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트레킹과 알프스 트레킹
심산(작가, 심산스쿨 대표)
내가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90년대 초반 아내와의 신혼여행을 통해서였다. 최초의 행선지는 안나푸르나 지역이었는데, 안나푸르나 라운드도 아니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도 아니고, 그저 푼힐전망대까지 다녀온 것이 전부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 짧은 여정도 불치의 히말라야병(病)에 걸리기에는 충분했다. 그 첫 만남의 짜릿했던 경험 이후로 나는 한동안 거의 매년 겨울을 히말라야에서 보냈다. 때로는 가족과, 때로는 산행친구들과, 때로는 원정대원들과 히말라야의 이 계곡과 저 능선을 정신없이 쏘다닌 것이다.
광대한 대자연의 장엄미.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히말라야 트레킹의 매력이다. 그 엄청난 스케일의 파노라마 앞에 서면 나라는 존재는 한 없이 작아지고, 그렇게 작아지다가 끝내는 소멸해버려도 좋으리라는 야릇한 안도감마저 든다. 현대문명의 여러 이기(利器)들로부터 멀어져 단순한 육체적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역시 또 다른 매력이다. 해가 뜨면 일어나 걷고, 배고프면 먹고, 해가 지기 전에 걸음을 멈춘 다음, 행복한 피로감을 즐기며 잠 속으로 빠져든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누구나 갈 수 있다
풍부한 산행경험과 대단한 체력을 갖추어야만 히말라야 트레킹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입견 내지 오해에 불과하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누구나 갈 수 있다. 히말라야 지역에는 포터 시스템이 매우 잘 발달해있다. 그들이 당신의 짐을 옮겨다준다. 당신은 그저 작은 배낭에 당일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 룰루랄라 걸으면 그만이다. 서울 근교의 작은 산에 오를 때보다 배낭은 오히려 더 가볍다. 간식이나 물 따위야 배낭에 넣고 가겠지만 본격적인 식사에 필요한 음식이나 조리기구 따위는 모두 포터들이 짊어지고 가기 때문이다. 덕분에 중년을 넘어선 가정주부들은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서면 모두들 입이 헤 벌어지며 기쁨의 찬탄을 금치 못한다. 삼시세끼 남이 차려준 밥을 먹고 설거지 안 해도 되니까 너무 좋아.
히말라야 트레킹의 식사문제에 대하여 한 마디. 서양인 트레커들은 대체로 현지의 음식을 먹는다. 젊은 트레커들은 아예 집채만한 배낭에 자신들이 먹을 것을 모두 싸들고 오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의 시니어들에게라면 권할만한 방법이 못된다. 현지의 음식을 먹는 것도 한 두 번이다. 트레킹 기간이 일주일 이하라면 또 모르겠으되, 보름 혹은 한 달 가까이 지속된다면, 코리언 쿡(cook)을 고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코리언 쿡이란 한국인 조리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요리에 능한 현지인(네팔, 인도, 티베트, 무스탕 등)을 말한다. 특히 네팔지역에는 수도 없이 오고 간 한국원정대들 덕분에 음식솜씨가 매우 뛰어난 코리언 쿡들이 많다.
히말라야 트레킹의 시그니처 코스는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다. 이 두 코스에는 편의시설(숙박시설이나 식당 등)이 잘 발달되어 있어 불편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어찌 보면 트레킹 코스라기보다는 거의 관광지에 가깝다. 베테랑급 트레커라면 더 이상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초보 트레커라면 일단 이곳부터 졸업(?)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해서 일단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는 것에 대하여 감을 잡고 나면 이제 당신 앞에 무한한 코스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며 당신을 끊임없이 유혹하게 될 것이다.
내가 다녀온 곳들 중에서 추천하라면 일단 마나슬루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꼽겠다. 이 코스 최고의 매력은 단연 부디간다키다. 부디간다키(Budhi Gandaki)는 마나슬루(Manaslu, 8163m)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인데, 강(江)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좁으나 계곡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넓다. 나는 해발 4천미터를 넘는 곳에서 그토록 유장하게 흐르는 물줄기를 달리 본 적이 없다. 단언컨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본 가장 아름다운 강이다. 마나슬루를 나는 ‘구름공장(Cloud Factory)’이라 부른다. 그 아름다운 첨봉(尖峰)에서 끊임없이 구름들을 뿜어낸다.
