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9일, 그러니까 돌아오는 금요일, 심산스쿨에서 [조병준길글반 1기]가 문을 엽니다. 배너에 올린 강의 소개를 읽어봐도 도대체가 뭘 하자는 반인지 모호하지요?(ㅋㅋㅋ) 원래 조병준이라는 인간 자체가 모호(!)합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봤어요. "도대체 뭘 할 거야?" 조병준이 대답하기를..."글쎄, 우선 글을 얼마나 쓸 수 있는지 알아보고, 거기에 맞춰서 진행해야지. 하지만, 수강생들이 모두 다 동의한다면, 웬만하면 여행을 자주 다닐까 해!" 그리고 덧붙이기를..."여행을 떠나고 글을 쓰는 모임인데...답답하게 심산스쿨에 갇혀서 뭐할꺼야?"
아마도 그런 반이 될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여행과 관련된 에세이를 쓰는 반, 그리고 그걸 더 잘하기 위해 뻔질나게 여행을 다니는 반! 글쎄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나름대로 매력적인 반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저희 심산스쿨에서는, [조병준길글반 1기]와는 무관하게, 10월 25일(목)부터 2-3일간 경주여행을 하려고 합니다. 경주 남산에 오르고 경주의 왕릉들을 둘러보고 근사한 산장과 한옥집에 머무르며 술 마시고 놀자는 모임이지요. [조병준길글반 1기] 수강생들이 동의한다면 이 여행도 함께 해볼까 합니다. 전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수강신청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일이지요.
아래의 글는 [시사저널]의 후신, 정확히 표현하자면 [시사저널]의 적자, 더 정확히 규정하자면 [시사저널]의 청어람 [시사인]에 실린 조병준 관련 기사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쓴 차형석 기자와 사진을 찍은 한향란 사진작가 두 사람 모두 저희 심산스쿨 동문회원입니다. 뭐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그만큼 저희 심산스쿨의 레인지가 넓어졌다는 거지요. 거의 일종의 마피아 조직처럼 엉켜 있습니다(ㅋㅋㅋ). 지난 주에는 명로진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책만세]에서도 조병준의 신간들을 가지고 한 시간 동안이나 떠들었다더군요. 이 프로그램의 공식 방송일시가 잡히면 그것도 이 게시판을 통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참, 조병준 신간 출판기념 저자싸인-할인-통신판매 이벤트가 현재 진행 중입니다. 상세한 내용은 이곳 [여는글] 85번째 글을 참조하시고요, [조병준길글반 1기]를 통해서 많은 분들과 인연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럼, [시사인]에 실린 기사와 사진을 즐감...^^
배낭 속 ‘방랑 시편’ 15년 만에 세상보다
‘글 쓰는 남자’ 조병준은 최근 사진집 <따뜻한 슬픔>과
시집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을 동시에 펴냈다.
조병준은 조병준이다. 나이 마흔일곱의 이 남자. 그동안 한국방송개발원 연구원, 광고프로덕션 조감독, 자유기고가, 극단 기획자, 대학 강사, 번역가 등 여러 직업을 거쳤지만 어느 직함도 그의 이름 앞뒤에 ‘이거다 싶게’ 붙이기 어렵다. 불성실해서가 아니다. 직업만으로 그를 온전히 드러내기가 어려워서다.
1990년, 방송개발원 (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을 그만두고, ‘뭔가 있을 것 같았던’ 인도로 훌쩍 첫 배낭여행을 떠났던 즈음을 그는 “삶에 주눅 든 것 같은 시절”이었다고 표현했다. 한 달 계획으로 떠났던 여행은 석 달 반으로 길어졌다. 길에서 만난 수많은 방랑자들을 통해 그는 “사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을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여행가’라고 부르게 만든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여행가’라는 이름에 불편해 한다. 여행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데 직업을 여행가라고 표현한다니. 그는 ‘여행 작가’라는 수식어 또한 거북살스럽다. 글을 쓰기 위한 목적으로, 취재를 위해 여행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행은 그저 기호품 같은 삶의 일부이다. 돈을 벌기위한 여행은, 사절이다.
‘자원봉사자’는 어떤가. 조병준은 30대 시절, 10년 동안 인도와 유럽 등지를 여행했고, 약 2년 동안은 인도 콜카타에 있는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여러 책을 통해 독자들과 그 경험을 나누었고, 그 책이 씨앗이 되어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한국인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래서 책을 읽은 독자들은 조병준하면 ‘자원봉사’를 떠올린다.
