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반]이 곧 26기 수강생을 받아들입니다. 기수가 거듭될수록 책임감이 크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훌륭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그 시나리오가 제 값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다 제 마음 같지는 않아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시나리오작가에 대한 충무로의 대우는 정말 형편없는 수준입니다.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하여 정면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싸워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몫은 늘 제게 주어집니다. 아래는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와 한 인터뷰입니다. 그다지 즐거운 소식은 아닐지라도 우리 모두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할 일이기에 인터뷰 전문을 옮겨옵니다.
[img1]"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심산 영진위 인터뷰
글/김수경 기자
1990년대 일명 ‘한국영화 르네상스’시절의 간판 시나리오 작가. [식민지 밤노래]라는 시집을 냈고,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청년간사였던 심산은 어느 날 영화조감독협회와 축구시합을 주선했다. 뒷풀이 자리에서 누군가 시와 소설에 능한 그에게 시나리오를 한번 써보라고 제안했다. 그 술자리의 농담 같은 말 한마디가 한 문학청년의 인생을 단숨에 바꿔놓았다. 그 후 이성수 감독의 [맨발에서 벤츠까지](1991)를 시작으로 심산은 10년간 충무로 한복판에서 [비트](1997), [태양은 없다](1999) 같은 역작을 선보인다.
21세기 들어 심산은 시나리오작가보다는 오히려 시나리오 교육자로 더욱 이름을 떨쳤다. 한겨레문화센터 강의를 시작으로 심산스쿨에 이른 그의 후배 양성은 이미 1천명을 넘어섰다. 후진 양성은 교육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작법서 발간으로도 이어졌다. 수년간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저서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심산의 시나리오 워크숍]과 역서 [시나리오 가이][시나리오 마스터]가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2005년 시나리오작가조합의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고, 시나리오마켓 운영위원장을 병행하며 체계적인 시나리오 발굴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려 했다. 심산스쿨을 찾아가 그를 만났다. 2010년 한국영화의 시나리오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시나리오 ‘고수’ 심산에게 물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쓰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필모그래피는 [맨발에서 벤츠까지]가 처음이지만 입문 과정이 자세히 밝혀진 적은 없다.
우리 세대는 영화를 좋아했지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영화 제작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화했다. 이후 영화를 만드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당시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은 시나리오도 잘 쓸 수 있다는 오해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무혈입성’을 했다. 누구한테 시나리오를 배운 적도 없다. 확실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돈을 주는 글쓰기 계약은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노력에 비해 고료가 적은 것도 현실이지만.
[비트][태양은 없다] 이후에는 한동안 작품이 없었다.
10년 가까이 충무로밥을 먹으니 지겨워졌다. 다른 글을 쓰고 싶기도 했고, [비단구두]도 썼다가 까먹고 있었는데 뒤늦게, 2006년 개봉됐다. 내가 돈을 많이 밝혀서 꽤 많이 썼는데(웃음) 이상하게 영화화가 안 됐다. 계약하고 쓴 것만 30편 가까이 넘는다. 대부분 유명한 영화사, 알 만한 감독과 일했는데 엎어졌다. 그래서 나는 기본적으로 영화가 완성되면 굉장히 신기해하는 편이다. 안되면 ‘아 또 안됐구나’하고 별로 연연하지 않는다.
명망 있는 제작자, 감독, 작가가 함께 하는데 그렇게 자주 무산된 것은 제작 시스템의 문제라고 볼 수 있지 낳을까.
그건 사실 매우 복잡한 이야기다. 나처럼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누가 돈을 주면 일단 쓴다. 그래서 나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적이 거의 없다. [태양은 없다] 단 하나뿐이다. 그 팀이랑은 [비트] 때부터 매우 재밌고 즐겁게 일했으니까. 작업 중에 나는 맘에 들어도 감독이나 투자자가 바꾸자면 싸우지 않는 편이다. 감독, 투자자의 요구대로 고쳐 준다. 그러다 엎어지면 ‘그렇게 바꾸니까 안 되지’라고 내심 생각하지만 그걸로 싸우고 싶진 않다. 오히려 중요한 건 그런 반복되는 상황이 이른바 기획 시나리오의 문제라는 점이다.
