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행의 즐거움과 과제
심산의 신간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바다출판사, 2019)의 에필로그
책을 펴내는 과정에서 내가 쓴 글들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어본 결과 느낀 점들이 많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월간지에 연재된 것들이라 제한된 지면 안에서 논의하기 어려웠던 내용들도 많다. 내가 내린 결정이요 내가 쓴 글들이니 후회하거나 변명할 생각은 없다. 다만 본문에서는 다룰 수 없었던 내용들 몇몇을 후기 삼아 짤막하게 덧붙인다.
편의상 이 책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의 제1부에 실려 있는 글들을 ‘인문산행’이라고 하고 제2부에 실려 있는 글들을 ‘유산기’라고 하자. 인문산행과 유산기는 비슷한 듯 다르다. 인문산행이 고증과 답사를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면, 유산기는 등산 혹은 유산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인문산행이 ‘공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유산기는 ‘놀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 인문산행과 유산기 사이에는 20년 가까운 시차가 있다.
유산기를 다시 읽으며 그리움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움은 흘러간 세월의 몫이요 부끄러움은 허술한 고증의 탓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왜 산수유기山水遊記를 다른 표현으로 와유기 臥遊記라 불렀는지도 알 것 같다. 젊은 시절에 산수에서 노닐며 남긴 기록을 나이 들어 방 안에 누워 다시 읽으며 즐긴다는 것이 와유臥遊의 개념이다. 영어의 Armchair Climber라는 개념과 상통한다. 글쓴이 개인에게는 나름 젊은 날의 추억을 음미하는 독서체험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에게도 유의미한 독서체험이 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므로 내가 앞으로 산 혹은 산행과 관련된 글쓰기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인문산행의 개념과 지향을 따라갈 것이다. 유산기가 사적私的이라면 인문산행은 공적公的이다. 사적인 놀이는 즐거우면 그만이지만 공적인 논구論究에는 책임이 따른다. 산중한량山中閑良이 스스로 기꺼이 산중학인山中學人으로 변모해가려 하는 것을 보면 20년 가까운 세월이 마냥 허투루 흘러간 것만은 아닌 듯도 하다.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을 준비하고 진행해온 지난 2년 동안은 나에게도 매우 특별한 체험의 시간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최고의 공신功臣은 한국산서회 인문산행팀의 조장빈 이사다. 나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치밀한 고증과 꼼꼼한 답사가 그의 최대 강점이다. 그와의 협업 이후 나는 속전俗傳과 통념通念과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자의적 주장 그리고 남의 블로그에서 아무런 검증 없이 갈무리해온 글들 모두를 의심에 찬 눈초리로 뜯어보게 되었다. 오직 원전原典과 현장답사만이 인문산행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다.
한 회 분량의 인문산행을 진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섭렵한다. 여기에는 물론 답사대상과 관련된 기존의 단행본이나 석박사 논문들이 모두 포함된다. 본행사를 진행하기 전에 의문이 풀릴 때까지 사전답사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확실하다고 말하고 모호한 것은 모호하다고 말한다. 인문산행이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고증과 답사와 해석을 이와 같이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 우리가 등산과 인문학의 결합을 말할 때 그 연결고리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학문적 혹은 실증적 태도다.
인문산행을 진행하면서 번거로운 일도 많았고 수고로운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노역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남은 것은 바로 ‘인문산행의 즐거움’이다. 팀플레이로 진행하다보니 경이로운 시너지 효과도 많았고 경천동지할만한 발견들도 많았다. 조장빈이 문암폭포를 묘사한 한장석의 원문原文 <수락산 유람기>를 내밀었을 때 나는 단박에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우연히도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수락산에 매달려 있었고, 그래서 수락산의 모든 계곡과 능선들을 샅샅히 뒤져봤던 것이다.
바위 병풍이 우뚝 솟아 마치 성가퀴 모양처럼 그 삼면을 둘렀고 입을 벌린 듯 가운데는 트여 있었다. 큰 바위가 그 꼭대기에 시렁을 얹은 듯 들보 모양을 하고 있고 높이는 십여 장(丈) 될 만한데 세찬 폭포가 걸려 있었다.
의정부시 고산동 빼뻘에서 수락산으로 오르는 길 옆 한켠에 숨어 있다. 수락산 정상에서 도정봉으로 나아갈 때 오른쪽 계곡인 흑석동으로 빠지는 길의 연장선이다. 이 폭포 뒤편의 숨겨진 옛길로 오르면 칠성대와 영락대 사이의 안부로 올라붙게 된다. 문헌고증과 현장답사가 만나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폭포 뒤편의 숨겨진 옛길이 위치한 계곡의 이름이 은선동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한장석 이전에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글도 여럿 확인했다. 미호 김원행의 <수락폭포연구>, 삼산재 김이안의 <기유>와 <문암유기>(이상 1746년 4월), 냉재 유득공의 <은선동기>(1775년 겨울) 등등. 우리가 그 이름을 되찾아 돌려주기 전까지 이 폭포는 대부분의 수락산 지도에 표기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다음daum지도에는 그 위치가 표기되어 있는데 이름은 그 근거를 알 수 없는 ‘천문폭포’다.
인왕산 자락의 옥인동에서 옥류동 바위글씨를 재발견한 기쁨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바위글씨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향토사학자 김영상이 1950년대에 찍은 사진이 ⟪서울 육백년⟫(1989년)이라는 책자에 실려 문헌상으로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옥인동의 난개발이 지속되어 찾을 수가 없었다. 인왕산 답사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던 조장빈이 주택가에 파묻힌 추정위치를 비정했다. 역시 인문산행팀에 소속되어 있는 허재을 이사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주택가의 담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옥류동 바위글씨를 찾아냈다. 그날 인문산행팀은 광화문에서 번개미팅을 가지며 자축의 술잔을 맞부딪혔다. 현재 옥류동 바위글씨는 서울시에서 문화재지정 검토단계로 진입해있다.