‘원 웨이 티켓’을 끊고 떠난 여행길이었다. ‘가는 데 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떠난 여행길에서 만난 배낭족들은 인도 콜카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저 여행객들이 왜 자원봉사를 할까, 알아나 보자’고 호기심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는“그 경험은 자신의 모든 것이 튀어나오는 듯 한 경험이었다”라고 말한다.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만났다.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았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거기서 알았다. 몸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한 갓난아기를 안았는데, 그 어린아이가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보고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마음이 아픈 정도가 아니었다. 내 안의 마르크스, 혁명, 하느님, 신 등 모든 것이 튀어나오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서의 경험이 그의 삶을 바꾸었다. 사람들 사이에 처박혀 있는 행복을 느꼈다. 자원봉사가 없는 목요일이면, 자기로 침잠하는 고요함을 느꼈다. 이 생생한 경험은 글까지 바꾸었다. 글에서 ‘관념’의 ‘관’자도 생각하지 말고, 먹물기가 쪽 빠진 글을 쓰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토록 소중한 경험을 얻었는데, 자꾸 ‘평화’나 ‘선행’ ‘자유인’의 이미지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불편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자원봉사자’라는 호명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등단 15년 만에 첫 시집 펴내
글과 관련한 많은 일을 했고, 명함에 ‘글 쓰는 남자’라고 썼던 조병준이 아꼈던 이름이 있다. 시인. 1992년 <세계의 문학>에 등단한 이래, 15년이 넘도록 발표를 거의 안했지만 시(詩)는 ‘글의 출발점이자 고향’같은 것이었다. 밥벌이로, 가족의 병원비를 벌기위해 산문을 계속 쓰느라 시에 매달리지 못했지만, 올해 초부터는 시에 몰입했다. 이유? “산전수전 다 겪은 배낭족이 어느 순간부터 배낭이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늙는구나. 더 늦기 전에 시에 매달리고 싶었다. 오랫동안 묵었던 것을 털어내고 싶기도 했고, 새로운 것으로 넘어가고 싶기도 했고.”
시인 조병준에게는 친구가 많다. 길에서 만난 친구들. 그가 쓴 책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에 나온 것처럼 나이 불문, 국적 불문 친구들이 많다. 연극, 영화, 문학, 여행, 온갖 일을 하면서 맺은 인연들이 그를 아낀다. 이번에 그가 15년 만에 첫 시집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샨티 펴냄)을 펴낸다니, 그의 친구들이 앞장서 잔치를 열어주었다. 극단 무천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공연 기획을 함께했던 연출가 김아라씨와 젊은 예술가들이 지난9월15일 대학로 동숭교회 앞마당에서 그가 쓴 시를 대본삼아 시음악극을 열어주었다. 음악인 이자람씨가 노래를 부르고, 젊은 예술가들이 가야금과 중국 악기 얼후를 연주했다. 여행 틈틈이 찍은 사진과 쓴 시를 엮은 사진 아포리즘 <따뜻한 슬픔>(샨티 펴냄)을 동시에 출간한다는 얘기를 듣고 어떤 이는 사진 전시회를 열 조그만 카페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공연 개런티가 책 두 권’이 전부인 공연에 그의 친구 200여명이 모였다. 그의 사진과 시는 ‘기대고 부빌 등 없는 슬픔들을 생각’하고, ‘차가운 세상, 차가운 인생 복판에서 서성이는 슬픔들’을 들여다보는데, 친구들은 그곳에서 따뜻함을 느낀다. 책 제목 ’따뜻한 슬픔‘처럼.
매번 스케줄이 없는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그는 ‘계획 없는 삶’을 준비한다. 그의 블로그(blog.naver.com/joon6078)에 쓴 글처럼 ‘인생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누가 아는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년 3월 네덜란드로 간다. 2000년 초 산티아고 여행길에서 만난 부부가 초청했다. 7년 동안 연락을 해왔는데, 한국인 딸을 입양한 노부부는 올해 5월 한국에 왔다갔다. 그 친구의 60회 생일에 깜짝 손님으로 초청받아간다.
글을 쓰든, 공연을 하든, 여행을 하든, 아니면 그가 힘들 때마다 찾는 인도 콜카타에서 자원 봉사를 하며 빨래를 하고 있든. 그것은 그가 이 고단한 세상을, ‘조병준 식’으로 가로지르는 방식이리라. 그때도 조병준은 조병준이다.
[img2]글/차형석 기자
사진/한향란
[시사인] 2007년 10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