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 온라인 전각전을 시작하며
세월이 빠르다. 처음 철필(鐵筆, 전각용 무쇠칼)을 잡은 게 언제였던가 되짚어보니 무려 2011년이다. 그렇다면 벌써 서당 개도 풍월을 읊는다는 10년을 훌쩍 넘어선 셈인데, 여전히 창의(創意)는 아둔하고 포치(布置)는 성기며 칼놀림은 무디기만 하다. 하기야 잊을만하면 가끔 한 번씩 철필을 잡는 정도였고, 그나마 중도에 몇 년씩이나 낙백(落魄)한 사람처럼 살았으니 그 알량한 솜씨가 나아질 리 만무하다.
그 세월 동안 오직 나의 전각 스승이신 내혜 선생님 덕분에 몇 번의 소규모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심산스쿨 내혜전각반 동문회 전각무림(篆刻武林)의 이름으로 <공자전>(심산스쿨, 2012년)과 <노자전>(심산스쿨, 2013년)을 열었고, 내혜 선생님이 이끌고 계셨던 또 다른 전각동호회 석겸화개(石兼花開)와 전각무림이 공동주최한 <무위당 장일순 20주기 추모전>(한겨레신문사, 2014년)에도 참여했다. 분에 넘치고 민망하게도 화가 서용선, 서예가 강진구와 더불어 <매월당 김시습, 겸재 정선을 만나다>(겸재정선미술관, 2015년)라는 3인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 이후로는 오랫동안 전각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매우 우연한 계기로, 지난겨울부터 다시 철필을 잡게 되었다. 그저 가까운 지인들에게 낙관(落款)이나 하나씩 선물해 주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개(再開)했던 것인데, 하다 보니 어느덧 다시 재미를 붙여 하릴없이 전각자림(篆刻字林)을 들춰보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어느날 내게 전각선물세트(전각 실물을 액자에 넣어 박제한 것, 낙관의 이미지를 파일로 만든 것, 그 이미지를 무한히 찍을 수 있는 자동스탬프 등으로 구성된다)를 받은 한 지인이 그저 나 듣기 좋으라고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이참에 전각개인전이라도 한번 여시는 게 어때요?
나는 배를 잡고 웃으며 즉답(卽答)했다. 그럴 일 없다. 첫째, 나의 전각은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수준이 못 된다. 둘째, 어줍은 전시회를 연답시고 지인들을 오라 가라 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민폐다. 셋째, 전시회에 드는 시간과 노력과 비용(대관료, 액자 제작 등 디스플레이 관련 비용, 도록 및 보도자료 작성, 오프닝파티와 뒷풀이 등)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그 전시품들을 나중에 따로 보관하는 것도 버겁고 귀찮은 일이다. 이 견해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아마도 내가 오프라인 전각개인전 따위를 여는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듯하다.
그렇다고 그 제안이 전혀 무익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을 계기로 나는 그 동안 전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던 사안(전시회)에 대하여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된 것이다. 온라인 전시회를 하면 어떨까? 작품의 저열한 수준이야 오프라인이건 온라인이건 눙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을 오라 가라 할 필요도 없고 따로 비용이 발생하지도 않는다면, 굳이 온라인 전시회조차 마다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남들이 보고 상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지난 일 년 동안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 저 홀로 되짚어보고 저 홀로 즐거워 하면 그만이다.
<심산 온라인 전각전>은 이런 연유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이 <심산 온라인 전각전 2024>다. 2023년 11월 1일 이후 2024년 10월 30일까지 제작된 25개의 전각작품 이미지를 여기에 올린다. 별도의 행사 따위는 없고 그저 2024년 11월 한달 동안 심산스쿨 홈페이지의 메인화면에 올려놓는 것이 전시회의 전부다. 앞으로도 이런 온라인 전각전을 매년 같은 시기에 열 생각이다. 아마도 향후 내 대책 없는 게으름의 척도이자 즐거운 암중모색의 흔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2024년 11월 1일
심산
沈山. 심산. 심산의 인장. 130422. 해남석 파편 60×65×8(㎜).
