 문화재청장과 독대하여 이 암각문을 한시 바삐 문화재로 등재해달라고 부탁한 바 있다.
그런데 오늘 찾아가 보니 본래의 송시열 필체는 지워졌고, 그 위에 누군가의 필체로 새로운 글씨가 덧씌워져 있다(아마도 그라인더로 갈아 새긴 듯). 이런 것을 문화재 복원이라고 해야 되나, 문화재 파괴라고 해야 되나? 나는 물론 우암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래의 글씨는 우암이 쓴 것이고, 그것을 저 바위에 새긴 이는 지촌이다. 호오나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팩트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은 외면한 채 그냥 새로운 글씨를 새겨넣는 것이 과연 올바른 문화재 정책이고 문화행정인가?
작년 수락산 갈 때면 정비를 많이 해서 어수선 했었는데, 이제 도로와 폭포 주변 계단은 정리가 되어가는 듯 하네요. 청량하게 흐르는 폭포 가에 남은 얼음은 조금 더 머물고 가겠다는 겨울손님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무성한 잎에 가려있던 '옥류동' 바위글씨를 발견했던 날 화산회 산행의 기쁨이 다시 생각나네요. ^^ 심샘께서 쏘신 중국요리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위의 세 번째 사진 속 <玉流洞>이라는 바위글씨(암각문)에 주목. 저것은 원래의 바위글씨가 아니다.
<옥류동> 암각문의 유래에 대해서는 내가 아마도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저 글씨는 지촌 이희조(1655-1724)가 일찍이 우암 송시열(1607-1689)에게서 받아 간직하고 있다가, 우암이 사망한 후 1704년에 새긴 것이고, 그 상세한 내역을 1709년에 글로 남겨놓았다. 이 기록은 소수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제법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의 암각문은 어디에 새겨져 있는지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2019년 5월 28일 우리 화산회가 산행도중 처음으로 발견하였다(이 내용은 나의 졸저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2019)에도 일부 기재되어 있다). 그 이후 나는 당시의 정재숙 문화재청장과 독대하여 이 암각문을 한시 바삐 문화재로 등재해달라고 부탁한 바 있다.
그런데 오늘 찾아가 보니 본래의 송시열 필체는 지워졌고, 그 위에 누군가의 필체로 새로운 글씨가 덧씌워져 있다(아마도 그라인더로 갈아 새긴 듯). 이런 것을 문화재 복원이라고 해야 되나, 문화재 파괴라고 해야 되나? 나는 물론 우암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래의 글씨는 우암이 쓴 것이고, 그것을 저 바위에 새긴 이는 지촌이다. 호오나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팩트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은 외면한 채 그냥 새로운 글씨를 새겨넣는 것이 과연 올바른 문화재 정책이고 문화행정인가?
우리 화산회가 처음 발견했을 때의 글씨 사진을 아래에 첨부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