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스쿨: 유쾌한 크로스-오버의 현장
[기획회의]가 만난 사람/심산스쿨 대표 심산
글_장동석(북칼럼니스트)
"나에게는 꿈이 없었다."
제임스 딘까지는 아니어도, 정우성이라는 배우를 방황하는 젊음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던 영화 <비트>의 첫 장면에서 흘러나온 내레이션이다. 당시 <비트>의 뒷맛은 길고도 길어서, 맛도 모르는 독하디 독한 '말보로 레드'를 고집케 했고, 지포라이터도 하나 장만했더랬다. 여운이 길었지만 오토바이까지는 차마 장만하지 못했다. 1997년의 여름은 그렇게 <비트>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탈진 20대 중후반을 지나던 청춘 그 누구라서 그 영향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영화 <비트>의 시나리오를 쓴 심산을 만나기 위해 신촌의 심산스쿨을 찾았다. 몇 가지 사연으로 인해 이미 몇 차례 발걸음을 했던 낯설지 않은 공간. 소박한 사무실 하나와 정갈한 강의실 하나가 전부지만, 그곳에서 한국 영화계는 물론 출판계까지 새로운 젓줄을 댈 숱한 강좌들이 열리고 있다. 어디 영화와 출판뿐이랴. 진중한 인문학 강의가 있고(이윤호 인문반), 사진을 제대로 배울 수 있으며(김진석 사진반), 자신만의 책을 쓸 수 있는 강의(명로진 인디반)를 들을 수도 있다. 다양하고 수준 높은 강좌들이 한 자리에서 열리도록 멍석을 깔아놓은 '작가' 심산이 사무실로 들어선다. 지금부터 심산과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한심한? 그러나 영양가 높은 일상
장동석(이하 장) - 요즘 근황은 어떤가?
심산(이하 심) - 요즘 근황이 아주 한심한데,(웃음) … 진짜루. 개인적으로 출판사와 계약하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작년에 억지로 한 것이 있다. 그런데 아직 원고 마감을 못 지키고 있다. 사진작가와 함께 작업했는데, 출판사에는 사진작가 책만 먼저 내고, 내 책은 완성되는대로 내자고 하고 있다.
학사과정 격인 《시나리오 가이드》는 책이 워낙 좋아서 번역을 했는데, 석사과정 격인 《시나리오 마스터》는 끔찍해서 심산스쿨 제자들과 함께 번역했었다. 그래서인지 최근 영화에 관한 책 번역 의뢰가 들어왔는데, 차라리 책을 쓰는 게 훨씬 쉽지 이제는 번역을 못할 것 같아서 고사했다. 번역 의뢰가 들어온 책 중 하나가 최근 출간된 《제임스 카메룬의 아바타 : 판도라의 역사와 생태에 관한 기밀 보고》다.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영화 <아바타>를 처음 기획한 것이 10년도 훨씬 전의 일인데, 이 책에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판도라 행성의 모든 것이 완벽하게 기술되어 있다. 판도라의 위치와 환경, 나비족의 삶과 문화, 판도라의 동물과 곤충, 식물들까지 완벽하게 소개되어 있다. 영화보다 더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을 예뻐하는 후배에게 맡겼는데, 멋진 책으로 최근 출간되었다.
장 - 한심하다더니 영양가는 높다.
심 - 몇 가지 더 있다. 영화 <대부>를 좋아하는데 《대부의 시나리오와 제작 노트》라는 책이 미국에서 3년 전에 나왔다. 이것만큼은 내가 해야겠다 싶어서 최대한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다른 책들도 내야지 하면서 안 내고 있어서 여기저기서 욕을 좀 먹는다. 그래서 내 표현으로 하자면 '창고 정리'를 한 번 하려고 한다. 써놓은 원고들을 일단 단행본으로 털어야내려고 하는데, 대여섯 권 될 것 같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심산스쿨 운영하면서 틈만 나면 놀고 있다. 산에 자주 가고, 와인반 사람들에게 와인 가르치면서 여기저기 와인 모임에도 참석하고…. 정말 잡다하게, 뭘 하는지 모르게 이것저것 한다.