시나리오 분야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일까? 현재 한국영화의 산업적 상황과 연관해 말씀해 주신다면?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만약 누군가 오리지널 시나리오 집필만 고집하면 배고파서 죽는다. 시나리오작가와 감독이 3년간 고생해서 영화를 개봉했다고 치자. 개봉만 해도 다행, 흥행까지 되면 더 좋지만 감독이나 배우와 달리 작가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고료가 2천만 원이면 작가 입장에서는 연봉 700만 원도 안 된다. 그걸 3년이나 겪은 작가에게 또 한번 작업하자면 그 노력을 다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후배들에게도 좋은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함부러 쓰지 말라고 한다. 작가만 손해니까. 지금처럼 저작권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고, 크레디트도 엉망으로 처리하고, 돈도 조금 주는데 뭐하고 그 고생을 하나? 한국영화가 지금 소재나 참신성에서 벽에 부딪친 가장 큰 이유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는 풍토가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준비한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과 작품에 집중할 수 없는 물리적 여건이 맞물려서 악순환이 계속되는 듯하다.
수많은 주위 작가들이 언제 시나리오를 제일 잘 쓰는지 아나? 대부분 데뷔하기 직전에 제일 잘 쓴다. 일단 데뷔하면 영화사에서 일이 들어오지만 전업작가가 된 이상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좋은 거, 싫은 거 가릴 처지가 못 된다. 먹고 살려면 심지어 세 개도 가께모찌(병행 작업)을 한다. 그런 현실에서 개별 작품을 잘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없어진다. 그게 핵심이다. 처우도 문제다. 충무로에선 고사지낼 때 작가도 안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시사회를 가도 찬밥 취급받는 상황도 허다하다. 그러면 지금 시나리오작가들은 대개 둘 중 하나를 택한다. 개별 프로젝트에 올인하지 말고 단기간에 여러 개를 해서 돈이나 벌자. 아니면 내가 지금 충무로에서 이 수모를 받지만 언젠가는 여의도로 간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지훈 작가가 그러더라. “2년 동안 방송국에서 드라마 쓰고 받은 돈이 8년간 시나리오 쓰고 받은 돈의 네 배”라고.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병행하는 사례가 유독 많은 것도 전문적인 시나리오작가진이 형성되는 데 장애로 작용하는 듯하다. 유독 한국에서만 감독이 각본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심하다는 인상이다.
할리우드 감독들은 각색에도 자기 이름을 넣지 않는다. 히치콕이 모든 영화를 각색했지만 크레디트에 그의 이름은 없다. 한국에서는 깨어 있다는 감독들도 작가들의 크레디트를 빼거나 축소하는 경우들이 있다. 한국영화가 가진 세계신기록은 둘이다. 자국영화 점유율 1위, 그리고 매년 개봉영화 중에서 각본과 감독을 겸한 사람이 만든 영화의 비율이 세계 최고다. 거의 50~60%에 해당한다. 할리우드는 5%도 안 된다. 스티븐 스필버그, 리들리 스콧은 거의 시나리오를 쓸 일이 없다. 좋은 시나리오가 많으니까. 시나리오 쓰는 사람도 목표 의식이 분명하다. 한 편 팔리면 팔자를 고치니까. 7~8년간 쓰지만 선택되면 한 편에 100만 달러를 받는다. 그래서 그 작업을 반복한다. A급 감독들에게 제작사에서 시나리오를 그런 방식으로 제공하니까 감독들도 쉬지 않고 작업할 수 있다. ‘할리우드의 시나리오작가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이다. 그러니 당연히 작가 지망생, 작가군도 두터울 수밖에 없다.
한국의 이와 같은 관행은 감독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신인 감독들은 시나리오에 대한 부담감이나 노력이 연출 자체보다 더한 경우도 자주 봤다.
