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3-27 17:5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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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넥타이 매고 출근하면 여자는 남자를 배웅하고 집안일을 하는 아침이 지극히 순차적인 삶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불쑥 어른이 되었을 때 누구도 예외 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역시 막연하게 웃을 뿐이다. 하지만 보고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좀 달랐다. 짧은 만남, 짧은 이야기. 그러나 큰 이정표를 얻었다. 그처럼 살고 싶다(배선아).

큰 산 마음에 품은 자유로운 영혼, 심산

[img1]

재작년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TV다큐멘터리 한편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MBC 특별기획 [아, 에베레스트!]였다. 처음에는 더위를 겨냥한 편성물 쯤으로 여겨 화면 가득 눈 덮인 세계 최고봉의 아름다움이 펼쳐지려는가 싶었지만, 이내 대장 엄홍길을 선두로 한 ‘2005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 가 소개되자 아예 자세를 편히 고쳐 앉아 120분에 걸친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2004년 그곳에서 하산 길에 최후를 맞은 박무택, 백준호, 장민 세 산악인의 시신을 찾기 위한 과정이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 8750m, 일명 ‘죽음의 지대’를 배경으로 오롯이 그려졌다. 인터뷰 중에 알게 되었다. 그 18명의 원정대 안에 심산, 그가 있었다는 사실을. 저서 [엄홍길의 약속]도 그때 태어났다.

하고픈 일에 대한 재미와 열정

우리가 만난 곳은 한 와인바에서였다. 시인, 소설가, 시나리오작가, 영화평론가,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공동대표,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 운영위원장, 산악문학작가 등으로 다양한 커리어를 쌓아온(한 가지 더 첨가하자면 영화 [음란서생]에서 ‘신흥배급업자’라는 역으로 출연한 바 있는 단역배우까지) 그가 와인에도 심취해 있다는 소식을 지인으로부터 전해 듣고 나름대로 고르고 고른 장소였다.

“아, 와인요? 물론 아주 좋아하죠. 요즘에는 산에도 와인 들고 가요. 소주는 너무 독하고, 맥주는 이고 지고 올라가기에 너무 무거운데, 와인은 여러 모로 적당하거든요.  ‘알피니즘’이라는 단어가 시사하고 있듯이 근대적인 스포츠로써의 등산은 알프스를 중심으로 이태리나 프랑스 같은 국가들로부터 발달되기 시작했죠. 해외 원정 때 와인과 치즈를 들고 산에 오르는 건 낯선 일이 아니에요. 서울에서 마실 땐 신촌의 슬럼한 분위기나 안국동, 삼청동의 한옥을 개조한, 그 고풍스러운 와인바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와인하면 언뜻 럭셔리 쪽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막걸리가 있듯이 와인은 서구사회에서 아주 보편화된 술이거든요. 너무 비싸게 값이 매겨진 와인을 보면 어떨 땐 화가 다 난다니까요?(웃음)”

겉치례 없는 소박하고 솔직한 어투에 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 한 차례의 건배타임. 마주친 잔이 공명으로 부르르 떨린다. 사실 그는 단순한 와인애호가라기보다는 전문가에 가깝다. 와인의 기초부터 실무에 이르는 소믈리에 코스에 이어 와인 테이스팅과 과학적 원리를 배우는 마스터 코스까지 마쳤으니 말이다. 동시에 ‘심산스쿨’에 마련된 ‘심산와인반’에서는 직접 강단에 서기도 한다. 전문가 양성이 아닌 순수 애호가들을 위한 과정이다. 와인과 친해지고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무엇보다도 갖가지 와인을 함께 맛보는 즐거움이 있어 좋다.

그렇다고 그의 이름을 딴 학교에 와인반만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심산스쿨은 시나리오 학교이자 학파이며, 커뮤니티다. 한겨레문화센터 시절부터 독보적인 강의로 유명했던 그를 비롯해 노효정([인디언 썸머] 각본.감독), 박헌수([화산고], [싱글즈] 각본), 최석환([황산벌],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각본)과 같은 현업 작가들의 ‘시나리오 워크숍’, 김원익 박사의 [그리스 로마 신화반], 기자출신 탤런트 명로진의 [인디라이터반] 등이 개설되어 있고, 앞으로도 새로운 커리큘럼들이 속속 예정 중에 있다. 그 뿐인가. 각 기수의 학생들은 동문회와 스터디 그룹을 조직해 꾸준히 배움과 친목을 도모하고 있는가 하면, 음악에 뜻을 둔 지원자들이 모여 만든 [미안하다. 뺀드한다](‘밴드한다’가 아니라 ‘뺀드한다’가 밴드의 이름이다)라는,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아마추어 치고는 전혀 안 미안할 정도로 밴드하는’ 그룹도 목하 활동 중이다.