엔터테인먼트 그룹을 형성한 심산스쿨
장 - 아픈 질문 하나 하자. 시나리오 작가 심산은 <비트> <태양은 없다> 이후 히트작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어찌 된 내막인가?
심 - 전적으로 내가 무능해서 그렇지 뭐. 난 뭐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사실 나는 어떤 시나리오를 써봐야지 해서 쓴 적이 없다. 회사에서 의뢰해서 돈을 받고 쓰고, 돈을 안 주면 안 쓰는 스타일이다. 시나리오는 글쓰기 중 하나일 뿐인데, 아주 훌륭한 장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처지는 장르도 아니다. 하지만 일정한 수준의 작가가 되면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받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는 장르다. 출판과는 기본적으로 단위가 다른데, 출판은 계약금 100만 원으로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두 작품 이후에 시나리오는 쓰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시나리오가 내 손을 떠나면 그 이후의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장 - 더 구체적인 이유를 알고 싶다.
심 - 사실 소설과 달리 시나리오는 명백한 엔터테인먼트 분야다. 이 바닥은 40대 중반을 넘어서면 거의 '아웃'이다. 또 요즘에는 감독들이 어려서 나를 어려워한다. 어떤 의견은 받아주고 때론 고개도 끄덕여줘야 하는데, 뒤에서 팔짱끼고서 "영화 어디서 배웠어" 하니까 당연히 싫어할 수밖에.
또 다른 이유는, 사실 나도 제작자 친구가 많은데 한동안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대표로 일하면서 그 사람들을 많이 쪼았다. 전화해서 "돈 안 주냐"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일을 따지다 보니 어느새 좀 불편한 사람이 되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시나리오 작업은 멈춘 상태다. 2년 전에 어떤 시나리오를 썼는데 홀딩되어 있는 것이 최종 상태다.
시나리오 작업은 내 스스로 정말 훌륭한 작품을 써서 팔지 않는 한, 달리 계약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나는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라 그냥 '작가'로 생활하고 있다. 이미 써둔 것들은 단행본으로 출간한 후에, 진짜 내가 쓰고 싶은 것들을 쓰고 싶다. 이러저런 계획들을 가지고 있다.
장 - 심산스쿨은 자타가 공인하는 시나리오 작가의 산실이다. 이제까지 거쳐 간 인원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심 - 지금까지 24기를 강의했는데, 심산스쿨에서 15기부터 했다. 한겨레에서 7년, 심산스쿨에서 5년을 한 셈이다. 졸업생은 1,000명 정도 될 것 같다.
장 - 심산스쿨의 모태는 한겨레문화센터의 시나리오 강좌인데, 독립한 이유가 궁금하다.
심 - 재미있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사실 처음 한겨레에서 강좌를 시작했을 때는 수강생 수가 적었다. 그런데 1-2년 하고 나니까 점점 수강생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수강료도 조금씩 올랐다. 그런데 내 강사료는 별반 오르지 않았다.(웃음) 나중에는 소문이 나서 광고를 할 틈도 없었다. 광고가 나가기도 전에 수강 신청이 마감되는 강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만 생각해 보니 한겨레가 내 강좌로 돈을 너무 많이 버는 것 같았다. 물론 잘못된 생각이었지. 한겨레라는 공신력 있는 일간지가 후광이 된 것인데, 내가 잘난 줄 알고 독립해도 문제없겠지, 라고 생각했다.
장 - 정말 문제가 없었나?
심 - 처음에는 고전을 조금 했지만 이내 회복했다. 그리고 내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니까 주변에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강의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할 수 없이 와인도 가르친다.(웃음)
장 - 심산의 시나리오 강의 외에도 노효정, 박헌수 등이 시나리오 강좌를 열고 있다. 사진 강의도 있는데, 심산스쿨은 하나의 엔터테인먼트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형국이다.
