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 [마운틴 오디세이]를 읽으면서
[마운틴 오디세이-심산의 산악문학 탐사기](심산, 바다출판사, 2018)
안치운(연극평론가, 호서대 교수)
그제 심산 형의 전화를 받고, 주소를 알려주었더니, 어제 오후에는 이 책이 덜컹 박스에 담겨 왔다. 언제 읽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바빴다. 실은 지난 주 일요일, 인문산행 답사를 끝내고 우리 동네로 온 답사팀 뒷풀이 자리에 가서 이 책의 발간 소식을 처음 들었다. 월요일에는 우이동에 가서 호경필 형을 만나 지난 번 조문을 와준 것에 고마운 인사를 하면서, 이 책의 출간기념회 소식도 들었다.
처음에는 소파에 앉아 겉장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조금 후, 의자로 옮겨 와 한쪽 한쪽 읽어갔다. 책의 저자를 알고 있고, 책이 다루고 있는 산서들을 가지고 있거나 읽었던 바,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의 태도는 조금 복잡했다. 그가 읽고 쓴 책 가운데, 알고 있는 저자나 역자들도 꽤 있었다.
우선, 읽다가 멈출 때가 있었다. 서재 한 구석, 돌무덤처럼 쌓여 있는 산서들에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원본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아, 그래, 이 책이지...예컨대, 에르조그가 쓴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 같은 불어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이 레뷔파 책. 출간된지 오래된 터라, 1951년 초판의 겉장이 너덜너덜해진 채, 아주 낮은 곳에 누워있었다. 파리 씨테 섬 안에 있던 헌 책방이었을까, 세느강 옆 산서전문 책방이었던가, 기억이 분명하지 않았다.
약간 찢어진 이 책의 겉장을 넘기자, 이 책을 처음 구했을 때의 감동이 다시 스몰스몰 몰려왔다...숨을 좀 고른 후...아무튼 이 책을 읽은 후에야 리오넬 테레이, 가스통 레뷔파의 책들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던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최근에 리오넬 테레이가 쓴 [무상의 정복자], 그 번역본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어, 그가 쓴 책을 찾아보았고, 프랑스 국립영상자료원에 있는, 흑백으로 된 안나푸르나 등반영상들, 설맹으로 후송되는 모습 등을 담은 영상들, 생전의 인터뷰, 샤모니 산서 살롱에서 있었던, 테레이 책에 대한-친구들, 출판사 에디터가 참여한 토론영상 등도 볼 수 있었다. 모두 심산의 이 책 덕분이었다.
심산의 책으로 돌아가자. 우선 심산이라는 존재에 대한 매력이 어디서 솟아나는지 써야겠다. 학부에서는 불문학을 했지만, 도통 그의 말과 글 속에는 이런 흔적들이 없다. 나중에 그가 와인에 관한 책을 쓰고, 종종 배낭에 와인을 넣어와, 나누어 주면서 마시게 할 때를 보면, 그것만이 그가 불문학을 통해서 얻은, 망외의 소득이 아닌지 여겨졌다.
그 후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로, 학교를 운영하는 세월이 꽤 되었고, 산악문학에서 필명을 떨치는 바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는 생애 내내 불문학, 영화 쪽 보다는 산에 더 가까웠다. 아직까지 그는 가방을 손에 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는 늘 배낭을 짐처럼 짊어졌고, 그 안에 산서들을 넣어 읽었고, 그 안에서 산행의 의미들을 꺼내어 이웃들과 나누었다.
이 책 초판의 서문은 “북한산이 보이는 집필실에서”, 개정증보판의 서문은 “노고산 자락의 집필실에서”라고 쓴 것을 보면 그의 시선은 산을 향하고 있고, 그는 변함 없이 산에 안겨있다. 그가 살아온 여정들과 산에 남긴 자국들을 보면, 그는 전형적인 인문주의자이며, 한량 없는 자유주의자이다.
이런 모습은 그의 글쓰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산을 가장 잘 즐길 줄 알고, 그것을 제 삶과 분리하지 않는 행복한 딜레탕트이기도 하다. 그것이 참 부럽다. 이제 그런 그의 삶이 달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따스한 성징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태도의 산물이 이 책일 듯하다.
