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명시인의 참회
I
지금은 저 멀리 팔당공원묘지의 썰렁한 산기슭에 홀로 누워 몹시도 따분해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광석이형이 펄펄 살아 그 화등잔만한 두 눈을 크게 뜨고 이 판 저 판을 휘젓고 다닐 때의 일이다. 형이 확대개편 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초대총무를 맡아 사무실에서 대장노릇을 하고 있을 무렵, 이런 저런 악연으로 하여 만만한 똘마니역(!)을 배당 받은 나는 이틀이 멀다하고 그곳으로 불려나가 별별 시시콜콜한 허드렛일로 어영부영 하루해를 보내버리곤 했었다. 즐겁고 유쾌한 일도 많았지만 짜증나고 부아가 끓어오르는 일도 많았음은 물론이다. 형은 예의 그 괄괄한 성격과 걸쭉한 입심으로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만드는가 하면 때론 남의 복장을 박박 긁어놓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툭 던져놓곤 했다. 그런데 내 복장이 긁히는 경우란 저 유명한 형의 욕설이 튀어나올 때도, 물건이 날아다니거나 술잔이 깨져나갈 때도 아니었다. 그것은 형이 나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방식이었다. 형은 하루에도 수 십 명씩 사무실을 찾아들던 왼갖 글쟁이, 싸움쟁이들을 맞을 때마다 저 만치 한 쪽 구석에서 무엇인가 붙들고 앉아 낑낑거리고 있는 나를 가리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쟤가 우리 장르철폐위원장이야.
형의 그 진담 반, 농담 반의 장난끼 서린 목소리에 실려있었을 뿐, 그것은 비아냥도 욕설도 아닌 선의의 소갯말이었을 따름이다. 또 형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전혀 근거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시건 소설이건 평론이건 성명서건 그 무엇이건 간에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써갈겨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소리만 들으면 불끈불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러한 심정을 바깥으로 내비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는 희곡이나 팜플렛에도 손을 대볼 생각이노라고 넉살좋게 되받아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받아 친다고 해서 한 번 긁힌 복장이 쉬이 원상태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도 물론이다.
처녀시집을 내겠답시고 여기 저기 흩어졌던 시들을 꾸려보고 있자니 문득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 시절이 떠오를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느낌마저도 생생히 되살아온다. 그 때 나는 왜 그렇게 그 말을 불쾌하게 받아들였던 것일까? 세상 모든 것에 대해 까닭 모를 적개심만 품고 있던 한 청년의 지향 없는 반항심에서였을까?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는데 넉살 좋게 농담이나 던지고 앉았는 광석이형에 대한 불만의 표출에서였을까?
이제 와서야 곰곰이 돌이켜보건데 그것은 아마도 자괴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자괴감은 그러나 여러 장르에 손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장르에서도 제대로 된 글 한 편 써내지 못했기 때문에 연유된 것인 듯 하다. 명색이 글쟁이인데도 이렇다할 글 한 편 써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 이것만큼 처연한 자괴감, 참담한 열패감을 안겨주는 일이 또 있을까? 어떤 장르에서건 제대로 된 글 한 편 생산해내지 못한 주제에 찝쩍거렸던 장르들만 뒷수습 못한 여자들 마냥 주렁주렁 달고 있었으니 이것처럼 낯뜨거운 난봉질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때는 그래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부아가 치민 냉가슴만을 부글부글 끓였었다면, 이제 이렇게 시집을 내놓게 된 지금은 무언가 가슴 뿌듯한 성취욕쯤 느껴볼 만도 한데, 봅세, 나도 시인입네하고 낯간지러운 허장성세를 부려볼 만도 한데, 슬프게도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내 심정이다. 내가 써왔던 시의 분량이 이것밖엔 안되던가? 내가 써왔던 시의 내용이 요런 것밖엔 안되던가? 그러면 그동안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살아온 것일까? 이러고도 나는 시인입네 하고 ‘행세’할 수가 있을까? 아니, 아니, 시인이 아니어도 좋다,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지난 날 나를 괴롭혔던 그 고질적인 자괴감이 이제는, 마치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딸의 흡연현장을 맞닥뜨려버린 어미의 심정과도 같이, 선연하게, 더는 부인할 수 없게, “꼼짝마라!” 