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가? 저번 산행에서 산이 선생님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놀아야 돼.'라고 하신 발언을?
우린 정말 단순한게다. 이 한 마디가 전율이 되어 온 몸을 휘감은 후 뉴런속 시냅스의 전기 현상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던 게다. 아니면 이토록 재밌게 무지막지하게 놀았을 리가 없다.
시작은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정시에 온 멤버들이 11시까지 지각생들을 기다리는 장면이다. 산이 선생님 말씀대로 '각자 맡은 음식'만 아니라면 훌렁 떠나버렸을 테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 30분 지각의 가장 큰 원흉은 청량리역에서 '나 돌아갈래!!' 쑈를 한 어느 XX였다. 멈춰버린 지하철 안에서 우리의 똘이장군 원익 선생님께선 '자넨 일이 없나? 왜 평일에 산행을 하나? 젊은 사람이, 쯧쯧쯧...' 이라는 감동적인 친절에 시달리고 계셨단다.
초반부터 더위와 습도 때문에 헉헉 소리가 나는 빡센 산행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한 잔하고 먹고 했던 과거와는 달리 모두들 음료만 줄창 마셔댔다. 영희 언니가 살뜰하게 챙겨온 커피와 오이등속이 없었다면 누군가는 도봉산 어느 구석에서 하늘에 종주먹질을 하며 눈을 흘기는 '밀양의 신애 따라잡기'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봉우리와 계곡을 넘고 건너 더이상 경오 오빠를 '탈수맨'이라고 놀리기에 무안해 질 때쯤 오봉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기대는 했다. 호박쌈과 돼지불고기는 평상시에도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던가! 하지만 이 날의 점심 한끼로 우린 '미학적 충격'을 경험했고, 김밥 한 줄로 허기를 달래던 시절로는 되돌아 갈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럴 줄 몰랐다. 각종 농담과 재담으로 한적하니 먹고 마시던 지난 여러 산행과는 달리 우린 20여분 간을 말 한 마디 없이 먹기만 했다. 선생님께서 "왜 이리 조용해?"하며 낄낄대셔도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말 없이 먹기만 했다. 아마도 계속 물만 들이켜 댔더니 모두의 배꼽이 등짝에 달라 붙을 지경이었던가 보다. 이 침묵을 깬 건 월명 언니의 "밥이 다 어디로 갔어?"
평상시 약빠르기로 정평이 난 월명 언니도 너무 힘들고 배가 고픈 나머지 '밥 세 공기' 원익 선생님 옆에 앉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오죽하면 현대인의 음식 과소비를 사회악의 하나로 여기던 '영양실조' 경오 오빠까지 연신 밥 달라 투정이었다.
여하튼 우리는 인란 언니의 유기농 돼지 불고기, 호박쌈과 원익 선생님의 새김치, 묵은지, 원익 선생님 조카의 부추김치, 진구 오빠의 호박전, 월명 언니의 각종 야채와 내 쌈장에 와인 두 병, 각자 준비한 엄청난 양의 밥과 권록 오빠의 복숭아까지... 휴~~ 다른 산행에선 몇 번에 나눠먹을 많은 양의 음식을 게 눈 감추듯, 배꼽이 요강 꼭지가 될 때까지 먹고 마셔댔다.
필자가 아무리 먹어대도 놀리는 사람까지 없었다. 다들 굴뚝 청소부인데 누가누굴 검다 하겠는가 말이다.^^
기름통에 기름 넣고 났으니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도봉산은 각종 기암괴석과 위로 쭉쭉 뻗은 나무들, 정다운 오솔길들로 산행의 진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여성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산이 선생님과 진구 오빠는 여성봉을 희희낙낙 오르며 이건 @@고 이건 %%고 '숨은 그림 찾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난 진구 오빠가 갑자기 어인일로 앞쪽에 따라 붙었나 했다. 뒤에 미성년 쌍둥이들이 오기 전에 제대로 여성봉을 공부할 셈이였던 거다. 둘 다 공부를 그만큼 열심히, 즐겁게 했으면 하버드에 수석 입학하여 나라를 빛냈을 것이다.
여성봉에서 바라보는 절경은 우리 모두의 다리를 붙잡았고 시원한 바람에 빗방울까지 조금씩 떨어져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이 와중에도 경오 오빠는 "선생님? 왜 저기 오봉에 저 돌덩어리들이 저렇게 놓여진 거죠?" 라고 물음으로써 '학습맨은 죽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그너저나 저번에 '멧돼지 퇴치법'은 국가가 가르쳐줬지만 이번에는 '신'에게 물어야 하니 큰일이다. 이 사람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것이 걱정스럽다.