한국은 데뷔 감독이 기존 A급 작가가 쓴 고급 시나리오로 데뷔할 가능성도, 사례도 거의 없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려면 스스로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이것도 웃기는 일이다. 누군가 데뷔하기 위해 5년간 쓴 시나리오를 제작사와 계약한다고 치자. 회사에서는 시나리오료 2천만 원, 감독료 3천만 원을 주겠다고 한다. 감지덕지할 수 있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냉정히 말해 5년간 쓴 시나리오를 2천만 원에 산 거다. 이런 식의 경험이 계속되면서 더욱 커지는 문제는, 다른 오리지널 시나리오도 2천만 원을 주면 그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잣대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데뷔 감독들은 사실 고료를 2천만원 받아선 안 된다. 노력이나 기간을 생각하면 1억원은 받아야 한다. 하지만 1억을 달라고 하면 제작사에서 그 감독을 내치겠지. 그러니까 데뷔만 시켜달라는 상황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한국 감독들은 데뷔작을 개봉하고 후유증에 시달린다. 차기작을 위해 처음부터 기획, 취재를 다시 하고 시나리오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4년에 한 편이라는 일명 ‘올림픽 감독’이 양산되는 것이다. 감독이 연출하느라 힘든 게 아니라 시나리오 쓰느라 힘들다. 각본을 쓴 감독이 아니면 감독을 깎아내리는 건 분명 잘못된 관행이다. 종합소득세의 과세에도 문제가 있다. 프로듀서와 감독들은 전체 수입의 65%를 필요 경비로 취급, 나머지 35%에서 과세한다. 작가는 78%를 필요 경비로 인정, 22%에서 과세한다. 따라서 작가 직업을 가져야 절세가 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영화 작가 크레디트에 이름을 넣어햐 하는 필요가 발생한다.
시나리오 계약 방식 때문에 생기는 분쟁도 심심치 않다. 판권이나 저작권 문제로 생기는 충돌이 많은데, 본질적인 문제점을 짚어 준다면?
기본적으로 시나리오 저작권은 작가에서 50년, 한미 FTA가 체결되면 75년 동안 부여된다. 한국은 일본 말로 ‘매절’이라는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계약하는 경우가 많다. 유효기간 없이 시나리오를 사는 것이다. 거기서 다양한 논란과 분쟁이 발생한다. 어떤 경우에도 시나리오는 일정 기간 동안 제작사가 그 작품을 영화화할 유효기간을 주는 계약이다. 제작사가 약속된 기간 동안 영화를 못 만들면 저작권은 그대로 작가에게 돌아오고 새 계약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의 계약서는 모든 권리는 제작사에, 모든 책임은 작가에게 부여된다. 이거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는 쉽게 반증된다. 이현승의 [시월애]는 감독이 작가 크레디트를 신사적으로 끝까지 지켜 줬던 사례였다. [시월애]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될 때 생긴 일이다. 제작사는 모든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미국 측에 주장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작가 동의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제작사가 권리를 입증하는 계약서를 제시해도 그들은 “이건 명백한 불공정 계약이기 때문에 해당 작가의 동의를 받지 않을 경우 자신들이 국제사법재판소에 불려갈 수도 있다”며 무조건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리지널 시나리오 부재, 작가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 다양한 분야로의 인력 유출 등 좋은 시나리오가 나오기 어려운 여러 악조건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쉬우면서도 어렵다. 작가의 저작권과 창의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개런티도 문제다. 배우는 연극판에서 처음 들어오면 1천만 원 받다가, 톱스타가 되면 5억 원까지 능력에 따라 상승한다. 그런데 작가는 왜 개런티가 오르지 않는가. 2천에서 1억까지는 뛴다. 그런데 1억 원이 넘으면 그때부터 아무도 찾질 않는다. 작품과 상관없이 비싸고, 말도 안 듣고 시건방지다는 말들이 퍼진다. 그러니 베테랑 작가들은 의뢰가 없어지고, 말 잘 듣는 젊은 작가들을 데려다가 1천만 원을 주고 1년 동안 굴리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김희재 작가도 1억 이상 받았고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일궜지만 지금은 작품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늘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홀대하고, 초짜들을 데려다가 기획 시나리오를 쓰는 상황이다. 시나리오만 써서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얻는 작가가 현 구조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영화 전체에 심각한 타격이 된다.
한지훈 작가의 사례처럼 사나리오작가들을 방송국에서 찾는 경우가 잦아졌다. 드라마 대본과 시나리오는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는 유사하다는 지점도 작용하는 듯하다.
