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미륵에 오방색 비단천을 감아주는 마음
충청남도 서산시에는 연화산(蓮花山, 234m)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름 자체가 ‘연꽃산’이라니 참 예쁘지요? 성연면과 지곡면 그리고 팔봉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인데, 흔히 비산비야(非山非野)로 표현되는 한국의 산답게, 산인듯 구릉인듯 평지인듯 마을에 바투 붙어 나지막하게 솟아 있는 산입니다. 이 야트막한 산이 마을의 논밭과 만나는 지점 그 어드메쯤에 못 생긴 돌미륵이 하나 솟아 있습니다. 이정표도 없고 표지판도 없이 저 홀로 뎅그러니 솟아 있지만 적어도 고려 후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미륵입니다.
얼마 전에 이 연화미륵을 만나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찾지 않을 듯한 외딴 마을의 농로 사이로 난 길을 훠이훠이 걸어가다보니 저 멀리 반가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방면의 도사들 사이에서 연화미륵은 ‘오방미륵’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사람들이 이 미륵 앞에 모여 ‘미륵제’를 지내며 한국 고유의 전통색상인 ‘오방색’의 비단을 그 투박한 몸뚱아리에 정성스럽게 둘러주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화마을 사람들은 미륵제를 지낸 모양입니다. 저 만치 멀리에서도 마치 색동저고리를 입은 듯 알록달록한 비단으로 몸을 감싼 어여쁜 미륵이 보였습니다.
오방색이란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다섯가지 색깔을 뜻합니다. 노란색은 토(土)에 해당하며 우주의 중심을 이르는 가장 고귀한 색으로서 임금의 옷을 만들었습니다. 파란색은 목(木)에 해당하며 봄의 색, 귀신을 물리치는 색이라 하였습니다. 흰색은 금(金)에 해당하며 결백, 진실, 삶, 순결 등을 의미하여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입었던 색입니다. 빨간색은 화(火)에 해당하며 생성, 창조, 정열, 적극성 등을 의미하는데 가장 강력한 벽사의 색입니다. 검은색은 수(水)에 해당하며 인간의 지혜를 관장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른바 오행이론에 따른 색깔의 분류 및 그 의미이지요. 이 오방색은 우리 민족의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신부의 연지곤지, 색동저고리, 오색고명, 궁궐의 단청 따위가 그 생생한 증거들입니다.
처음 만난 연화미륵은 이상하게도 네가지 색의 비단만 두르고 있었습니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아마도 검은색의 대체재로 쓰인 듯합니다)만 있을 뿐 흰색이 없었던 겁니다. 괴이하다 여겼지만 별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저 만치 논누렁에 내팽개쳐져 있는 흰색 비단을 발견했습니다. 아하, 아마도 바람이 불어와 흰색 비단을 벗겨버린 것이로구나! 사태를 파악하니 그대로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흰색 비단을 가져와 다시 연화미륵의 몸뚱아리를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을 하는 동안 마음이 따뜻해지고 평화로와졌습니다. 정말이지 백만년만에 무언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마을미륵들은 그 조각의 솜씨가 매우 어수룩합니다. 전문가가 아닌 보통사람들이 새긴 덕분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못생긴 마을미륵들이 커다랗고 화려한 절집의 대웅전 안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는 공장제 도금불상들보다 백만배는 좋습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이 못생겼으나 정겨운 마을미륵 앞에 모여 미륵제를 지내고 새로 마련한 오방색 비단천을 감아주는 연꽃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들이 무엇을 빌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올해도 우리 마을 농사가 잘 되게 해주시기를, 마을사람들이 모두 병치레를 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기를, 타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의 학업과 사업이 잘 되기를.
연화미륵에 흰색 비단천을 둘러주면서 저도 이런 저런 소망들을 내심 읊조려 보았습니다. 무엇을 소원했을지는 상상이 가시겠지요? 저를 포함하여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 삶이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위에 언급한 연화마을 사람들의 소망들과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이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려하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남도에서는 벌써 매화를 필두로 봄꽃의 꽃망울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여러분들의 올 한해 삶도 커다란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펼쳐지기를 기원합니다. 알파고가 인간을 이겼다고요? 별 의미 없습니다. 자본주의적 효율성에서 기계가 사람을 앞서 간다면, 그렇게 하라고 내버려두면 그만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계 따위가 꿈꿀 수 없는 전혀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행복해지기, 사랑하기, 놀기, 낮잠 즐기기 같은 것들 말입니다. 연화미륵을 보고 온 김에, 봄의 문턱 앞에 서서, 그냥 쓸데없는 소리 몇 마디 지껄여 봤습니다.
글 올린지 하루만에 이세돌이 제4국에서 이겼네?
세상에....1200대의 컴퓨터 CPU와 혼자 맞짱 떠서 이기다니...이세돌 만세!!!!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