심산 온라인 전각전 2024
2023년 11월 1일부터 2024년 10월 30일 사이에 제작한 전각작품들
崔梅花印. 최매화인. 최매화의 인장. 240208. 해남석 45×45×10(㎜).
沈靑波印. 심청파인. 청파 심종성의 인장. 240208. 해남석 45×45×10(㎜).
車. 차. 차무진의 장서인. 240208. 해남석 45×45×10(㎜).
車武辰印. 차무진인. 차무진의 인장. 240208. 해남석 45×45×10(㎜).
金柱暎印. 김주영인. 김주영의 인장. 240211. 해남석 45×45×10(㎜).
不可讀解 시리즈. 음차(音借)와 파자(破字)가 많아 독해 불가능. 240211. 해남석 파편 45×110×15(㎜).
沈洪 1955-2012. 심홍 1955-2012. 심홍의 생몰연도. 240211. 해남석 45×45×10(㎜).
寄心於石. 기심어석. 마음을 바위에 부치다 혹은 바위에 마음을 기대다. 240217. 해남석 45×45×10(㎜).
沈山藏書印. 심산의 사각형 장서인. 240217. 해남석 45×45×10(㎜).
鄭殷尙印. 정은상인. 정은상의 인장. 240222. 해남석 45×45×10(㎜).
崔恵媛印. 최혜원인. 최혜원의 인장. 240225. 해남석 45×45×10(㎜).
山阿眞隱前生願 雲水仙遊此日歡. 산아진은전생원 운수선유차일환. 산 언덕에 숨어 살기가 전생의 소원이었는데, 구름과 물 속에서 신선처럼 노니니 오늘의 기쁨일세. 김시습의 시 <십년>의 5행과 6행. 240225. 해남석 파편 180×100×18(㎜).
深山齋. 심산재. 깊은 산 속의 서재. 심산집필실의 당호. 240307. 해남석 파편 90×40×7(㎜).
安正姬印. 안정희인. 안정희의 인장. 240307. 해남석 45×45×10(㎜).
張永任詩. 장영임시. 장영임의 시. 240310. 해남석 45×45×10(㎜).
朴眞榮印. 박진영인. 박진영의 인장. 240321. 해남석 45×45×10(㎜).
美學者趙珠姸. 미학자조주연. 미학자 조주연의 인장. 240401. 미상석 60×60×20(㎜).
杌羅惠京. 올라혜경. 올라 이혜경의 인장. 240402. 해남석 45×45×10(㎜).
心山. 심산. 심산의 원형 장서인. 240403. 해남석 45×45×10(㎜).
잘 놀다 간다. 사후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카톡으로 발송될 심산의 사이버 부고장. 240824. 미상석 62×62×12(㎜).
老姑刻老. 노고각로. 노고산의 전각하는 늙은이. 심산의 아호. 240824. 해남석 파편 47×110×15(㎜).
山水大友. 산수대우. 산과 물은 큰 친구. “산과 물은 오랜 벗입니다(신영복).” 신영복 오마주. 240824. 해남석 파편 33×90×8(㎜).
登山意未休 理屩更滶遊. 등산의미휴 이교갱오유.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 그치질 않으니, 신발 고쳐 신고 또 즐겁게 놀아볼까나. 김시습의 시 <등산>의 2행과 8행. 240827. 해남석 파편 205×90×18(㎜).
新村客棧. 신촌객잔. 신촌의 술집 겸 여관. 심산작업실의 당호. 240827. 해남석 45×45×10(㎜).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나라는 부서지고 산하만 남아있네. 두보의 시 <춘망>의 1행. 241020. 해남석 파편 145×60×10(㎜).
索隱行怪. 색은행괴. 숨겨진 것을 찾고 괴이한 일을 행하다. .<중용> 11장에 나오는 공자의 말. 공자는 부정적인 뜻으로 말하였으나 심산은 긍정적인 뜻으로 새김. 241024. 해남석 파편. 38×1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