심 - 선생들끼리도 친하다. 그래서 A반 강사가 B반 수강생이 되고, B반 강사가 C반 수강생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수강생들도 이 반 저 반으로 옮겨 다니는 이상한 크로스오버가 생겼다. 이런 현상들이 재미있다. 시나리오를 배우러 왔다가 와인반으로 전향하기도 하고, 글쓰기를 배우러 왔다가 사진을 배우기도 한다. 이런 크로스오버는 좋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관심 있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자신만의 분야를 찾는 친구도 있다.
심산은 시종 솔직했다. 한겨레문화센터를 떠나 심산스쿨을 열게 된 이유를 나름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도 있으련만, 그는 굳이 숨기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 그 이유가 전부였겠는가. 자신만의 시나리오 글쓰기 노하우를 좀 더 철저하게, 그리고 아낌없이 수강생들에게 전해주고픈 욕심이 왜 없었겠는가. 그이의 솔직한 화법은 오히려 이 부분에 더 방점을 찍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못된 선생이다
장 - 심산스쿨의 역할 중 하나로 시나리오 작가 에이전시를 명시하고 있다.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과 연관성이 있는 작업인가?
심 - 전혀 별개의 일이다.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사람들이 들으면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작가조합은 신고제도 아니고, 허가제도 아닌 추천제다. 일정한 수의 시나리오를 쓰면 자동으로 가입할 수 있는 그런 단체가 아니다. 처음부터 원칙을 세웠는데, 작가조합에서 특정 작가를 초청하는 형식을 취한다. 한마디로 검증받은 프로라는 말이다.
심산스쿨 멤버들을 그 이전 상태로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인 셈이다. 작가조합 사람들은 스스로 계약을 만들어나갈 능력이 있다. 그러나 심산스쿨 사람들은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친구들이 많아서 누군가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으면 좋은 회사나 감독을 만나기 어렵다. 완성된 시나리오를 제작 능력이 있는 감독이나 회사를 연결시키는 것이 현재 내 역할 중 하나다.
장 - 개인적인 역량이 많이 동원된다고 보면 되는가.
심 - 그런 셈이다. 물론 심산스쿨 출신 중에서도 작가조합에 들어간 친구들이 있다.
장 - 1,000명이 넘는 졸업생에, 작가조합의 추천을 받을 정도로 출중한 작가들을 배출하고 있는데, 작가조합과 비슷한 성격의 조직으로 발전시킬 생각은 없는 건가.
심 - 전혀 없다. 규모의 경제학이기도 하고, 내 그릇이 현재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 심산스쿨을 열기 전에도 외부에서 제안이 있었다. 프랜차이즈 형태로 서울 강남과 부산 등 대도시에 심산스쿨을 열자고 말이다. 자금이 들어오기 직전이었고, 생각해보니 가능하겠더라. 그러면 일주일 내내 지방 돌면서 무언가를 해야 하고…, 연봉은 보장되겠지만 내가 놀 시간이 없겠더라. 내게 제일 중요한 것은 노는 일인데(웃음)…, 그렇게 얽매이기 싫었다.
지금도 (운영이)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강좌를 늘리거나 교실을 늘리자는 제안도 종종 있다. 지금처럼 느슨한 형태로 부드럽게 굴러가는 게 좋다. 늘리면 사무국도 만들어야 하고, 무슨 큰 어학원처럼 난리를 쳐야 할 것 같은데, 돈은 벌겠지만 나와는 안 맞는다.
장 - 그래도 하나 있는 강의실이 너무 많은 시간 노는 건 아닌가.
심 - 낮시간에 비워두는 것이 내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낮에 강좌를 만들면 되겠지만, 시나리오반 친구들 중에 작업실이 없는 친구들이 와서 작업할 수 있도록 비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텅텅 비워두는 것이 나쁘지 않다. 빈공간이 있는 게 나로서는 좋다. 나는 자리를 한두 달 비우기도 한다. 그래도 별 무리 없이 심산스쿨이 돌아간다. 느슨한 시스템이어서 그렇다. 꽉 찬 시스템이면 내가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다. 그게 내가 싫다.