벽력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나를 옭죄어 온다. 옭죄고 짓누른다. 남일이형이 최근에 와서야 심하게 앓았노라고 실토한 바 있는 저 ‘채광석증후군’으로부터 나는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강행하기로 했다. 옛글을 되읽는 순간순간마다 ‘없었던 일’로 치환시켜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시달렸지만, 이건 내가 아니다 이건 내 시가 아니다 첫 닭이 울기 전 세 번 아니라 삼십 번도 더 부인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나였고 그 시는 나의 시였다. 그래서 강행하기로 했다. 다른 길이 없었다. 길은 외길뿐이다. 정면돌파를 해버리지 않는 한, 그래, 네가 내 새끼다, 친자확인을 해버리지 않는 한, 사랑을 나누듯 몸을 섞고 고스란히 함께 썩어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 한, 이 너저분한 시편들은 언제까지나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힐 것이다.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업보이자 새로운 인연의 씨앗이다. 이 시집은 내게 있어서 한 시대의 매듭이자 새로운 시대의 실마리이다.
II
따지고 보면 이 시집에 실려있는 시들의 대부분이 너나없이 모두 참담한 몰골을 하고 있다는 것만큼 당연한 현상도 없다. 이 시편들의 모태인 나의 삶 자체가 그러한 꼬락서니로 헐레벌떡 달려 오늘에 이르른 것이 아닌가? 건강한 지향을 잃은 소시민적 삶을 살며 올곧고 아름다운 시를 쓸 수는 없다. 설혹 얼굴을 가린 채 후렴처럼 시를 읊어대도 그 시는 현실의 냉정한 무게를 견디어내지 못한다. 그만큼 아름다움의 질서는 엄혹한 것이다. 더구나 시를 만나고 그것과 함께 뒹굴어온 개인사가 결코 아름답지 못했던 다음에야.
1
쁘띠부르조아계급출신의 감수성 예민한 소년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도 중고교시절의 한 동안을 시에 빠져서 살았다. 정현종, 황동규, 강은교, 오규원, 신대철, 김영태, 마종기, 김수영, 김명인, 신경림, 최하림, 고은, 최민, 정호승, 이성부, 신동엽, 김지하, 조태일, 정희성.... 숱한 시인들이 나의 감성과 사고방식을 자기 나름대로 길들여놓고 지휘하였다. 김지하나 신동엽의 참맛을 알게된 것은 대학에 진학한 후의 일이고 이 당시엔 그저 개성있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만 다가왔었다. 당시의 나를 가장 강렬히 사로잡았던 자들은 정현종이나 황동규, 강은교 등 모더니즘적 경향의 시인들이었다. [貧者日記] 앞날개에 실려있던 강은교의 사진은 액자에 갇혀진 채 시도 대도 없는 나의 입맞춤에 시달려야 했으며 [苦痛의 祝祭]의 겉표지는 재수 없게도 광신도에게 팔려나간 성경책의 표지처럼 너덜너덜 허물어져야 했다. 특히 [苦痛의 祝祭]에 대한 나의 ‘도취’는 대단한 것이어서 그 책에 실린 모든 시들을 쉼표 하나, 행바꿈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고 정확히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 뜻에서 정현종은 내게 시의 세례를 뜨겁게 각인시켜준 최초의 뮤즈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 세례가 단순히 독서체험에서 그쳐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악연이었다. 어더한 유의미한 세계관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한 소년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그의 시세계는 시이기를 넘어서서, 마치 전태일의 일기가 그러하듯,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다. 다만 전태일의 일기가 끊임없이 투쟁에의 추동력을 충전시켜 준다면 그의 시는 끊임없이 도취와 순간에의 몰입을 교시한다는 것, 그리하여 결국에는 ‘행복한 무기력상태’를 창출해 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 정현종은 다시 크리슈나무르티를 소개해주고 크리슈나무르티는 다시 라즈니쉬를 끌어온다. 점입가경이다. 온갖 위악적인 난동으로 가득 채워진 고교시절, 그리고 저 막막했던 재수시절의 나의 정신적 토양은 이렇게 불모성의 종자를 키우는데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 종자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라는 볼상 사나운 꽃을 피워내기에 이른다 - 아니, 과장하진 말자, 쁘띠부르조아계급이 누리는 경제적 혜택에 기대어 이른바 ‘꿈꿀 자유’라는 것을 배급받을 수 있었던 한 소년이 자신에게 은밀히 내재되어 있던 이러한 부정적인 경향들을 정당화시키고 기정사실화 시키는 데에는 정현종과 같은 시인들의 고무, 찬양, 선동이 더 없는 아편으로 작용하였다, 는 정도로 해 두자.