당신이 야영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칸첸중가(Kanchenjunga, 8603m)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권한다. 이 지역에는 편의시설이 전혀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희미한 옛길의 자취와 밤마다 해일처럼 쏟아지는 별빛뿐. 덕분에 매일 밤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야 한다. 코스도 제법 길어 거의 3주 이상이 걸린다. 히말라야 트레킹 루트들 중에 가장 때 묻지 않은 코스가 아마도 이곳일 터. 그러므로 칸첸중가 트레킹에는 짊어지고 갈 짐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몫이 아니다. 네팔 혹은 인도 출신의 포터들이 그 일을 대신해 줄 것이다. 당신은 다만 지갑을 열어 그들에게 그에 합당한 노동의 삯을 지불하면 된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알프스 트레킹으로
2010년 전후를 즈음하여 나는 발길을 알프스로 돌렸다. 히말라야 지역을 거의 지겨울 정도로 쏘다닌 것도 하나의 요인이겠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본의 아닌 ‘가난의 전시’가 괴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지역의 국가들은 세계의 최빈국에 속한다. 덕분에 물가가 말도 안 되게 싸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트레커에게는 반가운 현상일지 몰라도, 나이 든 어른으로서는 마음이 편하지 않은 현장인 것이다. 나 자신이 마치 ‘가난의 갤러리를 배회하며 우쭐대는 부르조아 관람객’처럼 느껴지는 것이 싫었다.
알피니즘의 역사를 보아도 히말라야보다는 알프스가 우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알프스는 안중에도 없고 히말라야에만 그토록 집중한 것은, 박정희 시대가 낳은 ‘성과우선주의’의 우스꽝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높은 곳에 먼저 오르는 놈이 장땡”이었던 시절의 유물이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시대는 박물관의 먼지 쌓인 진열대에서도 치워진지 오래다. 등반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트레킹이라는 개념이 시작되고 크게 발전한 지역 역시 알프스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굳이 알프스는 제쳐놓고 히말라야만 고집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알프스 트레킹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제일 먼저, 히말라야에 비하여,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알프스 트레킹을 할 경우 대개 산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된다. 산장의 편의시설들(샤워실, 화장실, 침대, 식당 등)은 매우 만족스럽다. 최소한 서울의 3성 내지 4성 호텔급이다. 3성 이상의 호텔에 머물면서 당일 저녁식사와 다음날 아침식사를 제공 받는 데 그 비용이 대략 10만원 수준이라면 그 가격을 비싸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1박에 3천원도 안하는 히말라야의 롯지에 비하면 비싸다. 하지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이 다르지 않은가.
알프스 트레킹의 커다란 매력들 중의 하나는 음식과 와인이다. 산장에서 제공하는 음식이 서울의 웬만한 프랑스 혹은 이태리 레스토랑의 음식들보다 훨씬 낫다. 게다가 근사한 와인을 제값 주고 마실 수 있다(프랑스에서 3유로 하는 와인을 한국에서 사 마시려면 거의 6배에 달하는 3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알프스 주변의 국가들(프랑스, 스위스, 이태리 등)은 이른바 ‘서양의 선진국’들이다(최근의 코로나 사태를 생각하면 과연 그런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선진국에서의 트레킹 비용을 최빈국에서의 트레킹 비용과 단순비교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두 번째 오해는 “알프스에 가면 자기 짐을 모두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그랬다. 인건비가 그토록 비싼 나라에서 누가 내 짐을 대신 짊어질 것인가. 하지만 알프스에도 차량과 케이블카 등을 이용한 딜리버리 시스템이 정착한지 오래다. 즉 커다란 카고백에 짐을 잔뜩 넣고 가도, 당일 필요한 짐만 내 배낭에 챙겨 길을 떠나면, 딜리버리 서비스맨들이 그날의 종착지인 산장에 내 카고백을 옮겨다놓는 시스템이 생긴 것이다. 그 비용도 생각보다 그리 비싸지 않다. 그렇다면 배낭 메기가 무서워 알프스에는 못 간다는 옛날이야기는 이제 그만 접어도 되는 것이 아닌가.
알프스 트레킹의 시그니처 코스는 물론 투르 뒤 몽블랑(TMB, Tour du Mont Blanc)이다. 프랑스와 스위스와 이태리의 국경을 걸어서 넘는 아름다운 길이다. 당신이 알프스로 진출하려한다면 제일 먼저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곳곳에 깔끔한 편의시설들이 넘쳐나는 그림엽서 속 풍경과도 같은 길이다. 그래서 일단 알프스 트레커들의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면, 이제 눈을 돌려 알프스 전체의 숨겨진 트레킹 코스들을 들여다보라. 당신은 조금 더 건강에 신경 써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살아생전에 그 모든 매혹적인 코스들을 다 둘러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나는 2010년 이후로 거의 매년 여름을 알프스에서 보냈다. 알프스 자락의 3대 산악도시로는 흔히 프랑스의 샤모니, 스위스의 체르마트, 이태리의 쿠르마욜을 꼽는다. 대개의 트레킹 코스들은 이 도시들 중 하나 이상을 통과한다. 내가 가본 가장 아름다운 코스들 중의 하나는 투르 몬테로사(TMR, Tour Monte Rosa)다. 체르마트를 끼고 도는 이 코스에서는 마터호른(Matterhorn, 4478m)을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 알프스 전역은 스키장용 케이블카 노선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포진되어 있다. 체력이 부치는 사람은 차량과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다음 목적지까지 손쉽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장점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2020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