장 - 심산스쿨의 시나리오 강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심 - 실제로 심산스쿨 출신들이 각종 공모전에서 성적이 좋다. 수강생들이 강의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성적이다. 사실 내가 강의를 못되게 한다. 혹독하다. 구타와 욕설, 벌금은 물론 내쫓기까지 한다. 그게 내 스타일이다. 글쎄…, 나는 학생들 작품에 대해 없는 용기를 북돋는 스타일은 아니다. 현실의 냉정함을 알려주는 스타일인데, 이런 건 들이밀지도 말라고 말하는 못된 선생이다. 그것이 때론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좋다.
시나리오를 쓰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처음부터 알려주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자신의 역량에 맞는 곳으로 진로를 바꿀 수만 있다면…, 단행본을 쓰던, 번역을 하던, 자기 역량에 맞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정말 못쓴 시나리오는 가지고 용기만 북돋우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또 하나는 시나리오 강좌가 여럿 있지만 수강생들이 강사를 고를 수 있는 시스템은 심산스쿨밖에 없다. 다른 강좌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배정하는 시스템이라고 할까. 심산스쿨에 시나리오반을 맡은 강사가 여럿인데, 다 각자의 스쿨이다. 노효정스쿨, 박헌수스쿨, 그리고 심산의 시나리오 스쿨이 있는 거다. 내 강의날만 나오지 다른 날은 얼굴도 비추지 않는다.
장 - 그래서인지 어느 신문에선가 시나리오 작가보다 강사의 자질을 타고 났다고 해서 혼자서 웃었다.
심 - 내가 물론 잘 가르친다. 하하하. 대학에서도 가르쳐봤지만 싫었다. 대학생들은 숙제도 안하고 지각에 결석을 밥 먹듯이 한다. 그런 녀석들 모두 F 주고 교수들과 싸웠다. 원래 대학생들이 그렇다. 우리 때도 그랬잖은가.
그런데 심산스쿨에 오는 사람들은 대학 졸업하고 직장 다니면서 아까운 돈과 시간을 들여서 오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집중도가 강하다. 수업 시간에 눈들이 반짝반짝한다. 숙제도 많은 편인데 다 해온다. 안 해오면 내쫓으니까.(웃음) 사실 대학 연극영화과 졸업하고 다시 오는 친구들이 많다. 대학 나와도 충무로에서 써먹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장 - 심산스쿨도 명불허전이지만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늘 궁금했던 게 '한국형'이 뭐냐는 거다.
심 - 그건 출판사에서 갖다 붙인 거다. 그 책이 출판될 즈음에 그런 제목이 유행했던 모양이다. 사실 나도 좀 민망했다. 책 내용을 보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즌 2'를 준비하고 있는데, 2-3년 전부터 통 글쓰기가 싫어서 지금까지 미루고 있다. 조만간 시즌 2가 나올 것이다.
영화만큼 동시대의 현상과 가치를 극명하게 전달하는 매체는 없다. <아바타>는 우리가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간하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음을 직설화법으로 보여주었고, 50년의 시간을 거슬러 5월 다시 관객을 찾아오는 <하녀>는 어그러진 우리 시대 가족의 모습과 성윤리를, 어쩌면 도발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심산은 수많은 수강생들에게 시나리오를 가르치면서 아울러 시대와 호흡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못된 선생을 자처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렴, 그의 솔직한 화법은 시종 유쾌했다.
[img2]산, 그냥 좋아서 간다
장 - 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심산에게 산이란 어떤 의미인가?
심 -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산에 왜 가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산에 다니는 사람 과 안 다니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냥 좋아서 가는 거다.
거대한 도시에 살면서, 또 밥벌이 하면서 사람들과 인연 맺고 사는 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고, 짜증나는 일도 많다. 그런 것들이 좀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균형 감각을 갖게 한다고 할까…, 세상살이에 그게 다가 아니구나, 이런 마음을 갖게 한다.
산에 가는 일은 전혀 돈이 안 된다. 딴 데서 돈을 벌어서 산에 가는데, 물론 산에 가는 일로 돈을 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걸 원치 않는다. 산은 철저하게 휴식이나 놀이의 공간으로 남겨두고 싶다.
장 - 어쩌면 삶의 철학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가.
