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머가 비즈니스맨이 된다면
이본 쉬나드,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라이팅하우스, 2020년
첨부/심산의 추천사
저는 졸저 ⟪마운틴 오디세이-심산의 알피니스트 열전⟫(바다출판사, 2014년)에 이미 이렇게 쓴 바 있습니다. “누가 어느 산에 올랐느냐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가장 인상적인 산악인인가? 누가 가장 성공적인 등반과 삶을 꾸려왔는가? 나는 자료 따위들을 모두 무시하고 내 마음 속을 깊이 들여다본다.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산악인은 누구인가? 과묵하고 겸손한 사나이 이본 쉬나드가 떠오르는 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234-235쪽).
이본 쉬나드가 ‘파타고니아(patagonia)’라는 회사에 대한 자신의 경영철학들을 밝힌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 출간 10주년을 맞아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과연 한 아웃도어 의류업체의 역사나 경영철학 따위가 재미있을까요? 놀랍게도, 그렇습니다. 등반과 사업을 관통하는 그의 생각들이 너무도 자유분방할뿐더러 혁신적이어서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멋진 사진들도 충분히 감상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아래에 본문들 중의 몇 구절을 올립니다. 이 책의 맨앞에 실려 있는 저의 추천사도 더불어 올립니다.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본문 중에서
기업가 정신에 관한 말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기업가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비행 청소년을 연구하라”이다. 비행 청소년은 행동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건 정말 엿같네. 난 내 방식대로 할 거야.” 난 정말 사업가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업가가 되려면 좋은 명분들이 필요했다. 다행히 나에게는 사업을 확장하더라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일은 늘 즐거워야 한다는 점이다. 일터로 오는 길에는 신이 나서 한 번에 두 칸씩 계단을 겅중겅중 뛰어올라야 한다.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입고 심지어는 맨발로 일하는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 유연한 근무로 파도가 좋을 때는 서핑을 하고 함박눈이 내리면 스키를 타고 아이가 아플 때는 집에 머물면서 아이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일과 놀이와 가족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야 한다. 기존의 규칙을 버리고 나만의 시스템이 돌아가게 만드는 창의적 경영은 나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 ‘역사’ 중에서)
기능 중심의 디자인은 대개 미니멀하다. 브라운의 디자인 책임자인 디터 람스의 주장처럼 “좋은 디자인은 최소한의 디자인이다.” 복잡하다는 것은 기능적 필요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신호이다. 1960대 페라리와 캐딜락의 차이를 예로 들어 보자. 페라리의 매끈한 라인은 고성능이라는 목적에 적합했다. 캐딜락에게는 기능적 목표 자체가 없었다. 캐딜락에는 엄청난 마력만 있었지, 그에 걸맞은 핸들도, 서스펜션도, 회전력도, 기체역학도, 브레이크도 없었다. 기능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디자인이 할 일도 없다. 그 차에는 거실이 고속도로를 지나 골프 코스로 옮겨지는 듯한 편안함과 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해서 뒤에는 지느러미가 달리고 앞은 부풀려진 기본적으로도 끔찍한 형태에, 번드르르하기만 하고 쓸모는 없는 온갖 종류의 금속 장식이 더해졌다. 기능성이 디자인의 지침 역할을 하지 않을 때면, 상상력이 미쳐 날뛴다. 괴물을 디자인하는 것이라면 그럴듯한 작품이 나올 것이다. ( ‘제품 디자인 철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등반 장비를 만드는 대장간이라는 우리의 근원이다. 그곳에서 일하던 자유사상을 품은 독립적인 등반가들과 서퍼들의 신념, 태도, 가치관이 파타고니아 문화의 기반이 되었고 그 문화로부터 하나의 이미지, 즉 사용하는 사람들이 직접 만드는 진정성 있고 질 좋은 제품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우리의 이미지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아웃도어 의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반가, 트레일 러너, 낚시꾼, 서퍼의 문화까지 아우르도록 진화했다. 그 중심에는 자연과 스포츠의 야생성을 지키겠다는 신념이 있다. 우리 직원들은 1950년대 신출내기 회사에서부터 내재했던 특정한 가치관과 신념을 계속 지키는 한편으로 또 다른 것을 끌어들였다. 환경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이다. ( ‘마케팅 철학’ 중에서)
우리는 큰 회사가 되기를 바란 적이 없다. 우리는 최고의 회사가 되기를 원하며, 최고의 대기업보다는 최고의 작은 회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제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다른 부분의 성장을 위해서 회사 한 부분의 성장이 희생될 수 있다. 이런 ‘실험’의 한계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그 한계 밖으로 빨리 확장해 나갈수록 우리가 원하는 유형의 회사는 더 빨리 사라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그 한계에 맞추어 사는 것도 중요하다. ( ‘재무 철학’ 중에서)
기억하라. 일은 재미있어야 한다. 우리는 풍성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사는 직원들을 가치 있게 생각한다. 우리는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하고 있으며 과거 대장간을 경영하던 시절부터 2미터짜리 파도가 올 때면 작업장의 문을 닫고 파도를 타러 갔다. 우리의 정책은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언제나 유연한 근무를 보장하는 것이다. 서핑에 매진하는 사람은 다음 주 화요일 오후 2시에 서핑을 하러 가는 계획을 잡는 게 아니라 파도와 조수와 바람이 완벽할 때 서핑을 간다. 스키는 습기가 없는 가루눈이 올 때 타러 간다. 좋은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언제든 바로 나설 수 있는 근무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라는 이름의 근무시간 자유 선택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 ‘인사 철학’ 중에서)