갑(甲)의 입장에서 주도하며 이끌어 나가는 삶

이렇듯 지성과 생기 넘치는 심산스쿨의 숨은 매력은 뭘까. 한 가지는 ‘하고 싶어 하는 일을 골라 하는 재미’다. 개설강좌의 기준은 대표 그 자신이 수강하고 싶은 과목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다행히 시나리오에서부터 예술사까지 다양한 주제 아래 빼어난 실력과 높은 식견을 지닌 인재들이 주변에 수두룩하다. 또 한 가지는 ‘일과 놀이에 대한 열정’이다. 문화란 쉽게 말해 사람들이 모여 재미있게 노는 것이라는 게 지론이다 보니 일과 놀이가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한데 재미라고 해서 무조건 가볍지만은 않다는 데에 또한 묘미가 있다. 일이든 놀이든 치열하게 재미있어야 하고 열정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노는 걸 너무 좋아해요. 글도, 와인도, 산도 그런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요. 2005년 초모랑마 원정대에 합류했을 때에는 단순히 노는 일로만 간 것은 아니었지만요. 산에서 죽은 동료의 시신을 구하러가는, 세계 등반 역사에 전례가 없던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어요. 초모랑마(Chomolangma)요? 아, 에베레스트의 티벳어에요. 떠나기 전에 유족을 만나고 왔는데, 참 잘 안 우는 편인 제가 그날은 많이도 울었어요. 부디 성공해서 가족들에게 유해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죠. 원정대 역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어요. 그러나 어렵사리 찾은 박무택이 100kg에 달하는 얼음으로 변해 결국 해발 8600m 지점 세컨드 스텝위에 돌무덤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고 돌아와야 했죠.”

[img2]

나는 누군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끊임없는 물음표로 삶도 머릿속도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 졌을 때 산은 경이로운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었다. 서른 살. 밥벌이와 관계없이 글을 써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교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갖은 문학상을 타내며 그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녔던 그가 아니던가. 갓 태어난 딸아이가 백일을 넘기자 아내도 서둘러 그의 산행에 동참을 했다. 그때부터 재미로 한 편 두 편 쓴 글이 모이고 쌓여 산서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필독서가 된 지 오래인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가 만들어 졌다. 그는 그렇게 산을 통해 정화되고 정제되었다.

“한 때 워커홀릭으로 살았어요. 99년부터였나. 한 3년간 매년 2만 5천매 정도 되는 원고를 썼죠. 징글징글했어요. 나중에는 원고지 더미에 깔려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 때 인생 모토가 ‘좀 덜 벌고 좀 더 놀기’로 바뀌었어요. 그러다가 ‘놀면서 벌자’로 진화됐죠(웃음). 처음부터 뜻대로 풀렸던 건 아니고 차차 그간 쌓아온 경력과 작품, 저서들이 뒷받침이 되어 주더군요. 특히 사람이 큰 재산이 되어주었죠.  뭐, 프리랜서든 월급쟁이든 살아가는 스타일은 각자 선택의 문제라고 봐요. 입맛에 맞는 와인이 있듯, 행복 또한 취향의 문제잖아요. 다만 그 대상이 무엇이든 제 자신이 항상 제 인생을 주도하는 ‘갑(甲)’의 입장에서 살아가고 싶어요.”

놀이하는, 그래서 매력적인 사람

문득 ‘놀이하는 사람’, ‘유희하는 인간’ 이라는 뜻을 지닌 ‘호모루덴스(Homo Ludens)’ 라는 라틴어가 떠오른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인 호이징가가  ‘인간이 여타의 동물과 다른 본질은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이 개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성급한 마음에 원고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지도 않았는데도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편다. ‘뭐 좀 재미있는 일 없을까?’ 그의 내공을 쫓아가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만으로 빙긋 웃음이 난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재미를 찾아 놀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놀 수 있는 삶. 어렵지만 명쾌하지 않은가. 글쎄,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오, 부디 이루어지기를.

글-배선아 인터뷰 칼럼니스트/사진-조항진 스튜디오 트라이앵글

[KSDi@n], 증권예탁결제원, 2007년 3-4월호

덧붙임: 얼마 전 이곳 홈피의 [심산서재>와인셀러] 게시판에 [존경하는 와인스승과의 한 컷]이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창간 예정이었던 럭셔리 남성잡지 [LUEL]에 실릴 기사 중 사진 한 컷을 올린 것이었는데요, 여차 저차한 사정으로 인해 그 잡지의 창간이 무기한 유보되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그날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스태프들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위의 글은 당시의 스태프들이 저와 관련된 부분만을 발췌하여 [케이에스디안]이라는 잡지에 실은 것입니다(낯 간지럽게도 인터뷰 칼럼 꼭지의 제목이 [향기 있는 삶]이네요)...^^...김준철 원장님과의 대담은 적당한 시기에 다시 이곳 게시판에 올릴 생각입니다. 사진을 찍어준 조항진 님, 글을 써준 배선아 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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