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세계등반사
이용대,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 마운틴북스, 2007
심산(심산스쿨 대표)
본격 산악문학 전문출판사를 표방하고 나선 마운틴북스의 첫 번째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이용대의 역저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이하 [알피니즘])가 그것이다. 한 출판사의 고고지성(呱呱之聲) 치고는 참으로 당당하다. [알피니즘]은 황량한 광야에서 쩌렁 쩌렁 울려퍼지는 예언자의 목소리요, 평생을 산에 바친 한 노익장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외치는 사자후이다. [알피니즘]의 출간은 한국등산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기념비적인 쾌거다. 이 책의 출간과 더불어 이제 우리는 단순한 등반 강국에서 명실상부한 산악문화의 강국으로 당당히 진입하게 되었다.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세계등반사가 갖는 의미는 이토록 크다.
이용대의 [알피니즘]은 몇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첫 번째는 그것이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세계등반사’라는 점이다. 글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한글로 쓰여졌다는 것은 곧 한국인의 시각과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 역사란 객관적인 사실의 나열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모든 역사책에는 나름대로의 사관(史觀)이 있다. 이른바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도 그 사관에 따라 서로 다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보다 깊이 파고 들어가 보자.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영어권 사람들은 대개 월터 언스워드(Walter Unsworth)의 사관에 따라 세계등반사를 파악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등반사는 당연히 영국 중심이다. 정통 산악인 출신으로서 영국의 BBC와 더불어 등반사와 다큐멘터리 방송을 동시에 내놓은 크리스 보닝턴(Chris Bonington) 역시 이러한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프랑스인들이 읽는 세계등반사는 로제 프리종-로슈(Roger Frison-Roche)의 것이다. 그의 저서에서는 당연히 프랑스 산악인들이 중심에 배치되어 있다. 이탈리아인들이 최고로 내세우는 등반사는 물론 스테파노 아르디토(Stefano Ardito)의 것이다. 이 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내는 산악인들이 어느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을지는 불문가지이다. 독일인이 쓴 세계등반사의 주역은 독일인이고, 미국인이 쓴 세계등반사의 주역은 미국인이다.
이용대의 [알피니즘]은 이러한 편향과 한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알피니즘]은 월터 언스워드가 굵은 활자로 기록한 등반 기록을 일부러 빼기도 했고, 로제 프리종-로슈가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한 역사적 사실을 단 한 줄의 기록으로 치환시켜 간단히 넘어가기도 한다. 한때 세계 각국의 등반사를 탐독하며 그것의 비교 분석에 열중했었던 나로서는 이용대의 이 놀라운 균형감각과 냉철한 가치 판단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이용대는 한글로 된 세계등반사를 기록함에 있어서 저마다 알피니즘의 종주국임을 자처하고 있는 나라의 등반사학자들이 본의 아니게 저질렀던 과장과 과소를 적절하게 바로 잡았다. 그것이 한글로 된 세계등반사 [알피니즘]이 우리에게 선사한 최고의 가치이다.
둘째, [알피니즘]은 한국등반사를 세계등반사 안에 배치했다. 사실 이 책에서 한국등반사를 다룬 분량은 극히 미미하다. 다만 세계 산악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 즈음 한국의 산악인들은 어떤 등반을 하고 있었는가를 냉정하게 진술할 뿐이다. 덕분에 우리는 [알피니즘]을 통하여 우리 등반의 역사를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용대는 이 어렵되 피해갈 수 없는 작업을 매우 조심스러운 시도로 수행해냈다. 등반 분야에서건 학문 분야에서건 첫 발자욱이 중요한 법이다. [알피니즘]은 한국등반사를 객관적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로 기억될 것이다.
셋째, [알피니즘]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 책에 실려 있는 원고들은 애당초 월간 [마운틴]에 연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재 초기의 글들을 보면 대단히 건조하고 딱딱하다. 아카데미즘에 기대어 등반 사실의 냉정한 기록에만 치중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연재의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이용대는 저널리즘적 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매우 가치 있는 등반이라면 그 등반 과정에서 벌어진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상세히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원고들을 수정 보완하여 [알피니즘]으로 묶을 때에는 이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된 태도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찾아냈다. 즉 전문가는 물론이거니와 일반인들도 흥미를 잃지 않고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대중적인 학술서’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뒤돌아보니 이용대가 걸어온 길이 참으로 아스라하다. 온통 바위와 눈 그리고 얼음으로 뒤덮힌 칼날능선 위에서 절묘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거침없이 내달아 그는 우리에게로 왔다. 그가 자신의 전생애를 쏟아부어 우리에게 안겨준 귀한 선물이 바로 [알피니즘]이다. 일찍이 ‘공부하는 산악인의 전범’으로서 우리 후학들을 부끄럽게 하고 끊임없이 자극해왔던 이용대가 자신의 칠순에 이르러 그 대장정의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장엄한 광경이다. 열정적인 노산악인의 노고 앞에 넙죽 엎드려 큰 절을 올린다.
월간 [MOUNTAIN] 2007년 10월호
그리고 나서 각종 인터넷 서점에 서평을 올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