이러한 류의 독서체험이 가장 악랄한 악영향은 ‘시에 의한 현실의 선험’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에서 보았던 회로에 따라 바라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바람이 분다. 그러면 나는 살고싶어 해야 한다. 왜냐하면 발레리가 그렇게 써놓았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시에 의해 각인된 이러한 선험은 그 불쌍한 독자로 하여금 현실과 맞닥뜨리지 못하게 한다. 그가 맞닥뜨리는 바람은 늘 강은교의 바람이나 정현종의 바람이나 발레리의 바람일 뿐이다. 이렇게 ‘미리 부는 바람’은 현실의 바람이 아니다. 이러한 선험에 찌들어 그것에 매몰되어 버린 자는 결과적으로 단 한 순간도 물질적인 존재인 인간으로서 살아보지 못한다. 한 마디로 그는 현실 이전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2
그러나 어느 누구의 뇌수가 현실 이전의 관념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하여 현실 그 자체가 자신의 물리적 규정력을 행사해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학의 문턱을 넘어서면서, 나를 기만하고 있던 관념적 현실은 물질적 현실에 의하여 무참히 깨져나가기 시작한다. 가까스로 진학한 대학의 교정은 몇 천 명의 시민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학살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수업도 대학신문도 써클활동도 술집도 검열과 감시와 통제의 올가미에 목을 맨 채 공포에 질린 가쁜 숨만을 톺아올릴 뿐이었다. 그랬다. 내가 맞닥뜨린 대학의 현실은 죽음이었다. 살아있음을 위장한 썩은 시체였다. 게다가 집안의 급격한 계급적 몰락이 진행되었다. 잘못 손댄 사업으로 인해 재정상태가 마이너스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회생은 영원히 불가능했으며 집안 전체의 당면관심사는 오로지 ‘연명’ 그 자체였다. 언제였던가, 몇 년이 지난 다음, 온통 흰색만으로 칠해진 밀폐된 방에서 자술서를 쓰게 되었을 때 담당취조관이 강요해대던 저 신파조의 대사 - ‘궁핍한 자신의 생활에 불만을 품고’를 만족시킬 물적 토대가 이로써 완료된 셈이다.
나는 집을 떠났다. 그리고 자취와 고학의 저 신물이 나도록 지겨운 극빈 상태가 시작되었다. 츄레닝에 물들인 군복에 쓰레빠를 질질 끌며 백양로를 헤매었다. 화물쎈타에서 구루마를 끌고 공사판에서 등짐을 졌으며 지하철역을 휩쓸어 꽁초를 긁어모았다.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소줏병을 나발불다 취기에 떨어져서는, 덜어져 코를 골다가 오한과 갈증을 못 이겨 불현듯 깨어나서는,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이것은 정현종의 취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현실의, 나의 취기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학생회관에서 거꾸로 떨어져 내리는 여자선배의 펄럭이는 옷자락을 보며,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친구의 버려진 책가방을 보며 드디어 깨달았다, 이제는 ‘꿈 꿀 권리’가 없음을, 그리고 ‘꿈 꿀 의무’도 없음을!