여성봉에서부터 송추까지의 평탄한 내리막길은 조금씩 땀을 식히게 해 주었지만 이 날의 백미는 역시 수영장이었다. 여성봉에서 공부를 하더니 갑자기 똑똑해진 진구오빠는 9000원의 입장료를 5000원으로 깎는 영리함을 발휘했고, 우린 잔뜩 올라있던 화기를 시원한 수영장 물에서 싼 값으로 식힐 수 있었다. 아! 내장까지 익어버릴 정도로 펄펄 끓던 몸을 시원한 수영장에 담그는 맛이란!
여기서 깨달은 바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총은 쏠 수 있어도, 수영은 영~~....^^;;
맥주병 산이 선생님께선 초반에 수영을 포기하셨고, '김마담' 영희 언니는 웬 일로 예쁜 수영복을 입고 평상에 앉아 있기만 했고, '한몸매' 희대 오빠는 단지 우리 눈만 즐겁게 해 준 채 시력이 나빠 수영을 못했다. 진구 오빠는 마음따로, 몸따로 행위 예술을 펼쳤고 경오 오빠는 키보다 높은 곳엔 무서워서 들어가질 못했다. 그나마 물 속에서 나올 줄을 몰랐던 나, 월명언니, 경오오빠, 권록 오빠는 양다리에 쥐가 나서 하나 둘 씩 장렬히 전사해 갔다. 자주 수영을 하는 나조차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는 쥐가 나는 걸 보면, 이 날 산행이 빡쎄긴 했던 거다.
어느덧 시원하게 식은 노곤한 몸을 이끌고 해가 뉘엿뉘엿지는 평상에서 맥주와 오리고기 닭백숙으로 배를 채울 때 다들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아직도 다리가 뻐근하고 몸이 노곤한 걸 보면 (물론 새벽 5시까지 마셔대고 5시간 잔 후 과외다녔지만 ==;;) 어제 산행은 가볍지 않았다. 그래도 이다지 뿌듯할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이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방법은 가지가지이다. 공부를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거나, 돈을 벌 면서 열심히 시간을 보내고 만족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채우는' 뿌듯함이 아닌, '비우는' 뿌듯함이 있다.
어제 우리의 산행이 그러했다. 비우려면 채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선생님께서 아무리 '백수집단'에 '한심한 것들' 이라고 놀려 대셔도, 다들 그토록 즐거워하고 뿌듯해 하는 걸 보면, 삶의 켜켜에 무언가를 열심히 채우며 살고들 있나보다.^^
이날의 인물-- 인란 언니네 쌍동이들
'귀여운 것들' (인란 언니 지송~~) 이다. 뽀얗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양손에 지팡이를 쥐고 날다람쥐처럼 산을 올랐다. 간간히 쉬는 시간엔 말 한마디 없이 둘이 어딘가로 사라져서 한 숨 자고 오더니, 식사 시간엔 자신의 몫들을 알뜰히 쟁여 놓고 말 한마디 없이 먹더니, 월명 언니가 디카를 들이대며 아무리 유치찬란한 멘트를 시켜도 그토록 부끄러워하며 다 따라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인란 언니의 교육론은 단 한마디로 요약됨을 알 수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이날의 친절맨-- 원익 선생님의 조카 (이름?)
빈손으로 오면 누가 뭐라 그럴 것도 아닌데, 자신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맛있는 파김치를 가져 오고 사진을 찍을 때 마다, "제가 찍어 드릴께요." 하며 솔선수범했다. 등산 도중에까지 연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잡혀 귀여움을 받는 원익 선생님을 보면 이 집안 핏줄이 심상치가 않다.
이날의 몸매-- 임희대
가냘퍼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군살 하나없이 훌륭한 몸매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 모두 확인했다. 11살 연하 신부에게 얹혀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모두 야유했지만 38살에 그 정도 몸매를 가꿀 정도면 정신 상태는 됐다!
이날의 명언-- 조인란
산이 선생님께서 여성봉 능선에 진이 빠져 앉아 있는 우리들을 보고
"아이고~ 이렇게 한심해 보이는 집단이 다 있냐? 무슨 아프가니스탄 포로들 같다. 너네는 인질로 잡으라고 데려다 줘도 안 잡아가. 가족들이 안 찾을 것 같아서." 라고 신나게 비웃고 계실 때, 인란언니의 한마디
"선생님 몰골이 우리들 다 합친 거 보다 쎄요~"
이날의 한 장면-- 이진구
생각보다 군살이 비죽거리는 몸매로 허우적 거리다 폼을 잡다 하더니, 갑자기 배치기로 물에 자신을 메다꽂았다. 이 한 방으로 천지가 진동했고 파라다이스 수영장 물이 다 근처 밭으로 이사갈 뻔했다. 아서라~ 그렇게까지 '몸개그'를 하는 것은 월명 언니와 징그리로 족하다. '오늘 당신의 배는 안녕하신가요?'
전진구(이진구가 아니다)의 배치기! 아아 정말 대단한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월명아, 얼렁 사진 올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