심 - 내 삶의 모토는 노는 거다.(웃음) 히말라야를 처음 갔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제까지 알던 것과 다른 스케일의 세계를 경험했다고 할까. 이상한 마음 평화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별게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깊게 했다. 그런데 산은, 특히 히말라야는 중독성이 있다. 가는 사람은 계속 가야 한다.
장 - 《마운틴 오딧세이》는 한 번쯤 개정판을 낼 시점에 다다른 것 같은데, 언제쯤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심 - 사실 그게 제일 급한 일인데, 정리는 안하고 게으름 피우고 있는 중이다. 올해는 정리해서 개정판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도 단행본으로 낼 계획이다.
장 - 개인적으로는 《마운틴 오딧세이》도 흥미로웠지만 《엄홍길의 약속》이 더 인상적이었다. 어떤 인연으로 그 책을 쓰게 된 건가.
심 - 2004년 5월 에베레스트에서 사망한 고(故)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찾기 위한 초모랑마 휴먼원정대가 2005년 초에 구성되었는데, 휴먼원정대에서 연락이 왔다. 함께 가서 시신 수습 과정을 딱딱한 원정보고서가 아닌 책으로 구성해 달라고 했다. 고(故) 박무택 대원도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고, 아는 후배 시신을 찾으러 간다는 안 갈 수가 없었다.
산에 많이 다녀봤지만, 휴먼원정대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친구 몇과 암벽을 타거나 트래킹을 해봤지만, 정식 원정대원으로는 처음 경험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휴먼원정대 사람들과는 지금도 한두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술을 마신다.
산 이야기가 나오자 심산의 눈은 더 반짝이기 시작했다. 산과 심산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듯 보였다. 산이 거기 있어 간다기보다, 누군가의 꼬임이 있어야 산에 가는 나로서는 이해 못할 대목이 분명했지만, 심산과의 산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산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산행에 이어지는 뒤풀이를 사모(?)해 따라나섰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이야기가 산악문학으로 이어졌다. 산악문학 이야기가 나오자 한심하다던 그이의 일상은 더 이상 없었다.
무궁무진한 소재로 품고 있는 산악문학
장 - 산과 관련한 글을 꾸준히 쓰고 있고, 책도 내는 이유는 결국 '산악문학'이라는 본령으로 가기 위한 작업인데,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중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는가.
심 - 꼭 해야 하는 일인데 지난 몇 년 간 안한 게 바로 이 일이다. 자료도 많고, 쓸 것도 많은데 게으름 피우고 있는 중이다. 올해 두 권 이상을 나올 것으로 본다. 《마운틴 오딧세이》도 다시 작업할 생각인데, 사실 전에는 할래야 할 시간이 없었다. 시나리오 때문에 시간을 많이 뺏기다 보니 그랬다. 이제 시나리오가 멀어지니까 정말 하고 싶은 글쓰기를 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하자면 시나리오는 쓰고 싶지는 않아도 돈을 많이 주는 작업인데, 산악문학은 돈은 안 되지만 정말 하고 싶은 글쓰기라고 할까,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글쓰기다.
장 - 산악문학이 뭔가, 심산의 언어로 정의해 보자.
심 - 영국이나 일본의 대형서점에 가면 벽면 하나가 산악문학에 관한 책이다. 일본이나 영국에서는 독창적으로 발전된 분야다. 등산은 사실 부르주아들의 것이었다. 먹고 살기 힘든 프롤레타리아들이 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선진국에 갈수록 산에 관한 책이 많은 법이다. 이제 우리나라 국민소득도 어느 정도 올라섰고, 등반 기록을 보더라도 산악문학이 자리를 잡을 만하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세계등반사'도 없는 상황이었다. 산악 강국들이 보면 웃기는 나라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2007년에 내 스승인 코오롱등산학교 이용대 교장이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를 내셨는데,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쓴 세계 등산사가 나온 것이다.
산악문학은 산에 대한 글, 등반 행위, 산과 인간 행위에 대한 글, 산 근처 지리에 관한 글 등을 포괄하는 굉장히 큰 개념이다. 스키나 트래킹 등 아웃도어 일반을 아우르는 넓은 분야다. 20세기 초반 극지 탐험에 관한 책들도 산악문학의 범주에 속한다.