긍정적인 일이다. CF, TV, 영화가 해외에서는 크로스오버하는 상황이 이미 오래 됐다. 인터넷 시대에 매번 가족 이야기만 다루는 옛날식 드라마만 고수할 이유가 없다. 미드, 일드를 찾아보면 엄청 재밌으니까. 미국 드라마처럼 선이 굵은 드라마를 방송국에서도 하고 싶은 거다. 그런데 기존의 드라마작가들은 그런 스타일을 소화해내기 어렵다. 나에게도 연락이 자주 온다. 게다가 [아이리스]가 성공하면서 그런 시도들이 더 잦아지고, 시나리오작가들을 물색하는 것이 늘어났다. 가급적 영화에서 한 작품이라도 경력이 있는 사람을 더 우대하는 편이다. 한지훈 작가도 [태극기 휘날리며] 작가라고 하면 더 이상 방송국에서도 프로필에 대해서 군말이 없다. 그리고 그쪽에서 자리를 잡으면 영화계로 돌아오지 않는다. 버는 액수도 다르지만 처우도 이유가 된다. 드라마 현장에 작가가 나타나면 이목이 집중된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야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고 푸대접 받기 일쑤지만. 나라도 돌아오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시나리오작가로 한정해서 이야기하면 충무에서 잘 먹고 잘살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
15년 정도 후진양성을 했다. 수많은 시나리오작가들을 배출되는 걸 지켜봤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시나리오를 모니터링한 사람이기도 하다. 일명 캐스팅고, 촬영고는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되는 것인가?
흥미롭게도 작가 지망생보다 감독 지망생들이 시나리오를 더 잘 쓴다. 오로지 영화밖에 할일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시나리오가 더 좋을 수밖에 없다. 지금 시스템에서 우리나라에서 감독을 하려면 작가가 되어야 하니까. 데뷔작 시나리오를 거의 평균 5년씩 쓴다. 할리우드는 시나리오가 80점이 안 넘으면 그 작품은 무조건 크랭크인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은 좋은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없으니까 할리우드 기준으로 60~65점 밖에 안 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촬영에 들어가기도 한다. 특히 각본과 감독을 겸하는 사람의 전작이 괜찮으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실수와 위험 요소가 더 많아진다. 시나리오를 보고 크랭크인을 하는 게 아니라 감독을 보고 크랭크인을 하는 것이다. 김지운, 류승완 감독이 늘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데 이번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는 다른 작가가 썼다. 그들도 점점 지치고 힘들어서 그런 거다. 한 작품을 마무리하자마자 또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쓴다는 게 참 어렵다. 그래서 만약 다른 작가를 기용해서 70점인 시나리오를 자기가 고쳐서 80점이 되더라도, 오리지널 각본의 크레디트는 작가에게 주어지는 게 온당하다. 그렇게 대접하면 그 작가는 아마도 다시 좋은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그 감독과 작업하려 할 것이다. 감독에게도 그게 훨씬 좋다. 연출에 자신 있다면 그런 파트너십을 토대로 1년에 두세 편 찍을 수도 있다. 그게 안 되니까 각자 매번 생고생하는 거다. 드물지만 그런 케이스가 국내에도 있다. 최석환 작가와 이준익 감독. 내가 김성수 감독이랑 작업할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최 작가에게 연출할 생각은 없냐고 묻자, “감독을 내가 왜 해요? 이준익 감독이 만드는데”라더라. 반대로 이준익 감독도 “시나리오를 내가 왜 쓰냐, 석환이가 쓰면 됐지”라고 할 것 같다. 일상적으로 만날 때마다 서로 아이디어나 시나리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역할 분담을 하는 파트너십은 긍정적이다. 감독에게 그런 작가가 더 늘어나고, 작가에게도 그런 감독이 더 많이 생긴다면 최선이다. 꼭 각본 겸 감독을 해야 한다는 현재의 충무로 논리는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한 이상한 강박이 크리에이티브한 영화 인력들을 빨리 지치게 하고 떠나가게 하는 요소들이다. 각본 겸 감독은 미국에서도 소수의 마이너급 천재들이 취하는 시스템이다. 우디 앨런, 짐 자무쉬. 아니면 한국으로 따지만 홍상수, 이창동 같은 유형들이 이에 적합하다.
시나리오마켓의 운영위원장이었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85편의 시나리오가 매매완료됐다. 연간 15~20편 정도가 매매된 셈이다. 공모전 시절부터 현장과의 접촉이 긴밀해진 건 분명한 성과지만 영화화되는 비율은 아직도 매우 적다. 무엇이 문제일까?