그러한 깨달음은 그러나 아쉬움을 남겨주기는커녕 파탄의 통쾌함과 새로이 용솟음치는 도전욕을 던져주었을 뿐이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맞닥뜨린 ‘나의 현실’을 껴안고 잠시 울었다. 그 짧았던 오열의 저켠으로 적발 당한 ‘적의 이데올로기’들이 당황해하며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 길들여졌던 뇌수조직에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현실의 불합리성이, 까뮈의 불합리성이 아닌, 내가 발 딛고 선 ‘지금, 이곳’의 불합리성이 까닭 모를 울분을 부추켜댔다. 그러나 울분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과학이 필요했다. 뇌수의 우상을 깨뜨려 부술 과학의 이성이 필요했다. 혐오와 울분, 고된 노역과 폭주, 부적응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성의 빛을 갈망하던 어느날, 육신과 정신이 모두 배고픔과 목마름에 떨던 어느날, 이영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박현채가, 전태일이, 무대리작과 프레이리가, 마르크스가 차례로 찾아와 방문을 두드렸다. 나를 흔들고 나를 깨우고 나를 때렸다. 김지하의 처연한 가락이 가슴을 후벼팠고 베트남이, 광주가 나를 죽였다. 대학이 완전히 죽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대학을 살리고 이 사회를, 부정의한 폭력만이 미쳐 날뛰는 이 사회를 살려내는 사람들이 어디엔가에 모여 있었다는 알게 된 것도 이 즈음이다.
그러나 학생운동에 관한 한, 아니 학생운동에 있어서 역시, 나는 미숙아였고 지진아였다. 인연이 없었다거나 조직이 배타적이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할 생각은 전혀 없다. 가장 일차적인 책임은 명백히 나에게 있었다. 관념적으로만 비판하고, 말로만 척결해버린, 그래서 의식의 저 밑뿌리에선 아직도 음험한 자세로 도사리고 있던 나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에 있었다. 겉보기엔 그럴싸했다. 민중을 이야기하고 혁명을 이야기했다. 겉멋 들린 운동초년생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도 스스로를 무슨 ‘주의자’로 규정하며 가슴 뿌듯해했다. 닥쳐올 고난과 맞서 싸우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은밀한 ‘고행의 쾌락‘에 용두질을 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관념은 그것이 어떤 내용의 것이든 관념일 따름이다. ’계급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아니 그런 문제엔 도통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던 관념론자가 이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당파성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는 명제를 외우고 있다고 해서,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과연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극우의 논리에 길들여 있든 극좌의 논리를 외우고 있든 그것이 체화된 실천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관념에 불과할 뿐이다.
자신의 논리를 그대로 살아내는 사람은 행복하다.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행동을 일치시킬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행복은 역사적, 사회적 성격에 의해서 다시 정당한 행복과 부당한 행복으로, 아름다운 행복과 추한 행복으로, 건강한 행복과 퇴폐적 행복으로, 전진해 가는 계급의 발전적 행복과 소멸해 가는 계급의 퇴영적 행복으로 나뉘어질 터이지만 행복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불행했다. 나는 나의 논리를 그대로 살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내가 신봉하는 이념과 그 이념이 요구하는 행동을 온전히 몸짓해내지 못하였다. 물론 많은 부분에선 해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온전히’ 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 시키는 것이다 - 바로 그 ‘온전치 못했던’ 부분이야말로 교활하게 자신을 은폐하고 있는, 그러나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실제의 내가 아니었던가? 채 다 숙정되지 않은 ‘낡은 나’의 잔재가 ‘새로운 나’의 발목을 틀어쥐고 끊임없이 도발해 오는 저 지겨운 간섭전-그 정신적 내전의 표현이 아니었던가?
