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작 [비트]를 다시 보다
2024년 3월 6일 재개봉을 자축하며
제게는 [비트]를 개봉하던 날(1997년 5월 3일)의 기억이 마치 어제의 일인 것처럼 너무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벌써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군요. 김성수가 연출하고 정우성이 주연을 맡은 [서울의 봄](2023년)이 메가톤급 히트(!)를 기록한 덕분에 이 오래된 영화가 다시 개봉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저는 그저 서울 시내 두세 곳의 극장에서 상영하겠지 했는데 전국에 걸쳐 무려 71개의 스크린을 잡았더군요. 그저 놀랍고 감사할 일입니다.
위의 사진은 [비트] 촬영본(Shooting Script)의 표지입니다.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는 책꽂이의 한 귀퉁이에서 찾아냈습니다. 어제 저녁에 극장에 가서 대형스크린으로 [비트]를 다시 보고 이것저것 예전 자료들을 뒤적이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고 있습니다. 영화를 만들 당시의 저는 30대 중반이었고, 그 영화 속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시기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입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모두가 ‘청춘의 나날들’이었습니다.
개봉 당시 [비트]의 광고(전단지)입니다. 민(정우성)과 태수(유오성)가 피카디리극장의 뒷골목에서 지포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는 장면입니다. 이강산 기사의 조명과 김형구 기사의 촬영이 그야말로 스타일리쉬하여 제가 매우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참고로 저는 10대 때부터 지금까지 지포라이터의 매니아입니다.
개봉 당시 [비트]의 리플렛입니다. 보시다시피 [비트]의 메인카피는 ‘박동하는 젊음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1542커트? 당시 한국영화의 평균 커트수는 600-800에 불과했습니다. [비트]가 완전히 혁명적인 시도를 한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김성수는 ‘편집 잘하는 감독’으로 유명합니다. 게다가 [비트]의 편집기사는 김현 선생님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그분을 거의 ‘편집의 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김현 기사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김현 선생님은 [비트]로 1998년의 백상예술대상 기술상(편집)을 수상하셨습니다.
저는 어둠 속에서 시작되는 [비트]의 첫 나레이션과 첫 이미지를 좋아합니다. “나에겐 꿈이 없었다. 열아홉살이 되었지만 내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저 매일밤 태수와 어울려 다니면서 근처 패거리들과 툭하면 싸움질을 벌였다. 그때는 그게 전부였다.” 그러면서 등장하는 첫 번째 이미지가 데니스 로드맨입니다. 민이가 입고 있는 반팔 티셔츠 뒤에 데니스 로드맨의 얼굴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습니다(위의 사진부터 아래에 나오는 스틸컷들은 [비트] 블루레이판에서 캡처한 것이어서 양옆과 위아래가 조금씩 잘려있습니다. 실제의 화면 사이즈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저에게 “[비트]는 어떤 영화야?”라고 물으면 저는 쉽게 답합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놓은 채 오토바이를 달리는 영화야.” [비트]의 주제? [비트]의 교훈? 그런 거 없습니다. 저는 영화가 무엇을 가르치려 들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비트]는 ‘열아홉살(부터 스물두살)의 풍경’입니다. 열아홉살이란 어떤 나이냐? 마치 눈을 감고 두 손을 놓은채 오토바이에 몸을 맡기고 달리는 것 같은 나이,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막막함과 절망감과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 혹은 위악적 포즈. 그게 제가 생각한 열아홉살이고, 그래서 이 장면이 [비트]의 키컨셉씬(Key Concept Scene)입니다(정확히 표현하면 키컨셉컷이지요. 요즘에는 시그니처 장면(Signature Scene)이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비트]의 또다른 키컨셉씬입니다. 이제 미성년자는 벗어나서 성년의 세계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정글짐 위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 남자(아이). 성년의 세계로 들어가 주류의 질서와 기득권의 논리에 적응해야 되겠지만 왠지 그러기는 싫은 나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는 소식이 끊기고, 그래서 울리지 않는 삐삐를 손에서 놓지 못한채 정글짐 위에서 일몰을 맞는 나이. 제가 떠올린 스무살의 풍경은 그런 것입니다.
키컨셉씬을 굳이 하나 더 꼽으라면 이것입니다. 민이가 교무실을 다 때려부순 다음 환규(임창정)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터널 속을 전속력으로 질주합니다. “속도감이 최고에 다다르면 세상은 고요해지고 하나의 점 속으로 빨려들어가. 하지만 저 소실점을 통과할 수는 없어. 다가갈수록 더 멀어지지. 로미야, 넌 지금 어디 있니?”(이 글을 쓰다가도 갑자기 그 시절이 생각나 울컥해지면서 가슴이 아립니다).
저는 시나리오 워크숍 시간에 ‘정서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비트]의 정서적 공간은 ‘정글짐 언덕’입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큰나무 언덕’이었습니다. 그런데 크랭크인 직후 김성수 감독과 홍대 앞에서 술을 마시다가 뜬금없게도 홍대 정문 맞은편의 소공원 안에 있는 정글짐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 위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며 낄낄대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나무보다 정글짐이 낫겠다.”
정글짐은 민이와 로미(고소영)에게 특별한 공간입니다. 노예팅에서 만난 민과 로미가 둘만의 데이트를 처음 한 장소가 정글짐 언덕입니다. 로미가 사라진 이후 민이가 홀로 찾아가 멍하니 앉아 있던 곳도 정글짐 언덕입니다. 로미가 뉴욕에서 돌아왔다고 거짓말(실제로는 정신병동에 갇혀있었습니다)을 한 뒤 재회한 장소도 정글짐 언덕입니다. 정글짐 언덕은 이제 두 사람이 약속하지 않아도 만나게 되는 ‘정서적 공간’이 된 것입니다. 정글짐은 아이들의 놀이공간, 철창에 갇힌 아이들, 세상 속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은 청춘 등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지포라이터 역시 [비트]의 중요한 소품들 중의 하나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제가 평생을 지포라이터 매니아로 살아온 탓(?)입니다. 나름대로 영화와 잘 어울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싸움할 때 지포라이터를 주먹 안에 쥐고 하시면 안됩니다. 손가락뼈가 으스러집니다(ㅎㅎ).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소품은 오토바이(CBR600)지요. [비트]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로케이션)은 정글짐 언덕이고, 가장 중요한 물건은 오토바이입니다. 다시 영화를 보니 정글짐 언덕도 오토바이도 참으로 요긴하고 알뜰하게 사용하였더군요(ㅎㅎ). [비트] 이야기를 하려면 ‘사흘낮 사흘밤’(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의 제목이기도 합니다)도 모자랄 겁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접어야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