나는 시나리오마켓을 만들다시피 했지만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이후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일단 시나리오마켓에서 신인 작가가 작품을 판매할 때 자신에게 접촉하는 제작사의 신뢰도나 제작 능력을 판단한 방법이 없다. 그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노예계약서에 사인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예를 들면 1,500만 원에 사기로 했는데 계약금을 50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나중에는 회사가 어려우니까 25만원밖에 못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일단 25만원 받고 작가는 6개월 동안 시나리오를 고쳤다. 작가는 6개월 후 도저히 생활에 쪼들려 나머지 계약금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제작사에서는 시나리오가 후져서 못 주겠다는 거다. 내가 시나리오마켓 운영위원장을 할 때, 투서가 들어온 실제 상황이다. 이런 케이스가 많다. 연결은 됐는데 불량 접촉이 되고,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데 커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게 바로 마켓에서 제작사와 계약 작품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영화화가 잘 안 되는 이유다. 대책은 시나리오작가조합이 마켓 당선자를 준회원으로 수용해 그들의 법적인 권리를 보호하고, 계약서를 시나리오작가조합과 한국영화제작자협의회가 단체협약으로 결정된 기준과 표준계약서에 의해 검토해야 하는데 현재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보통 프로젝트가 엎어졌을 때 핑계대기 제일 좋은 이유가 시나리오다. 프로듀서의 능력 부재나 다른 여러 상황에 의해 무산되더라도 대부분은 시나리오를 이유로 내세운다. 그것까지 마켓이 커버해주기는 어렵다. 그래서 마켓은 일정한 한계가 있는 제도다.
단순히 마켓의 문제가 아니라 제 단체들이나 산업적인 관계가 해소되어어 하는 문제라고 여겨진다. 시나리오마켓을 창설하고 운영위원장을 했던 시절부터 제협과의 단체협약이나 표준계약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누차 강조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좀처럼 현실화되지 않는 장애 요인들은 무엇인가.
내가 작가조합 대표였을 때, 제협 대표가 차승재였다. 차 대표가 난색을 표명했다. 그의 주장은 첫째, 시나리오작가조합과 단체협약을 맺어야 할 의무가 없다. 영화산업노조와 달리 시나리오작가조합은 노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시나리오작가조합과 단체협약을 맺으면 그 계약을 관철해야 하는데 제작자들은 투자자들에게 그것을 설득해야 한다. 이를 투자자들이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복잡한 조건이 있는 계약서를 반길 투자자는 없으니까. 그래서 제협 측은 단체협약을 맺으면 시나리오작가들이 더 힘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어쨌든 영화는 찍어야 하는데, 협약이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현실적으로 일리가 있는 판단이다. 제작자는 작가랑 계약할 때나 ‘갑’이지, 투자자와 만날 때는 반대로 ‘을’인데 그걸 관철시키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개별적인 탁월한 작가들이 놀랄 만한 수준의 계약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이며, 별개의 사안이다. 작가가 되면 일정 수준의 계약은 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신진들이 피해를 덜 입는다. 심지어 김대우 같은 대표적인 특A급 작가도 감독으로 전향한다. 그가 감독을 하며 3~4년에 한 편 꼴로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 작가로 남았다면 1년에 그런 작품을 두세 편은 쓸 수 있는 역량이 있다. 따라서 좋은 감독이 한 명 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작가 한 명을 잃은 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현실에서는 좋은 작품을 꾸준히 쓰는 사람이 좋은 대우와 명예를 얻는 작가로 남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 할리우드는 특 A급 작가가 수백 명 수준이고, 필모그래피를 보면 우리가 안 본 영화가 없을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좋은 작품들을 양산해 낸다. 우리는 그게 불가능하다. 김대우는 감독이 됐고, 나는 이러고 놀면서 시간 나면 소설이나 쓸까하고 있다. 김희재는 시나리오 제의가 거의 안 들어와서 미니시리즈를 진행했고, 올댓스토리라는 회사를 만들어 회사 사장이 됐다. 조합에서 대표적인 시나리오작가 셋을 내세웠는데, 모두 순수하게 시나리오작가로 남아 있지 못하다. 우리도 그런데 지금 후배들이나 신인들은 더 어려운 사정일 것이다.
표준계약서는 현재도 없나? 시나리오마켓에 표준계약서라고 명기된 부분은 효력이 없는 것인가?