그랬다. 나는 온전히 새로 태어나지는 못했다. 각목을 휘두르고 돌을 던지고 조국의 현실을 침튀기며 통탄하다가는 어두운 까페에 숨어 한숨을 내쉬며 지는 별의 미학을 논하고 시를 썼다. 추상적인 민중 일반에 대해서는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구체적인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무관심했다, 난감해했다, 짜증을 냈다. 최루탄가스가 겹겹이 배인 교정보다는 은은한 실내악이 흐르고 벽난로에 불을 지핀 레스토랑이 단연 좋았다. 와인을 곁들인 피자요리를 먹으며 최저생존비에 못 미치는 저임금에 대해 떠들어 댔다. 투박한 용모를 한 여자후배에겐 그 불성실을 꾸짖고 골 비고 예쁜 암컷들에겐 침을 흘렸다. 문화제국주의를 성토하고 난 오후, 프랑스문화원으로 아누크 에메를 만나러 갔다.....이런 따위의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었다. 그러나 ‘빚’은 채무자에 대한 독촉을 잊지 않는 법이다. 다음 순간, 자신에 대한 견딜 수 없는 혐오감과 절망감이 찾아온다. 머리를 흔들며, 쾌활함을 가장한 채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시대의 아픔을 홀로 짊어진 듯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폭주를 한다. 그러나 숙취를 채 못 떨군 다음 날 아침이면 한껏 비웃는 표정을 한 채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놈(!)의 그 뻔뻔스러운 낯짝과 마주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짭새들에게 개차반으로 터져 찢어진 눈자위를 꿰매는 일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내가 불행한 인간이었다면 그 불행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 바로 이 이성과 행동간의, 뇌수와 근육간의, 생각과 감성간의 이 불일치, 이 괴리, 이 헛돎, 아아 이 미칠 것만 같은 간극!
이러한 류의 인간에게 조직의 중요한 일을 맡길 수는 없다. 나는 조직의 중앙으로부터 ‘조직생활의 부적격자’라는 치욕적인 판정을 받고 점차 외곽으로 물러앉게 되었다. 훗날 내가 고학년이 되고 학회체계가 학생운동의 기본구조로 채택되었을 때 운동조직의 공개적인 토대구축을 위한 하청공사를 맡는 것 정도로 그 알량한 정치적 생명을 유지했을 뿐, 이러한 주변적 지위에는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학원을 떠날 때까지 뺀질뺀질한 후배이자 신뢰할 수 없는 동지, 그리고 못난 선배라는 규정을 떨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돌을 던지면서도, 규찰대의 일원으로서 철야를 하면서도, 아니 심지어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면서도, 연애라는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온전한 나’라고 믿지 못하는 상태 - 그 허공에서 공중분해 된 ‘풍문’과도 같은 상태에서 나의 대학시절은 끝나버렸다. 돌이켜보건데 그것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낡은 인간으로 남고자 했던 무의식적인 관성과 벌인 고독하고 치열했던 싸움의 기간이었다. 그 대부분이 대학시절에 쓰여졌던 나의 시 한 편 한 편에는 이러한 싸움의 내용과 형식이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의 양면에 걸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부정적인 측면과 깨끗이 결별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시의 출생에 관한 한 건강치 못한 모태였음이 분명하다.
