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대하는 네 가지 태도
심산(심산스쿨 대표)
아마도 선인봉 남측 오버행에 매달려 있을 때였던 것 같다. 판판 놀다가 매달린 바위니 옛날 솜씨 같은 게 나올 리 없다. 체중을 못 이기고 근육 힘도 딸려 바들바들 떨며 겨우 한 피치를 끝내니 그때까지 확보를 봐주던 산선배가 피식 웃는다. 야 산아, 넌 왜 산에 오냐? 나는 그저 단순한 핀잔인줄 알고 바로 꼬랑지를 내렸다. 미안해 형, 요새 운동을 안했더니 몸이 완전 쌀자루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빙긋 미소를 띄우며 다시 물었다. 그게 아니라, 네가 산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조금은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산에 다니는 인간들은 산에 오르는 이유 따위를 따지지 않는다. 산에 오르는 이유를 따지는 사람은 산에 오르지 않는 사람들뿐이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분은 풍수지리며 사주명리학 등에 밝아 이따금씩 지관(地官)의 역할도 맡아 하셨던 분이다. 이분이 산에 오른 것은 오직 어느 곳이 좋은 묏자리인가를 따지기 위함이었다. 그런 분이 보시기에 막내 손자놈의 등산이라는 것은 한낱 헛짓거리에 불과하다. 할아버지는 늘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냥 올라갔다 내려올 산을 뭐하러 올라가냐?
사실 그때에도 내게는 답이 있었다. 단순하지만 솔직한 답이다. 재미있어서요.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뭐가 재미있냐고 반문한다면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다. 재미에 대한 취향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내려올 산을 왜 올라 가냐?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실 우습다. 그것은 마치 꽃에게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너는 어차피 질 꽃인데 왜 피었냐? 더 나아가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치환될 수도 있다. 당신은 왜 사는가? 어차피 죽을 텐데.
그래서 산에 다니는 사람들끼리는 왜 산에 오르느냐고 서로 묻지 않는다. 그저 어떤 산을 어떤 방식으로 오를 것인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그런데 산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외의 질문이 비수처럼 가슴을 후벼 판다. 내가 답변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자 산선배는 다시 선등(先登)에 나서며 해괴한 화두(話頭) 하나를 툭 던져놓았다. 누가 그러던데 네 가지 타입이 있다더군. 등입유서(登入遊棲), 너는 어느 쪽이야? 그날 이후 나의 뇌리에는 ‘등입유서’ 네 글자가 또렷이 각인되었다. 각 글자마다 사자성어를 이루고 있으니 도합 16음절의 한자어다.
얼마 후 나는 전각(篆刻)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것을 새겨보리라 마음먹고 나의 전각노트에 ‘사산론(四山論)’이라고 써놓았다. 이른바 ‘산을 대하는 네 가지 태도’다(이 글을 쓰기 위하여 이 사자성어들의 출전을 찾아보았다. 혹시 [논어]나 [중용] 같은 중국 고전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조용헌살롱]이었다). 첫째는 등산득명(登山得名), 곧 ‘산에 올라 이름을 얻는다’는 뜻이다. 둘째는 입산수도(入山修道), 곧 ‘산에 들어가 도를 닦는다’는 뜻이다. 셋째는 유산풍류(遊山風流), 곧 ‘산에서 놀며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다. 넷째는 서산자족(棲山自足), 곧 ‘산기슭에 깃들어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산다’는 뜻이다.
사산론은 산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다. 당신은 산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높은 산에 올라 이름을 떨칠 것인가? 깊은 산에 들어 도를 닦을 것인가? 산에서 놀며 풍류를 즐길 것인가? 산기슭에 기댄 소박한 삶에 스스로 만족할 것인가? 산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곧 삶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일 수도 있다. 당신은 왜 사는가? 유명해지기 위하여? 득도하기 위하여? 놀기 위하여? 다만 살기 위하여? 나는 생각한다. 정답은 없다. 우열도 없다. 어쩌면 개성의 차이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개성이야말로 곧 그의 삶이다.
사산론에 비추어 나의 산력(山歷) 혹은 삶에 대한 태도를 들여다본다. 등산득명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사람은 아마도 에드워드 윔퍼나 라인홀트 메스너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등반에 경의를 표하지만 부러워한 적은 없다. 나 역시 언젠가 한국의 대규모 히말라야원정대에 참여한 적이 있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입산수도의 분야는 아무래도 종교적인 색채를 띈다. 위대한 종교는 대체로 깊은 산 속에서 잉태되었다. 이른바 산상수훈(山上垂訓)이다. 하지만 진화론자이자 유물론자인 나에게 종교의 세계는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공중부양을 하거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산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 생각은 없다.
한참 바위에 빠져있을 때 그것이 곧 입산수도라고 여긴 적도 있었다. 하긴 남들이 이미 개척해놓은 바윗길을 따라 오른다는 것에 달리 무슨 의미를 덧붙이겠는가? 그 길을 오른다고 해서 이름을 떨치는 것도 아니고 인류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다. 바위 삼매경에 빠져들면 혼탁했던 정신과 마음이 맑아진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생각 자체를 안 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명상의 가장 높은 단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운동을 게을리 하여 ‘몸이 쌀자루’가 되면서 그마저도 물 건너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바위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저 좋아서 하는 일에 입산수도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도 낯 뜨거울 따름이다.
서산자족의 분야야말로 내가 오르지 못할 경지다. 산 속에 작은 집을 하나 짓고 텃밭도 가꾸고 약초도 캐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 모든 도시인들의 로망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그릇이 못된다. 나는 인터넷과 24시간 편의점과 심야술집에 중독되어 있다. 남은 여생을 산속에서 자족하며 살아갈 자신이 없다. 나는 아마도 지금 살고 있는 도심 한 복판의 주상복합건물에서 더러운 공기를 마시며 죽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적용 가능한 사산론은 이제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은 유산풍류, 곧 산에서 놀며 풍류를 즐기는 것이다. 내가 다시 바위를 한다 해도, 히말라야에 오른다 해도, 본질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왜 산에 가는가? 유명해지기 위해서도 아니고, 득도를 하거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말년에 살 집터를 보아두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냥 놀기 위해서다. 노는 게 좋아서다.
나이가 들면 많은 것이 변한다. 예전 같았으면 남세스러울지도 모를 이 대답이 이제는 편안하다. 당신의 동의를 구할 생각은 없다. 어쩌면 당신은 나의 태도를 폄하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나다. 산을 대하는 나의 태도이며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 당신의 태도는 무엇인가? 당신은 산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당신은 왜 사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6월호 제57호
이제는 '내가 쓰고 싶을 때,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쓰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랬더니...하염없이 놀기만 하고 아예 글 쓸 생각조차 안한다...ㅋ)
그런데...[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이인우 편집장에게 져버렸다
그는 1998년 나와 함께 [한겨레]의 사사(History of Company)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을 함께 쓴 '공저자'다
더구나 최근에는 심산스쿨 내혜전각반에서 함께 돌을 파는 도반이 되었다
그러니..'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던 셈이다...ㅋ
(...그래서 결국 백만년만에 '글'이라는 것을 써봤다)
위의 글 속에 나오는 [사산론]...조만간 전각으로 새겨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