북한산 송계별업의 바위글씨를 발견한 것도 대박(!)이다. 우이동 아카데미하우스 뒤편의 계곡을 흔히 구천계곡이라 부른다. 이 계곡의 상단에 구천은폭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계곡의 본래 이름은 조계동이었다. 구천은폭 인근에 인평대군의 송계별업이 들어서 있었다는 사실은 문헌에 나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물증을 찾고 싶었다. 조경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허재을과 함께 커다랗고 묵직한 빠루(!)를 들고 계곡에 널부러져 있는 바위들마다 낑낑대며 들춰보던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도대체 몇 번째의 답사 때였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인문산행팀에 소속되어 있는 송석호 회원(고려대 전통조경학과 박사과정)이 구천은폭 부근의 경관을 망원렌즈로 당겨 잡다가 놀라운 바위글씨를 발견했다. 바로 송계별업이라고 음각된 바위글씨다. 카톡으로 실시간 현장사진을 접한 우리들은 각자의 직장에서 미친 듯이 괴성을 질러댔다. 이 바위글씨와 주변 경관들 역시 현재 서울시에서 문화재지정을 검토 중이다.
최근(2019년 5월)에는 수락산 청학동의 옥류폭포 인근에서 ‘옥류동’이라는 바위글씨를 찾아냈다. 이 역시 고증과 답사가 결합된 것이다. 이태 전의 수락산 인문산행 당시 한국산서회의 이수인 이사에게 의뢰하여 처음으로 국역한 <서아배수락시후>(지촌 이희조, 1709년 집필, ⟪지촌선생문집⟫ 권20 제발)를 통하여 이 근처에 우암 송시열의 글씨가 바위에 새져져 있음을 알았다. 그 이후 이곳에서 노닐 때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 바위글씨를 찾아내려 천신만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결국에는 찾아내고야 말았다. 최근 수락산유원지(청학동)에 즐비했던 음식점들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전에는 막혀있던 시야가 새롭게 확보된 덕분이다. 현재 우리는 실측과 초탁(初拓)의 날짜를 잡아놓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인문산행을 통하여 새롭게 규명한 사실들과 새롭게 찾아낸 물증들은 이 밖에도 무수하다. 그 모든 내용들은 훨씬 더 치밀하고 냉정한 고증을 거쳐 확신을 얻게 된 다음 하나 둘씩 세상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따금 인문산행팀원들끼리는 이런 농담들을 주고받는다. 아니 우리가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진작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면 좋은 대학 나와서 지금쯤 연봉 짱짱한 직장에 다니고 있을 텐데! 금전 때문도 아니고 명예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인문산행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는 간명하다. 인문산행은 즐겁다.
정기간행물에 글을 연재하는 행위에는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 장점은 어찌되었건 정기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다. 하기야 마감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조차도 없었다면 어쩌면 게으름만 피우다가 글쓰기 자체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단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지면의 제약이다. 원고매수의 제한과 장르의 규정이 글의 내용과 형식을 좌우한다. 인문산행이건 유산기건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산행후기山行後記의 형식을 띄고 있으며, 주어진 지면의 제약 때문에, 엄정한 고증과 깊이 있는 내용을 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인문산행의 내용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그릇이다.
사전학습과 사전답사의 총량을 100이라 한다면, 인문산행 행사 당시 현장에서 펼쳐 보일 수 있는 내용은 50도 되지 않으며, 그것을 그나마 산행후기라는 그릇에 담아 글로 남길 수 있는 양은 채 20도 되지 않는다. 이 양과 질 양 측면 모두에서의 간극이 글쓰는이를 괴롭게 만든다. 아무리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골머리를 짜내어 봐도 이 문제를 극복할 대안은 하나 밖에 없다. 글을 쓰는 호흡과 글을 담는 그릇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앞으로는 특정 산에 대한 인문산행의 내용을 하나의 단행본 안에 담으려 한다. 공간이 충분히 확보된다면 그것을 채우는 내용 또한 견실해질 것이다. 단행본의 저자명은 ‘심산 조장빈 공저’가 될 것이며, 그 첫 번째 대상이 되는 산은 인왕산이다. 이미 고증과 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인문산행이라는 거대하고 심오한 작업을 계속 성공적으로 추진해나가려면 그에 걸 맞는 조직이 필요하다. 현재의 인문산행팀은 어떤 면에서 목전에 닥친 특정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급조된 단발성 태스크 포스에 불과하다. 때마침 사단법인 한국산서회는 정관을 바꾸어 부설 연구소를 설립하려 한다. 보다 전문적이고 조직적인 연구행위는 아마도 이 연구소를 통하여 추진될 것이다. 그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산악계에도 등산 이외의 연구를 충실히 하여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산악인들이 많다. 학계에도 산을 사랑하고 등산을 즐기며 산과 관련된 논문들을 끊임없이 발표하고 있는 학자들이 많다. 한국산서회가 새롭게 발족시킬 연구소는 악계岳界와 학계學界의 놀라운 콜라보를 연출할 것이다. 그들의 연구와 우리들의 산행이 합쳐질 때, 아직은 생소한 이 ‘인문산행’이라는 개념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2019년 여름을 맞이하며
노고산 아래 집필실 심산재深山齋에서
심산沈山
저의 신간 산서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바다출판사, 2019)이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 책의 본문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1부 <서울경기 인문산행>에는 19편의 글이 실려 있고, 제2부 <유북한산기>에는 12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본문 이외에 서문, 프롤로그, 에필로그 등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위의 글은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의 에필로그에 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