3
나의 시를 규정하고 있는 다른 하나의, 그리고 어쩌면 가장 악랄한 부정적인 요소는 소위 ‘문학상’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대학시절 학내 문학상은 물론이고 전국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 현상공모에 수 차례 당선된 바 있는데 그러한 행위가 끼친 음성적 악영향이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였다. 홀로 시나 소설을 끄적여 대는 것은 아직 사회적 의미를 갖는 문학행위 이전의 일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작품을 만들어서 그것을 발표할 때, 그대에야 비로소 문학행위가 성립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의 문학행위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문제는 나의 문학행위의 일차적 동기가 ‘돈을 벌려는 데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 글을 썼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악적인 거짓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상금이나 원고료가 없었어도 내가 대학시절 그토록 많은 글들을 써갈길 수 있었을까 하고 되물어보면 대답은 명백히 부정적이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문학상에 응모했다. 처음 몇 번 떨어지고 나면, 그리고 당선된 다른 이의 작품을 꼼꼼히 검토해보면, 그렇다, 길은 빤하다 - ‘뽑히도록’ 쓰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쓰면 뽑히는가? 상을 주는 주체의 요구에 맞도록, 지면의 성격과 예상되는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도록, 대학생답게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추고 - 그러나 너무 강하면 뽑히지도 않을뿐더러 설혹 뽑힌다 하더라도 활자화되지 못하므로 ‘적당히’ 갖추고, 유행하는 이런 저런 유파의 기교를 뒤섞어 흉내내어 - 그러나 너무 흉내내면 특정유파의 아류로 몰리게 되므로 ‘적당히’ 흉내내어, 너무 앞서 나가지도 않고 너무 구태의연하지도 않은 내용과 형식을 이리 저리 엮어 짠 다음, 깨끗한 원고지에 예쁜 글씨로 정서해서 보내면 뽑힌다. 한 마디로 제도권 대학문단의 요구와 지향에 스스로를 꿰어 맞추면 된다. 나는 그렇게 했고 그래서 뽑혔다. 여러 번 뽑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현재의 내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는 저 ‘명망가’들의 축소복사판인 ‘대학가의 새끼명망가’가 되어갔고 그 명망은 다시 이러한 매문행각을 상습적으로 자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지면에 쉬지 않고 글을 써댔다. 그 지면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시건 소설이건 평론이건 그 뭣이건 가리지 않고 써갈겼다. 대학시절동안 이렇게 글을 팔아 벌어들인 돈은 아마도 기백만원대에 이를 것이다.
그렇게 매문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들이지 않았다면 과연 스스로의 힘으로 자취를 하고 등록금을 내며 대학을 끝마칠 수 있었을는지 의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매문은 나의 중요한 생활수단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매문으로 얼룩져버린 나의 문학행위 그 자체를 정당화시켜 버릴 수는 없다. 더구나 나의 그 ‘가난’이라는 것조차도 의심받아 마땅할 성질의 것이었다. 이 말은 가난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차비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한 날도 많았고 굶은 날도 많았다. 꽁초를 주워 피우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고 심지어 연탄이나 쌀, 책, 따위를 어쩔 수 없이 훔쳐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가난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체화되고 내면화되어 있는 가난이 아니었다. 이 점은 문학상을 수상하여 떼돈이 생겼을 때 그 돈이 어떻게 쓰여졌는가를 따져보면 분명해진다 - 단 며칠을 가지 못한다. 외상술값을 갚고, 다시 외상이 그어질 대가지 다 퍼마셔 버린다. 한껏 겉멋 들린 겨울여행을 떠난다. 세종문화회관에 가서 값비싼 공연을 보거나 호텔부페에 가서 ‘교양인답게’ 맛만 조금씩 보고 나온다.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이 걸치고 있는 누더기는 일종의 호사가취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가난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고교시절까지의 생활방식 - 쁘띠부르조아계급으로서의 생활방식이 완강한 자세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계급의 품에서 자라왔느냐 하는 객관적 규정(‘출신’)은 그가 어느 계급의 당파성에 복무하려 하느냐 하는 주체적 규정(‘성분’)이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그토록 뿌리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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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나는 나의 시를 규정짓고 있는 세 가지의 부정적 요소들 - 즉 1. 소년시절에 받은 모더니즘의 세례, 2. 결국 학생운동의 주변적 지위로의 소외를 결과해낸 이성과 행동간의, 생각과 감성간의 괴리, 3. 가난을 빙자한 무책임한 매문 행각 및 그로 인해 길들여진 기성문학과의 타협 - 의 구체적인 형성과정을 진술하였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은 저희들끼리 나름대로의 탄탄하고도 은밀한 내연의 관계를 이루어 서로를 간섭하고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나의 시라고 하여 긍정적인 요소들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스스로 부정적인 요소들이라고 규정한 것들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며 노력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부정적인 요소들이란 항상 무의식적으로, 부지불식간에 침투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쓴 모든 시에서 긍정적인 요소들이 부정적인 요소들과 벌여나간 싸움의 내용과 그 결과를 본다. 그리고 긍정적인 요소들이 우세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여기에 모았다. 그러나 우세하다는 것과 전일하다는 것은 다르다. 긍정적인 요소들로 전일하지 못하다는 것, 즉 부정적인 요소들에 의하여 침윤되어 있다는 것 - 이것이 나의 시가 갖는 한계이다. 그 한계는 그러나 열세한 한계가 아니라 전일한 한계이다. 부분적인 한계가 아니라 본질적인 한계이다.
