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4-09-17 18:44:59 IP ADRESS: *.139.1.130

댓글

2

조회 수

3287

[마운틴 오디세이-세계 산악인 열전](1/37)


과학적 근대 등반의 아버지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


1얼굴.JPG

Horace-Bénédict de Saussure(1740-1799)


소쉬르의 전공은 철학과 물리학과 광물학이었다. 그의 유명한 초상화를 보면 오른손에는 피켈을 쥐고 있고, 왼편에는 기압계 혹은 망원경으로 보이는 물건이 놓여 있다. 편안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지만, 눈길은 저편 어딘가 높이 솟은 산봉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앙다문 입술과 강건한 턱이 몹시도 인상적이다. 그는 행동하는 학자였으며 공부하는 산악인이었다. 그의 학문과 등반은 중세적 미몽을 타파하여 있는 그대로의 산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산은 예로부터 푸근하고 자애로운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모든 산에는 산신山神이 있고, 그가 산 아래 사는 우리들을 지켜 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히말라야 자락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거대한 산들은 경외의 대상이었고, 신성불가침의 지역이었으며, 종교의 발상지였다. 어떤 면에서 히말라야는 그 자체를 하나의 종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불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힌두교 등은 자신들의 성지로 히말라야를 꼽는다.


그런데 유독 유럽에서만은 사정이 달랐다. 유럽인들은 중세 이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알프스에는 악마가 산다고 믿었다. 이러한 태도가 4,000미터 남짓 되는 특정한 고도 때문에 형성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쩌면 이것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찌 되었건 그들에게 있어서 알프스란 악마가 살고 있고, 이 머무는 곳(용은 서양인들에게 불길한 상징이다)이며, 때때로 벼락과 눈사태를 일으켜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한마디로 그곳은 두렵고, 추악하며, 불편한 존재처럼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근대 등반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무지몽매한 미신들이 타파되어야 했다. 알프스 초기 등반사에서 그토록 많은 과학자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교적 광신과 불합리한 미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들이 알프스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학문적 연구였다. 실제로 그들은 알프스에 오르면서 빙하를 연구하고, 지질을 탐색하고, 기압을 측정했다. 근대 등반의 여명을 밝힌 이들 과학자들 중에서도 단연 첫 손가락에 꼽혀야 될 사람이 바로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Horace-Bénédict de Saussure, 1740~1799).


1재등.JPG

소쉬르가 1787년 몽블랑 재등에 나섰을 때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로프, 스틱, 사다리 등을 들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재등은 몽블랑 초등 1년 후에 이루어졌다.


소쉬르는 스위스 제네바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학자였다. 그는 열네 살 때 이미 대학에 진학했는데 이후 열여덟이 될 때까지 제네바 근교의 산들을 모두 섭렵할 정도로 왕성한 모험심을 가진 청년이었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대학교수직을 얻을 목적으로 태양열에 관한 물리적 추론이라는 자연과학 논문을 제출하고 나자 약간의 짬이 생겼다. 그가 스위스를 벗어나 알프스 저편의 프랑스 샤모니를 방문한 것은 이즈음이다.


오늘날 알프스 최고의 산간 도시로 손꼽히는 샤모니는 그때까지만 해도 인적이 드문 산골 오지 마을에 불과했다. 소쉬르는 프레방(2526미터)의 정상에 올랐다가 바로 코앞에 거대한 성채처럼 우뚝 솟아 있는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4807미터)을 보고 넋을 잃는다. 몹시도 흥분한 그는 저 산의 정상에 제일 처음 오르는 사람에게 막대한 상금을 주겠노라고 공언한다. 1760년의 일이다.


하지만 현상금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15년 동안 몽블랑 정상에 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전에도 알프스 자락을 오르내린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대체로 수정 채취업자, 영양 사냥꾼, 약초꾼, 군인, 수도승 같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종교적 혹은 군사적 목적이나 생활의 방편으로 마지못해산에 올라야만 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다른 이유는 없고 오직 산에 오르기 위하여산에 오른다니, 그것도 대악마가 버티고 있는 몽블랑에 올라야 한다니 선뜻 지원자가 나섰을 리 없다.


몽블랑의 초등은 소쉬르가 상금을 내건 지 꼭 16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샤모니의 수정 채취업자 자크 발마와 마을 의사 미셸 파카르가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이 몽블랑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당시만 해도 세상을 뒤흔들 만한빅뉴스였다.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온 그들을 둘러싸고 빗발치듯 질문을 던져 댔다. 악마를 만났는가, 거기에 용이 똬리를 틀고 있지는 않던가 등등. 발마와 파카르는 기진맥진한 채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소. 저 위엔 눈과 얼음과 바위뿐이오.

엄청나게 추워서 동상에 걸렸소.

하지만 경치만은 정말 멋졌소!

 

알프스에 대한 중세적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다. 소쉬르는 물론 약속한 대로 그들에게 초등 상금을 지급했다. 그리고 알프스는 이제 인간이 오를 수 있는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계 등반사는 몽블랑 초등(1786)을 근대 등반의 시점으로 보고, 소쉬르를 과학적 근대 등반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1도구.JPG

오른쪽은 몽블랑 등정 당시 소쉬르가 사용했던 나침반이다. 왼쪽은 소쉬르가 집필한 <<알프스 여행기>>(4) 1권의 표지 사진이다. 1779년에 출간되었다.