최근 국내에도 이런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제주 올레나 강화 걷기 등의 책이 산악문학에 속한다. 육체적인 기록이면서 재미있는 다큐 분야이다. 영국에는 산악추리소설 분야가 따로 분류될 정도다.
장 - 공감대가 넓어진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생소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알리는 데 어려운 점은 없나.
심 - 최근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책도 많이 나왔다. 이제부터 국내의 좋은 필자들을 발굴하는 게 중요하다. 몇 해 전에 바다출판사의 자회사로 마운틴북스를 맡아서 일했는데 게으름 때문에 열심을 내지 못했다. 지금에사 그때 내기로 했던 책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
장 - 산악문학이라고 하지만 다양한 문화 현상과 접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부분에 대한 구상도 하고 있지 않나.
심 - 문학에 한정하지 않고 영화와 미술, 음악 등으로 저변을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산악문학은 내가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수준이지만, 와인에 대해서는 와인 전문가보다는 내공이 깊지 않다. 하지만 글쓰는 사람이니까 영화 속의 와인에 대해 더 재미있게 글을 쓸 수는 있다. 영화 속에서 와인이 어떤 의미로 나타나는가 하는 글은 이미 잡지에 연재한 분량도 단행본 한 권 분량이 넘는다.
또 하나 기획하고 있는 것은 ‘산 아래 와인’이라는 개념인데, 산 밑에서 만든 와인을 주요 테마로 다루는 것이다. 와인 강국인 프랑스와 이태리는 알프스 밑에 있고, 칠레도 안데스 산맥 아래 있다. 세계적인 와인밭들은 대부분 평지보다는 해발 400-400미터에 있는 것들이다. 이태리 피에몬테(Piemonte)는 풋 오브 마운틴(foot of mountain)이라는 뜻이다. 산의 발치쯤으로 해석할 수 있을 거다. 이태리 와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곳이 바로 피에몬테 와인이다. 이런 것들은 와인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산을 잘 아는 사람이 더 잘 쓸 수 있다. 산의 역사나 지형, 변화 등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을 꼭 해보고 싶다. 제일 좋은 것은 팔자가 좋아져서 몇 달씩 알프스를 트래킹하고, 놀면서 와인 마시고 쓰는 건데…, 하하하.
장 - 하하하, 곧 하지 않겠나. 지금부터 심산 선생 옆에 꼭 붙어 있어야겠다.
심 - 내 취미가 책상에 있는 지구본을 보면서 여기 가서는 뭐하고 놀까 궁리하는 거다. 내가 해외여행을 동년배보다 많이 다닌 편인데, 나는 진심으로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도시라고 생각한다. 서울과 북한산, 사실 북한산 때문에 서울이 생긴 건데, 도시에 바짝 붙어서 산이 있는 도시는 많지 않다. 파리도 허허벌판이고.
그런데 서울에 버금가는 멋진 곳을 발견했는데, 2년 전에 갔던 남아공 케이프타운이다. 딱 서울이더라. 도시 바로 뒤에 테이블 마운틴이 있다. 산도 수려하고, 암벽 등반 루트만 1,000개가 넘는다. 차로 30분만 가면 바로 바다다. 남아공 와인도 굉장히 좋은데, 케이프타운에 유럽 최고의 와이너리가 있다. 거기 내가 필요한 게 다 있더라. 산도 있고, 와인도 있고…. 산도 좋아하고 와인도 좋아하니까 와인과 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여행지를 짤 수 있다. 기존 여행사들을 못하는 일이니까, 이런 것들을 엮으면 새로운 여행지도 발굴하고, 책의 소재로도 훌륭할 것 같다.
올해 창고털이를 신나게 할 생각이다
장 - 이런 류의 책은 하나로 끝나지 않겠다. 이 인터뷰가 지면에 나오면 여러 출판사들에서 연락이 올 것 같은데….
심 - 뭔가 해야 하는데, 놀기만 해서….(웃음)
장 - 잘 노는 만큼 일을 잘 하면 되는 건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심 - “인생을 원래 불행한 것이니 우리라도 행복하게 살자”가 내 인생의 모토다.