기업의 자연스러운 성장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작은 규모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최상의 소통을 확보하고 관료주의를 피하려면 한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100명 이하인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책임감을 느끼는 소규모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잘 운영된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규모가 작은 셰르파(Sherpa, 히말라야에 사는 부족. 등반 가이드나 짐 운반과 같은 일을 한다.–옮긴이)나 이누이트(Inuit, 캐나다 북부, 그린란드, 알래스카 등지에 사는 종족–옮긴이) 마을은 미화원이나 소방수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지역사회의 문제를 돌본다. 경찰도 필요치 않다. 동료들의 압력 속에서는 악한 마음을 갖기가 어렵다. 가장 효율적인 도시의 규모는 산타바바라, 오클랜드, 피렌체처럼 도시의 모든 문화와 편의 시설을 갖추고도 여전히 통제가 가능한 인구 25만에서 35만 정도이다. ( ‘경영 철학’ 중에서)
기업이 하기 힘든 일 중 하나는 가장 성공적인 제품의 환경적 영향을 조사하고,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 제품을 바꾸거나 그것을 진열대에서 치우는 것이다. 당신이 지뢰를 만드는 회사의 주인이라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각종 혜택을 주는 최고의 고용주이다. 하지만 지뢰가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느 날 당신은 보스니아나 캄보디아, 모잠비크에 가서 불구가 된 무고한 사람들을 보고 “지뢰가 이런 일을 하는구나!”하고 깨닫는다. 이제 당신은 제품이 진짜 하는 일을 안다. 이 상태에서 지뢰(담배, 패스트푸드) 사업을 그만둘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파타고니아도 우리의 이런 ‘지뢰’를 찾기 시작했다. ( ‘환경 철학’ 중에서)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소비하고 버리는 일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세계 경제가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죄인은 바로 우리다. 우리는 ‘써 버리고, 파괴하는’ 소비자이다. 우리는 필요는 없지만 원하는 물건들을 계속해서 사들인다. 우리에게 만족이란 없는 것 같다. 첨단 기술을 자랑하지만 위험성과 유해성이 큰 경제 시스템이 초래한 결과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광적인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모든 기술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기술 수준으로 돌아가 보다 단순한 삶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
현대 자본주의라는 거벽에 새로운 바윗길을 내다
심산(산악문학 작가, 심산스쿨 대표)
클라이머 쉬나드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가 주한미군 복무 중에 한국인 클라이머 선우중옥과 함께 인수봉에 낸 새로운 바윗길(쉬나드A와 쉬나드B)을 우리는 마르고 닳도록 올랐다. 우리 기억 속의 그는 ‘늘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산악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대장장이가 되어 세상에 없던 등반장비를 만들어 냈고, 요세미티 거벽등반(Big Wall Climbing)의 황금시대를 개척한 이들 중의 하나였으며, 히말라야의 미답봉들을 두루 섭렵한 다음에는 초등을 증명할 등반개념도 따위를 모두 찢어 허공에 날려버리는 파격을 일삼아왔다.
사업가 쉬나드는 우리에게 낯설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그가 만든 스토퍼와 헥센트릭을 쓰고, 블랙 다이아몬드의 캐러비너에 체중을 싣고, 너무 오래되어 색깔이 바랬으나 여전히 따뜻한 파타고니아의 재킷을 입고 오늘도 산에 오르지만, 그저 그러려니 할 뿐, 그를 사업가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쉬나드는 오랜 세월 동안 하나의 자일로 서로를 묶어 의지해왔던 까닭에 ‘언제라도 믿고 목숨을 맡겨도 될 맏형’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클라이머 쉬나드가 남긴 책이 ⟪빙벽등반⟫(1982)이라면, 사업가 쉬나드가 남긴 책은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2005)이다. 이 책의 개정증보판을 한국어로 읽게 되는 감회가 남다르다. 본래 클라이밍은 반(反)자본주의적인 것인데 반해, 비즈니스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클라이머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사업가로 성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아는 한 이 불가능을 가능토록 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본 쉬나드다.
이 책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에 진솔하고 간명하게 피력된 그의 철학들(디자인·생산·유통·마케팅·재정·인사·경영·환경)을 읽어보라. 도대체 자본주의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이런 류의 이상적인 철학을 관철시키면서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본 쉬나드는 바로 그런 ‘불가능한 일’을 성취하였다. 감히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 칭할만 하다. 사업가 쉬나드는 우리가 알던 클라이머 쉬나드와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는 ‘파타고니아’라는 전대미문의 사업체를 이끌며 현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벽(Big Wall)에 새 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