소쉬르가 다만 상금을 내걸었을 뿐인 학자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듬해인 1787년 몸소 몽블랑 정상에 오른다. 몽블랑 재등 기록이다. 소쉬르는 정상에서 기압계를 이용하여 고도를 새로 측정했다. 그리고 3년 동안 제네바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알프스 지역을 여행하거나 산에 올랐다. 이미 알프스에 너무 깊숙이 빠져 버린 그는 어렵게 얻은 교수직마저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는 곧 알프스 여행기(1796)라는 네 권짜리 대저작 집필에 몰두했다. 집필에만 무려 17년을 쏟아부은 이 책은 18세기 알프스 지역에 관한 최고의 자료로 손꼽히며 특히 자연 경관에 대한 묘사들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소쉬르의 전공은 철학과 물리학과 광물학이었다. 그의 유명한 초상화를 보면 오른손에는 피켈을 쥐고 있고, 왼편에는 기압계 혹은 망원경으로 보이는 물건이 놓여 있다. 편안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지만, 눈길은 저편 어딘가 높이 솟은 산봉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앙다문 입술과 강건한 턱이 몹시도 인상적이다.


그는 행동하는 학자였으며 공부하는 산악인이었다. 그의 학문과 등반은 중세적 미몽을 타파하여 있는 그대로의 산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다. 오늘날 아무런 의심이나 두려움 없이 즐겁게 산에 오르는 모든 사람들은 이 위대한 근대 등반의 아버지에게 한번쯤은 경의를 표해야 한다.


몽블랑 초등자 자크 발마와 미셸 파카르

 

1동상들.jpg

프랑스 샤모니-몽블랑의 광장에는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와 자크 발마의 동상이 서 있다. 자크 발마가 가리키고 있는 곳이 몽블랑 정상이다. 심산이 2013년 투르 뒤 몽블랑(몽블랑 둘레길) 트레킹을 하기 위해 이곳에 들렀을 때 찍은 사진이다뒤늦게나마 소쉬르-발마 동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미셸 파카르의 동상이 세워졌다. 샤모니-몽블랑을 찾은 장난꾸러기 어린 아이들이 제멋대로 기어 올라 마구 놀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샤모니의 수정 채취업자 자크 발마Jacque Balmart와 마을 의사 미셸 파카르Michel Paccard의 이름은 1786년의 몽블랑 초등자로서 세계 등반사에 영원히 아로새겨졌다. 하지만 현상금이 걸려 있었고 희대의 스타가 되었던 일인지라 스캔들 또한 끊이지 않았다. 스캔들 최초의 발설자는 다름 아닌 자크 발마였다. 그는 명예를 독차지하고 싶었던지 이후 파카르는 피로와 설맹과 동상으로 정상에 서지 못했다고 떠들고 다녔던 것이다.


이 가설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역할이 크다. 1832년 샤모니를 찾아온 뒤마는 당시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유명한 가이드 자크 발마를 만나 그의 영웅담을 경청한 다음 그것을 글로 써서 발표했다. 대문호에 의해 각색(?)몽블랑 모험담이 얼마나 커다란 대중적 파급력을 발휘했을지는 불문가지다. 덕분에 샤모니 광장에 세워진 기념 동상의 두 주인공은 소쉬르와 자크 발마였다. 미셸 파카르의 이름과 역할은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진 것이다.


훗날이나마 이것을 바로잡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소쉬르의 미공개 일기였다. 당시 파카르는 소쉬르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몽블랑 초등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소쉬르가 그것을 고스란히 일기에 적어 놓은 것이다. 소쉬르의 일기에 따르면 파카르도 분명히 정상에 올랐을 뿐 아니라, 정작 상대방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크 발마였다고 한다. 등산이 추구하는 것이 무상의 가치라고는 하나 그것도 돈과 명예가 걸려 있으면 이런 식의 이전투구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싶어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하는 일화다.

 

김현중

2014.09.21 07:42
*.236.146.34

와~ 새로운 '열전' 시리즈를 시작하셨군요! 

예전에 선생님께서 쓰신 헐리우드 작가 열전과 충무로 작가 열전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름에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읽고 아직도 그 공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산 얘기를 읽으니 반갑네요. ^^

profile

심산

2014.09.22 12:48
*.139.1.130

흠...어쨌든 열혈독자 한명 확보!ㅋㅋㅋ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 산행은 첫껌 단물보다 달콤한 것 + 2 file 심산 2018-03-24 674
6 한국 산악문학의 청춘스타가 지다 file 심산 2018-03-20 747
5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산에 올라야 한다/레슬리 스티븐(1832-1904) + 1 file 심산 2014-10-08 2786
» 과학적 근대 등반의 아버지/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1740-1799) + 2 file 심산 2014-09-17 3287
3 온 세상의 산을 카메라에 담는다 + 3 file 심산 2006-03-23 6471
2 히말라야는 그의 존재이유이자 업보 + 2 file 심산 2006-03-19 5328
1 20세기 등반사의 영욕이 지다 + 1 file 심산 2006-03-09 6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