이 한계의 중핵을 틀어쥐고 있는 것은 2.의 부정적 요소이다. 즉 앞에서 표현한대로 이성과 행동간의, 뇌수와 근육간의, 생각과 감성간의 괴리이다. 이성은 뇌수는 생각은 ‘새로운 인간’의 그것이다. 행동은 근육은 감성은 ‘낡은 인간’의 그것이다. 그 두 가지가 헛돈다. 때로는 맞물려 돌아가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이다.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 가증스러운 간극이 내 시를 파고든다. 파고들어 발목을 잡는다. 발목이 잡힌 채 안간힘을 써대는 저 불쌍한 시편들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보라! 정현종의 목소리로 불러대는 백무산의 노래를! 바슐라르의 어법으로 논하는 레닌의 가르침을! 쁘띠부르조아의 지위로서 감당해내려는 프롤레타리아의 임무를! 소위 '형식이 내용을 비웃는‘ 꼴이다. ’낡은 모더니즘‘이 ’새로운 리얼리즘‘의 발목을 잡아 챈 형국이다.
이러한 기형적인 모습을 빚어낸 한계에 대하여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소시민적 민중주의’의 발현이라고나 해야할 것이다. 재현이형의 위악적인 표현을 빌면 ‘민중적 모더니즘’의 표출이다. 이 한계가 본질적이고 전일적인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시작방법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점에 있다. 즉 실제의 일상생활 속에서 스스로의 언어와 행동을, 이성과 감성을, 이념과 자세와 품성과 작풍을 완벽히 일치시켜 나가지 않으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라는 데 있다. 나의 이 고질적인 개인주의, 자유주의, 허무주의, 냉소주의를, 이 편의주의와 행세주의를 깨끗이 척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편향의 척결은 아마도 실천을 통해서만, 그것도 조직생활에 의한 투쟁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할 터이다. 그렇다. 문학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문학 이상의 위상에 놓여져 있다.
최근 나는 내가 가장 신뢰하고있는 여러 문학활동가들 앞에서 문학 및 문학운동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었는데 지금가지 내가 한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내가 행한 자기비판의 일부이다. 나의 문학행위를 정리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시집을 발간하게 된 지금 그 비판을 다시 되풀이하는 이유는 이 시집을 펼쳐들 불특정다수의 독자에게도, 즉 당신에게도 이러한 내용을 알 권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을 나의 면죄부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나의 현재의 위상을 명확히 해두려는 것뿐이다. 나는 여기서부터 출발이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III
대학지면 이외의 지면에 최초로 시를 발표한 것은 졸업을 1개월 앞두었던 1985년 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 [민족의 문학 민중의 문학]을 통해서였다. 따라서 굳이 ‘등단’ 혹은 ‘데뷔’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이것을 들 수 밖에 없으나 무의미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집에는 이 시기 이전에 쓰여졌던 시들이 훨씬 더 많이 실려있다. 발표연대가 이 시기이후로 되어 있는 시들도 그 대부분이 이 시기 이전, 즉 대학시절에 쓰여진 것들이다. 가령 1988년에 발표된 [활화산]은 1982년에 쓰여진 것이고 1987년에 발표된 [망월동산문]은 1984년에 쓰여진 것이다.