[마운틴 오디세이-심산의 산악문학 탐사기](바다출판사, 2018)를 받은 터라, 독후감을 써야 하는데, 자꾸만 독선감(讀先感) 같은 잡설을 이어놓고 있다. 우선, 그가 서문에 쓴 글 가운데 하나, “성기고 모난 글들을 얼기설기...”에서, 그의 글은 결코 모나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심산은 모난 사람이 아니다. 모난 사람이란 표현이 물론 나쁜 뜻은 아니지만, 심산의 글은 ‘에귀 디 미디’, 뾰족한 산봉우리 즉 침봉이라고 하는 에귀(aiguille)처럼 모나지 않고 언제나 물처럼 읽는 이 속으로 “스며든”(59)다(산에 관한 이 책을 ‘바다’라는 이름을 지닌 출판사가 받아내는 것처럼).
그의 책을 읽고 나서야 다시금 확인한 것이지만, 이 책에는 그만이 알고 있다는 것들을 나서서 진술하는 부분이 없다. 그것은 그가 겸손해서가 아니라 타고난 성징 덕분일 것이다. 그의 글은 언제나 “나의 산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59)라는 것으로 솔직하게 출발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실패와 꿈 꿀”(59) 권리를 잃지 않고자 하는 이의 소산이다. 대개 인문주의자이며 자유주의자들은, 심산이 스스로 쓴 것처럼, “방황하고, 게으름을 피우며...세월을 하릴없이 흘려보내”는 이들이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하는 이들이고, 그렇게 살기 위하여 공부하고 애를 쓰는 이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 않겠는가! 이 책 끄트머리에 있는 조 태스커의 [세비지 아레나]에 관한 그의 글 제목처럼, “성직자보다 치열하게, 히피보다 자유롭게”를 보면 단박에 그의 속내를 알 수 있다.
농담을 하자면, 그가 이 책 서문 말미에 쓴, “이제 두 번째 피치를 향하여 힘차게 첫발을 내디딘다”라는 표현은 다음 개정 신판에서는 고쳐져야 할 것이다. 그 동안 그를 믿고, 그의 강의를 듣고, 그의 글을 읽었던 이웃 동지들의 삶이 개종(改宗)과 같은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 건네는 인사말이기는 한데, 이 말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로서는 그가 “자기 확보와 같은 카라비너를 푸”는 것까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만, 한발 더 나아가 주억거리며 인정할 수는 있겠지만, “...향하여...힘차게...”와 같은 말들은 그가 분명 술의 여독에 빠져서 쓴 것이라고 본다.
그의 글과 책이 우리들에게 준 매혹은, 게으르고, 하릴없이 사는 것 같지만, 그것이야말로 누구나 제 삶의 몫을 제 방식대로 다하고 사는 것이라는 믿음이지 않겠는가! 1991년 지리산 뱀사골에서 삶을 잃은 고정희의 시 한 구절처럼, 누구나 제 삶의 무게를 등짐처럼 지고 산에 오르는 것처럼. 매혹이 위로가 될 때 “높고도 아름다운”(171) 것은 산봉우리만은 아닐 터.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도 “다시 등산화 끈의 매듭을 묶”는다.
통틀어 말하면, 심산의 이 책은 산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산에 가는, 산에 사는, 산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하여 산과 같이 영원하게 된 이들에 관한, 그들을 품고, 기억하는 책이다. 이 책은 산이 아니라 산의 사람에 관한 책이라고 감히 쓴다. 심산은 산을 배경으로 하고, 그 앞에 풍경처럼 놓인 사람들에 대해서 무한한 애정을 지니면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전체적인 서술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닐 듯한데, 그것은 이 책에서 산에 대한 묘사보다는 산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것으로 드러난다.
산보다 더 드높고, 산보다 더 너른 존재는 심산에게 언제나 사람이다. “짧은 숨결”의 주인공, “초월을 꿈꾸는” 이의 존재, “미친 젊은 날”의 그라는 존재, “고백하는 사나이의 정체”, “산에서 태어난” 이는 언제나 사람이고, 인간이다. 우정을 나누는 이나, 친구를 위하여 고행을 감수하는 이나, 산에서 좌충우돌하는 이나, 죽음과 맞서는 깨달음의 주체나, 산에서 방랑하는 이의 초상이나, 얼음벽 사이에 갇힌 존재나, 산장에서 별빛을 노래하는 이나, 엄마를 기억하는 이들이나, 산에서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말하는 대목에서나...공통적으로 심산이 보는 대상은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이다. 그 뒤에 산이 있다.
