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은 왜 하는가? 우문이다. 대답도 각기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난 즉각 대답할 수 있다. 머리는 비우고 몸을 맑은 공기가 충만한 대자연속에서 혹사시키기 위해서라고. 도시 생활은 얼마나 답답한가? 인간 종족이 만들어 내는 각종 소음과 감정의 부대낌은 항상 뒷 목이 딱딱하게 굳어 올 정도로 엄청한 스트레스를 선사하고 몸은 움직일 곳이 없어 퇴화되고 만다.
그러나 산행중 머리가 점점 비워지고 잠 못 이루게 하는 고민이 점차 옅어져 가고 헉헉 숨이 차오르면서, 올라갈 때는 허벅지 근육위주로 내려올 때는 복근 주변부를 중심으로 있는 지도 몰랐던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아우성을 치면, 비로소 나는 자신이 고민과 망상으로 짜여진 허상이 아닌 '동물' 임을 절절히 깨닫는다.
내려오면서 한 잔 꺽는 맥주는 그야말로 넥타이다. 이 한 잔 술로 몸은 잿더미에서 부활하는 불사조처럼 다시 소생한다. 몸의 노곤함에 취한 것인지, 맥주의 알코올에 취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그 한 잔 술은 그 때까지의 모든 산행에 유종의 미를 남기고 등산 동기들끼리의 화합을 다지는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을 예고한다.
그런데 오늘 산행은 모든 것이 역행했다. 몸은 피로가 아닌 음식 폭탄에 맞아 기절할 지경이 됐고, 머리에는 철학적 사색이 회오리치고 말았다.
승합차를 얻어 타고 올라가는 길목에서 '통개 (개 한 마리)' 를 '똥개'로 헷갈리신 원익 선생님 덕분에 시작된 개고기 이야기에서부터 뭔가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저 집 개고기가 맛있어...... 우선 개 사진을 찍어. 그 다음에 정신없이 패. 진흙에 묻어. 구워. 먹어.' 라는 친철하신 산이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아점으로 닭도리탕, 도라지, 고사리 나물, 마늘 고추 장아찌에 맥주 6병까지 비워 버렸다.
부른 배를 부여잡고 불과 삼십분을 갔을까, 이번에는 아리따운 계곡 물이 등장하셨다는 이유로 서로 물 끼얹어주며 또 모여 앉아 먹었다. 조금 헉헉 소리가 날까 싶으니까 날이 덥다고 모여 앉아 또 먹었다. 이제 시작인가 생각하니 시간이 어정쩡하다고 내려 오다가 또 먹었다.
이 때 해치운 음식들이 자두, 오이, 와인 두 병, 떡, 잡채, 무쌈에 참외까지 어마어마했다. 결국 산행을 끝낼 즈음 내 몸은 가벼워지긴 커녕 뒤뚱뒤뚱 걸어야 할 정도로 무겁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 여기에서 끝났으면 다행이다. 다 내려오고 나서 정구지에 골뱅이 무침에 맥주 7천까지 몸에 쑤셔 박아야 했다. 탈무드에서 나오는 격언대로 '꽉 찬 자루라 해도 콩 한 알이 안 들어가랴?'
만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왜 계속 먹을 것들을 주면서 착하고 얌전하고 건실하게 먹어치우는 필자를 다들 긍휼한 눈으로 쳐다 본단 말인가?
'재한테 뭐 먹으라고 주면 아깝지 않아요? 살로도 안가고 그냥 없어지는 것 같아.'
'현옥이는 고문할 때 정말 쉬워. 먹을 것만 입에 물려주면 "뭐 더 가르쳐 드릴까요?" 하면서 지가 막 지도 그리며 대답할 꺼야.'
'너 어렸을 때 못 먹고 살았니?'
실로 눈물을 금치 못할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음식에 대한 예의를 저 버리지 않은 자신이 자랑스럽다.
몸이 노곤하고 가벼워지지 않았다면 머리는 가벼워 졌단 말인가?
산이 선생님의 장선우 감독 이야기로 우리는 '새롭고 기발한 입에 풀칠 하는 방법' 에 대해 눈을 떴고, 또한 선생님의 고등학교 동창생들 이야기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 '청소년기의 폭력이 향후 삶에 미치는 영향' 에 고민해야 했고, 원익 선생님의 가족사 이야기로 '가정폭력과 그 심리적 파장' 에 대해 마음이 무거워져만 갔다.
그 뿐이랴! 산행 도중 '멧돼지 출몰 지역' 에선 '탈수맨' 경오 오빠의 강요로 '멧돼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에 대해 국가가 지정한 3단계를 골치 아프게 공부해야만 했다.
1단계. 움직이지 말고 노려보며 멧돼지랑 기 싸움 한 판 해 볼 것.
2단계. 기 싸움에서 졌다 싶으면 냅다 꼬랑지 내리고 나무위로 튈 것.
3단계. 나무 위에서 쫄쫄 굶다 너무 배고파도 멧돼지를 잡아 먹으려 하지 말 것.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진구 오빠가 제시한 '우선 사진을 찍는다. (그 다음은 글을 잘 읽었으면 다들 아실 것이오)' 도 있다. 여하튼 탈수맨을 데리고 살면서도 굴하지 않는 '명랑소녀' 인 월명 언니에게 경의를 표한다.
끝나지 않았다. 내려오는 도중 인란 언니의 '지리산 탐방을 올바르게 하는 법' 에 대해 배워야 했고, 산이 선생님의 '똥바다 지리산과 깨끗한 북알프스 비교를 통한 양국 국민성 고찰' 에 대한 강의도 들어야 했다.
한술 더 떠 향란 언니는 시종일관 대체 왜 가져왔는지도 모를 두꺼운 책자를 꺼내 이 나무 저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창작열을 발휘하는게 아닌가! 향란 언니는 왜 모른단 말인가! 그렇게 살면 골치 아프다. 우리는 알 것만 알아도 머리가 터지기 일보직전인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자~ 잘 듣기를 바란다. 세상의 모든 동식물은 오직 두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먹을 수 있는 것들' 과 '먹을 수 없는 것들'.
아! 이 지경을 겪고 어찌 산행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배가 부르고 정신은 하나도 없는데....그냥 '놀다' 온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없다. 놀아야지 별 수 있나.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어. 많이 놀아야 돼. 시간이 없어." 라는 산이 선생님의 한 마디에 함구할 수 밖에 없으니.
하지만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고한다. 다음 산행에선 정말 '빡세게!' 코에서 단 내 날 때까지 산에 오르고 다리에 쥐 날 때까지 수영하자고. 그래야 오늘 먹은 모든 음식물들이 비로소 소화되지 않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