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의 미니홈피에 들어갔다.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이 폴더별로 정리 돼있었다. 참고로 그 친구는 외국계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는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다. 바다 건너 육지는 제주도가 전부인 나로선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못 보던 폴더 하나가 더 있었다. 남자친구와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랬다. 그녀에겐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대외적으로 공개를 안 해 왔었는데 미니홈피까지 올린 걸 보니 아마 올해 안에 결혼이라도 할 모양이다. 사진들 중엔 남자친구와 그녀의 가족들이 함께 찍은 모습도 있었다. 사실 그 폴더를 여는 순간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날 감싸고 있음을 알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질투가 났던 게다...
친구와 나에 대해 말하자면 우린 10년을 알아온 사이다. 그 동안 흔히들 말하는 이성친구 간에 범할 수 있는 오류도 잘 극복해 왔다. 주위에서 둘이 잘 어울린다 하면 “우린 그냥 친구야.”라고 쿨하게 말하는 그녀와 내가 성숙한 인간들처럼 느껴져 좋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와중에도 난 우리 둘 사이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믿어 왔던 것 같다. 심지어 그녀가 지금의 연인과 시작을 알릴 때도 그 믿음은 여전했다. 이 무슨 오만과 뻔뻔함이었는지...
이틀 전부터 계속 멍한 기분이다. 어떻게 전화라도 해서 “야 간만에 우리 얼굴이라도 봐야지. 미니홈피에 남친사진 올렸던데 이제 결혼하려고?ㅋㅋ” 라고 쿨하게 말해줘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루가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 이 멍한 기분의 정체는 아무리 생각해도 단지 그녀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이 아닌 거 같았다. 안 그런 일 없겠지만 문제는 나라고 결론 내리고 있는 중이다.
요즘 약간 인기 있는 블로그 중에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 업무일지’라는 게 있다. 처음 이 블로그를 봤을 때 마치 유체이탈적 경험을 하는 것 같았다. 난 분명 그런 글을 올린 적이 없는데 누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망해가는 영화사라는 얘기는 아니다. 난 그렇게 믿지 않는다. 비록 지난해에 진행 중이던 영화를 접고 회사도 축소 이전했지만 망해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미래가 밝지 않을 뿐이다.ㅡㅡ;; 어쨌건 그런 와중 1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고 있다. 그런데 4월 달로 접어들면서부터 회의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영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드라마 일에 개입은 하고 있는데 기획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본을 쓰는 것도 아닌 이 어정쩡한 나와 회사의 입장이 답답한 것이다. 한땐 대표의 신임을 얻어 전천후로 요긴하게 쓰이는 나의 존재가 뿌듯하게 생각될 때도 있었는데 요새는 그마저도 시들해졌다. 그렇다고 회사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가 시나리오를 기똥차게 잘 썼으면 이러고 있지 않을 테니까...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아주 안목 있는 메이저 배급사의 직원이 내가 혼자 틈틈이 쓴 시나리오에 눈독을 들인다. 그럼 난 이렇게 말한다. 시나리오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좋습니다 계약하죠. 대신 제작은 지금 제가 있는 곳에서 했음 하는데요. 물론 처음에 배급사 쪽에선 난색을 표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시나리오가 워낙에 대박이다 보니 곧 승낙할 것이고 나의 의리에 대표는 감동한다. 이후 난 신인으로선 파격적인 비율로 러닝 개런티 계약을 한다. 그리고 개봉된 영화는 역대 한국영화 흥행 탑 파이브에 드는 기대에 약간 못 미치는 대박이 나고 나와 제작사 배급사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영화판이 행복해진다... 이상이다.
그리고 꿈에서 깨보니 오랜만에 들른 친구의 미니홈피였다. 사진 속에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커리어 우먼 내 친구가 곧 결혼할 남친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갑자기 이대로 서울 하늘 아래서 버틸 자신이 없어졌다. 난 정말이지 결혼도 하고 싶고 예쁜 아기도 낳고 싶은데 지금 내가 하는 일로 그런 것들이 가능이나 한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모든 게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이 죽일 놈의 만성 슬럼프... 재충전이 필요했다. 그래. 산이다! 회사가 약간 걸리긴 하지만 까짓 거 요새 일도 없는데 제껴버리지 뭐. 이건 일종의 일탈이라구! 보고 따위는 있을 수 없어. 하루 동안 핸드폰을 꺼놓는 거야! 라고 맘 먹었지만 대표님께는 정중히 말씀드릴 생각이다. 아마 흔쾌히 승낙하시리라.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신임 받는 직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