일단 표준계약서 자체가 없다. 시나리오마켓에서 올린 표준계약서도 법적인 구속력이 없다. 제협과 작가조합이 단체협약을 하고 이를 어겼을 시에는 제재해야 하며, 지금보다 항목별로 훨씬 상세하게 기술되어야 한다. 미국은 보통 계약서가 거의 책 한 권 두께다. 뒤편에 인덱스가 달릴 만큼 개별 사항들에 대한 상세한 조건들이 명시된다. 결과적으로 거기까지 가야하는데 아직은 멀었고, 또 쉽지 않다. 영화 스태프들은 영화산업노조 내 표준계약서가 있다. 전국 영화산업노조는 민주노총 산하이기에 단체협약이나 표준계약서 사항을 지킨다. 하지만 물론 그쪽도 문제는 있다. 제작자들이 노조 소속 스태프들을 아예 고용하지 않는 상황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노조에 들어갔다가 그 때문에 다시 이탈하는 사람도 생겨나는 게 현실이다.
그러한 제작사와 작가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에이전시의 효율성을 점치는 사람들도 있다. 에이전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에이전시는 이미 몇 개 있더라. 방송작가들은 대부분 에이전시와 연계해서 작업하는데 시나리오작가들도 몇 명 합류한 상황이다. 합리적이니까. 신인 작가들의 경우 어떤 영화사에서 뭘 준비하고 뭘 찍고 있는지 모르니까 어떤 아이템을 원하는지도 파악하기 어려운데 에이전시가 그것을 전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으면 좋다.
영화산업이 위축되면서 대형 투자배급사에서 기획개발비를 없애는 방향으로 제작사와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일각에서는 기획 영화 양산이나 소형 제작사들의 창의적인 능력을 도외시하는 일방적인 방식이라는 지적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은 없는 게 맞다고 본다. 할리우드, 홍콩 시스템인 SPC나 SPV 같은 걸 적용하는 것이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니, 어쩌니 했던 시절에 소규모 크리에이티브 제작사와 대기업이 공존하며 기획개발비가 생겨났다. 지금은 대기업이 시장을 모조리 차지하며 없어지는 방향으로 변했다. 지금이 자본주의 기준에서는 선진화된 시스템이다. 회사가 어떤 감독에게 함께 해 보자는 제의를 한다. 감독과 작가가 작업을 1년 가까이 진행했는데 별로인듯한 상황이 생긴다. 그러면 손실 처리하는 식이었다. 기획개발비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방만하게 회사가 운영됐던 측면이 있다. 대기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없애는 게 맞다.
그렇다면 변화된 상황에서는 완고를 써서 제작사에 가져가는 방법 외에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비용이 줄어든 대신에 작가나 감독에게는 다른 이득이 생긴다고 예상할 수 있나.
감독이 아이템을 작가에게 가져온다 치자. 그러면 감독과 작가가 개별적으로 돈 10원도 없이 계약을 맺고 시나리오를 쓴다. 계약을 할 때부터 이익이 나면 감독과 작가가 정해진 비율로 이익을 나누자고 한다. 이후 사나리오가 완성되면 배우들에게 이야기를 꺼낸다. 출연료와 인센티브를 결정하고 배우가 합류하며 그때 프로듀서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때 모인 감독, 작가, 배우, 프로듀서가 이익분배 구조를 결정한다. 이렇게 완성된 시나리오와 가상 캐스팅으로 제작사나 투자사와 턴키(turn-key)로 계약한다. 제작사가 가부를 결정하고 예상 제작비를 지급하면 영화를 찍는다. 물론 이것은 일장일단이 있다. 작품을 쓰는 동안 배고프다는 것이다. 대신 기획개발비를 하나도 안 받았기 때문에 제작 여부만 물어보고 전혀 간섭받지 않는다. 그리고 지분이나 이익이 더 커질 수 있다. 현재 이 방향으로 한국영화계도 움직이고 있다. 이 방식은 할리우드 시스템에 가깝지만, 일정 정도 이름 있는 감독, 작가, 프로듀서들이 시도할 수 있을 뿐 신인은 거의 활용할 수가 없다는 단점도 있다. 기획개발비를 없애는 건 자본주의 게임에서는 정당한 측면이 있다. 대신 기획개발비 없이 만들어 오면 더 보상해줘야 한다. 김희재 작가는 딜을 굉장히 잘하는데, 시나리오를 팔 때 아예 기획개발비를 계약에서 별도 항목으로 포함시켜 받는다. 고료는 1억, 기획개발비는 5천만 원이라는 식으로. 기획개발비를 없애는 사고는 정당한데 관건은 그것 없이 작품을 만들어 온 사람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다.