나는 81학번인데,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서 시대가 그랬기 때문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올바르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그랬지만 운동을 주도했던 리더들도 사실 힘들었을 것이다. 말한 것이 있기 때문에 어쨌든 지켜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운동을 하면서 불행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 후반 운동권이 분열을 거듭하면서 난리법석을 쳤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운동권 세대는 큰 충격에 빠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살았던 거다. 그 즈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완전히 몰입할 뭔가가 필요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혁명가나 종교가들이 나를 따르면 행복할 거야, 라고 주장했지만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고 시니컬한 나는 별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짧은 경험이지만 살아보니까 자기가 행복하면 주변으로 전염된다. 기분이 좋아지고 그런 거지. 그래서 내가 행복해야겠다, 생각한 것이다. 내가 행복한 것이 조금 웃기고, 어쩌면 역설적으로 느껴지지만 세상에 도움이 되는 거다. 내 행복이 주변 사람으로 전염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 행복한 사람도 있고, 연애를 열심히 하면 행복한 사람도 있다. 이런 기준들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 나는 노는 게 행복하고 좋았다. 그래서 열심히 놀아야겠다고 생각한 거고, 행복해지겠다고 생각한 거다. 등산을 하는 것도 그렇고, 작년부터 제주도 올레를 걷고 있는데, 시골 마을을 걷다가 친구들과 와인 한 병 마시는 것도 행복하다. 이런 유쾌함이 책으로 만들어지고 밥벌이에 도움이 되는 다행이고….
장 - 그 행복을 오래도록 누리기 위해서는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있을 것 같다. 중장기적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마지막을 묻자.
심 - 일단 창고털이를 하고 봐야 한다. 올해 7권 정도 털고 나면 재고가 바닥나니까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할 생각이다. 물론 《마운틴 오딧세이》류의 책을 몇 권 낼 것이다.
아직 내 자신의 여행기를 써본 적이 없다. 자료도 많고 사진도 많은데 안 쓰는 이유는 새롭지 않아서 그렇다. 남들이 낸 책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망설였다. 이제 어떻게 쓰면 될지 알 것 같다. 외국에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재미있었다. 이런 형식을 취하면 독창적인 책이 되겠구나 싶어서 준비하고 있다.
1994년 이후 장편소설을 쓰고는 소설 근처에도 안 갔는데, 내 시간을 좀 더 확보하면 장편소설도 쓸 생각이다. 3-4년 후에는 장편소설 한 권 정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 할 게 너무 많은데, 할지는 모르겠다.(웃음)
세상 사람들은 심산을 시나리오 작가라고 부르지만 그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작가'로 규정했다. 수많은 글쓰기 중 하나로 시나리오를 선택했고, 그것으로 나름의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시나리오뿐 아니라 소설과 에세이, 때론 다큐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전천후 작가다.
그는 세상사에 연연하지 않으나 때론 시나리오로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기도 하고, 때론 후배의 시신 수습 여정을 적어 내려가며 인간의 숭고함을 전해주기도 한다. 천상 '작가'라고 할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심산과의 솔직하고 유쾌한 만남을 오래도록 가슴에 묻어두려 한다. 특히나 "같이 놀자"던 그이의 말은 더더욱 오래 남을 듯하다.
월간 <기획회의> 2010년 6월호
이 인터뷰는 아마도 지난 5월말쯤 진행된 것 같습니다
본래 북칼럼니스트 장동석 님이 뽑은 제목은 '산악문학: 출판의 새 장르를 개척하다'였는데
제가 임의로 '심산스쿨: 유쾌한 크로스-오버의 현장'이라고 바꾸었습니다
뭐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심산스쿨 이야기가 많아서...ㅋ
[기획회의]가 출판 쪽 지면이기 때문에
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뭐 그냥 그런가보다 하세요...
이 기사를 읽어보니 아, 빨리 책 내야지...하는 맘이 드는데
비는 추적추적 오고...일하기는 싫고...머리 속엔 온통 놀러갈 궁리 뿐이고...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