심산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붙여 죽음과 대면하려 하는지를 따지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이 곧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니까. 과연 현대 등반의 가치는 위험 그 자체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가?”(474)라고. 이렇게 그는 사람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젊은 날, 그가 꿈꾸었던 것은 배낭을 짊어진 영원한 “산악게릴라”(59)...이 책은 젊은 날 꿈꾸었던, “산에서 태어난 새로운 인간”(65)이고자 했던 한 산악게릴라의 사유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맙게 받은 책이라서, 여기에 짧게 감사의 글을 적는다.
다음카페 한국산서회
2018년 3월 21일
안치운은 내가 스스럼없이 “형”이라고 부르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프랑스 정부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파리에서 오랜 세월을 공부하며 보낸 연극평론가이다. 치운 형이 나의 신간 [마운틴 오디세이]를 읽고(사실은 읽어나가면서) 애정이 담뿍 담긴 독후감을 써줬다. 읽을 때마다 자꾸 미소가 지어지는 글이어서, 치운 형의 동의 따위도 받지 않고, 여기에 전문을 싣는다.
산악문학 분야에서 안치운은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열림원, 2003)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매우 아름다운 산문집인데, 나는 이 책을 읽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와 딸은 나와 같은 ‘연세대 불문과’ 출신이다. 그의 식구들은 불어에 매우 능통한데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오래된 프랑스 유학생 답게 그는 내가 [마운틴 오디세이]에서 다룬 책들을 불어 원문으로 읽은 모양이다.
치운 형의 독후감을 읽어보면 나 스스로 “정체가 탄로난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의 견해에 대부분 동의한다. 심지어 그의 “농담”에도 동의한다. “농담을 하자면, 그가 이 책 서문 말미에 쓴, “이제 두 번째 피치를 향하여 힘차게 첫발을 내디딘다”라는 표현은 다음 개정 신판에서는 고쳐져야 할 것이다. 그 동안 그를 믿고, 그의 강의를 듣고, 그의 글을 읽었던 이웃 동지들의 삶이 개종(改宗)과 같은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 건네는 인사말이기는 한데, 이 말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로서는 그가 “자기 확보와 같은 카라비너를 푸”는 것까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만, 한발 더 나아가 주억거리며 인정할 수는 있겠지만, “...향하여...힘차게...”와 같은 말들은 그가 분명 술의 여독에 빠져서 쓴 것이라고 본다.“ 술의 여독에 빠져서 쓴 것, 맞다(ㅎㅎㅎ).
아마도 치운 형은 내가 다시 암벽등반이나 고산등반 따위에 매달릴까봐 걱정해주시는 것 같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 사실 나의 경우 ‘고도’나 ‘난이도’에 대한 집착은 40대 중반을 통과하면서 거의 버렸다. 능력도 안되거니와 관심도 없어진 것이다. 현재 나의 관심은 ‘깊이’에 있다. 그것은 아마도 산악유산들에 대한 ‘역사와 문화’에 해당되는 것들이리라. 조만간(올해 5월~6월) 출간될 나의 신간의 제목은 [마운틴 오디세이-깊은 산의 초대]이다. 그 이후에는 ‘인문산행 시리즈’를 집필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맨 먼저 나올 책은 [인왕산 인문산행]이 될 것이다.
“이제 두 번째 피치를 향하여 힘차게 첫발을 내디딘다”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인사치례로 한 말이다. 아무래도 이 책의 독자가 대부분 산악인이거나 등산애호가일 터이기에 괜히 폼 잡고 쓴 표현일 따름이다. 그 말장난이 치운 형의 매서운 눈에 들켜버린 셈이다. “자기확보의 카라비너를 풀고, 이제 두 번째 피치를 향하여 힘차게 첫발을 내디딘다”라고 썼지만, 그 두 번째 피치는 ‘고도’와도 거리가 멀고 ‘난이도’하고도 거리가 멀다. 도무지 그 척도를 제시할 수가 없는 ‘깊이’와 관계된 것이리라.
현재의 내가 산에 대하여 품고 있는 화두는 대략 이런 것들이다. 산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에게 산이란 무엇인가? 산신(山神)이란 무엇인가? 신앙과 종교는 어떻게 다른가? 무교 혹은 무속이란 무엇인가? 불교의 유래는 우리의 산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유교의 득세는 우리의 산하를 어떻게 망가뜨렸는가? 산과 풍수지리와 기(氣)의 관계는? 산경표적 국토인식의 유래는 어떻게 되는가? 조선시대의 유산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등. 공부할 것도 너무 많고 답사할 곳도 너무 많아 행복한 비명이 절로 나온다.
애니웨이,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치운 형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형, 다정한 글 고마웠어요. 앞으로 서울 시내의 나지막한 산자락에서 자주 만나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