여러 편의 시에서 선배시인들의 입김이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내게 어떠한 의미에서건 영향을 끼쳤던 시인들의 입김이 드러난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의도적으로 인용 혹은 변용한 부분도 있다. 가령 [미리 부는 바람]의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들겐지)’는 강은교의 시 [풀잎]에서, [바리케이트 안에서]의 外國商館의 늙은 머슴이/南朝鮮政府의 龍을 어루만지며/꿈꾸는 榮華를 위해서가 아니라/또다시 노예가 되려는/동포의 위태로운 자유를 위하여‘는 임화가 1946년 6월 9일 집필한 시 [청년의 6월 10일로 가자]에서 따온 것이며, [사랑歌]의 ’이 온전치 못한 혁명을 감싸기 위해/우리는 때때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최민의 시 [포옹]의 ’이 온전치 못한 사랑을 감싸기 위해/우리는 가끔 혁명을 이야기한다‘라는 구절을 뒤집어 빌려온 것이다.
미발표작을 포함하여 쓰여진 시들을 모두 추려보니 약 100여편을 조금 넘었다. 그 중 절반 정도를 버리고 나머지 것들을 약간의 손을 보아 이 시집으로 묶어냈다. 따라서 발표 당시와 약간 차이가 나는 시들도 있다. 그 시들은 다시 크게 네 묶음으로 나누었는데 가장 오래된 것들이 제4부로, 비교적 최근의 것들이 제2부로 묶여져 있다. 그 중간에 쓰여진 것이 제1부와 제3부의 시들인데 이 둘 중에는 전자의 것이 비교적 나중에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집필시기나 발표시기가 부를 편성하는 것은 기준은 아니었으므로 이러한 규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부를 편성하는 기준은, 우습지만, 조리 있게 설명해내기가 매우 어렵다.
IV
이 시집에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를 놓고 나는 꽤 고심하였다. 시집의 전체저긴 내용을 아우를만한 표제시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의 내용과 수준이 들쭉날쭉하였다.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어본 다음 나는 결국 그것을 ‘식민지 밤노래’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식민지의 밤에 대한 노래’라는 뜻이 아니라 ‘식민지의 밤에 불리어진 노래’라는 뜻이다.
당신은 이 시집에 실려있는 노래를 통하여 자신의 조국이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왔던 한 청년의 고통스러운 정신적 궤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캄캄했던 어둠의 세월을 때로는 도피하고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피를 흘리면서 살아온 그가 어떻게 하여 ‘버릇없는 애새끼’로 변해 갔는지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날카로운 귀를 갖고 있다면, 그 청년이 아직도 다 떨쳐내지 못한 길들여진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너그러운 눈을 갖고 있다면, 식민지의 밤에 불리어진 이 보잘 것 없는 노래들을 통해서도 그 밤을 꿰뚫고 달려오는 저 찬연한 새벽빛의 가슴 벅찬 아름다움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그러면 그 청년은 아마 몹시도 행복해할 것이다.
V
나를 보면 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 같다시며 한 시도 시름을 놓지 못하시는 부모님들께, 모자라는 나에게 끊임없이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현영에게, 어깨를 엮은 채 모진 비판의 채찍을 휘둘러 주저앉으려는 나를 추슬러 세우곤 하는 내 주변의 선배, 동료, 후배 문학활동가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 동안 한솥밥을 나누던 세계의 식구들에게는 물론이고, 장정을 맡아준 김경애씨를 비롯하여 인쇄, 제본, 배본, 판매과정을 맡아준 출판관계 노동자여러분들, 그리고 이 책을 펼쳐든 당신에게도 두루두루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밤이 깊었다.
1988년 겨울
인천 부평에서
심산
냉엄한 씻김굿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