명망 있는 작가, 감독, 프로듀서들이 할 수 있다지만 거대 제작사 입장에서는 무조건 초고를 요구했다가 계속 거절할 수 있는 칼자루를 쥔 셈이다. 경력이 적은 작나나 감독 입장에서는 훨씬 힘들어진 건 아닌가.
힘들어졌다. 그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예를 들어 대기업과 크리에이티브한 제작사가 공존했던 시절에도 그 문제는 존재했다. 영화 쪽 사람들과 자본 쪽 사람들이 함께 회의하면 자본 쪽은 괜히 영화를 만들어서 손실이 나면 안 되니까 복지부동한다. 그 결과 직원 150~200명이 넘는 회사에서 1년에 영화 한 두 편 찍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관점으로는 지금도 [과속스캔들]은 찍어도 [살인의 추억]은 안 찍을 것이다. 기획실에 대학 갓 졸업한 신참들이 15~20년 넘게 시나리오 작업을 한 작가보다 영화를 많이 안다는 전제로 작업하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젊은 작가들을 불러서 시놉시스 10장 쓰면 15~20만 원씩 주고 그걸 기획 자료로 만든다. 엄청나게 그걸 축적하지만 결국 이것이 제작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회의만 반복되고 제작은 뒷전이다. 안정되고 믿을 만한 시나리오,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의 시나리오로 출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획실에 모여서 아무 것도 없이 회의하다가 “요즘 뭐가 좋을까? 신용불량자 이야기해 볼까?”라는 식으로 가는 건 0점에서 출발하는 거다. 그러고는 작가를 사서 500만원 주고 굴리다가, 이거 아닌가 싶으면 폐기하는 행동을 반복한다. 앞서 말한 손실 처리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힘이 센 감독들은 ‘우리는 그런 거 싫으니까 그냥 투자만 하라’고 넘어가지만 신인급들은 데뷔나 제작이 더 어려워졌다. 그런 해결책의 시작은 좋은 스토리를 제 값 주고 사느냐의 문제다. 그게 안 되니까. 검증받는 감독에게는 시나리오도 안 보고 돈을 준다. 논리적이지 않다. 시나리오가 좋으면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그런 인식이 없다면 좋은 시나리오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
심산스쿨에서는 영화 시나리오나 드라마 대본뿐만 아니라 다양한 플랫폼에서 글쓰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위즈덤하우스나 다른 대형출판사에서 시나리오작가를 잡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방송국 PD들과 마찬가지다. 초등학생들이 꼭 배워야 하는 수학공식 같은 것을 다룬 책이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콘텐츠는 이미 수천 년 전에 결정된 것들이다. 그걸 어떻게 전달하는가, 하는 것이 핵심인데 플롯이나 캐릭터를 만들어서 [반지의 제왕] 식으로 쓰는 것이다. 이 작업을 출판사가 여러 직업군에 맡겨 봤다. 기획실 직원, 소설가 등등등. 그리고 그걸 제일 잘 하는 직업군이 시나리오작가라는 걸 알게 된 거다. [오딧셈의 수학 대모험] 같은 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집트 피라미드 안에 갇혀서 공기가 점점 희박해지는데 어떤 수식을 써서 빠져나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 같은 것이다. 그걸로 시나리오를 쓰는 것보다 돈을 훨씬 많이 번다. 시나리오로서의 스토리텔링을 다른 분야에 확장시키는 것을 다 같이 고민해야 한다. 나는 “한국영화계는 그대들을 안 먹여 살릴 것이기 때문에 먹고 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원 소스 멀티유즈, 멀티 플랫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야기라는 뼈대만으로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시도가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시나리오는 모든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다. 소설, 시, 에세이 작법을 배우는 것보다 시나리오 작법을 배우는 게 여러 플랫폼의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역사적으로 3천 년이 넘었고, 시나리오는 대부분 희곡 작법에서 비롯됐으니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현대적인 요소도 배합되어 있다. 지자체마다 축제를 하는데 대부분 아무 스토리가 없다. 그러면 여기 친구들이 작업을 해 준다. 어떤 친구들은 그걸 게임 시나리오로 전환해 보기도 하고, 앱스토어에 올린 사례도 있다. 영화계 입장에서 일종의 인력 손실이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 스토리텔링을 다양화시키는 방식이 살 길이다.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 2010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