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고수진 등록일: 2007-08-25 09:21:47 IP ADRESS: *.177.69.189

댓글

15

조회 수

1398

 

오랜만의 오전 전철안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출퇴근 시간에는 이동을 안하는터라 저 혼자서만 등산가방 메고 그들 한 가운데 뚝 떨어져

있었습니다.

햇볕은 오늘도 쨍.쨍. 없는 모래알도 반.짝.

6년여 만의 산행이라 살아 돌아오리라 살짝 다짐했습니다.

 

푹푹 찔 줄 알았던 산 속은 의외로 살만하다는 꽃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찹니다.

<푹푹 찔 줄 알았던 산 속은 의외로 살만하다는 꽃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 찹니다.>

 

가는 길이 험난해도 계단보다는 뿌리가 좋습니다.

<가는 길이 험난해도 계단보다는 뿌리가 좋습니다.>

 

맨 뒤에서 졸졸 따라가며 이런 짓 하며 올라갔습니다.

너도 올라가고, 나도 올라가고.

<너도 올라가고, 나도 올라가고.>

 

헬기장에 착륙한 고추잠자리

<헬기장에 착륙한 고추잠자리>

 

세월아 네월아 올라오는 것도 수고했다고 맛있는 비빔밥을 저 자신에게 선물했습니다.

 

밥 먹기 전 정기받으러 돌고 도는 사람들.

<밥 먹기 전 정기 받으러 돌고 도는 사람들> 

 

정말 너무도 오랜만에 정상을 밟았습니다. 정산을 꼭 밟아야 하나라는 느림보주의자의 눈으로

봐도 정상에서 내려다 본 아래는 건물들이 도미노처럼 즐비해 있었습니다.

바위는 따땃했습니다. 

 

모두들 떠난 뒤 남은 적적해진 정상

<모두들 떠난 뒤 남은 적적한 정상>

 

빛을 너무 먹은 핸펀 카메라가 자동으로 초점을 흐립니다.

<빛을 너무 먹은 핸펀 카메라가 자동으로 초점을 흐립니다.>

 

정상까지 따라온 아까 그 고추잠자리

<정상까지 따라온 아까 그 고추잠자리>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얽혀버릴 하행길을 암시해주는 거미줄

<얽혀버릴 하행길을 암시해주는 거미줄>

 

사람 뒷꽁무니를 따라갈 땐 명확하던 길이 두 갈래, 세 갈래, 무한대로 펼쳐집니다.

여보세요~ 라고 외치자 까마귀가 까악~ 하고 대답합니다.

사람을 잃고, 이정표를 잃었습니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연락을 취해봅니다.

민호 씨의 문자 보내는 삐뽕삐뽕 소리가 묘하게 울려 퍼집니다.

..잘못 온 것 같습니다. 드디어 선택의 순간.

되돌아갈까.

두 사람 머리 위로 기차처럼 길게 늘어서는 무수한 말줄임표 끝에는 까마귀가 울었습니다.

내려오던 길이 너무 미끄럽기도 했고, 가파른데다가 꽤 왔던지라

어차피 일행도 하산중일거라 판단, (..청계사 생각을 못했습니다.)

계속 끊기는 핸펀을 때려주고,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정글숲은 축축히 젖은 검은 땅과, 미끄덩미끄덩 발걸음, 습기 가득한 열기 속에서

잔치가 벌어진 모기떼들을 헬리콥터처럼 손목을 돌려대며 내려갔습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고, 이정표가 없어도..

누군가가 지나간 발자욱들로 다져진 땅과

쓰러진 나무와 무성히 자란 풀숲이 앞을 막아도..

막다른 곳까지 가보면 길은 항상 이어집니다.

다 내려가면 도대체 일행과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걸까? 내가 있는 곳은 어디쯤일까?

혹시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 아닐까.

 

그 와중에도 예쁜 것들은 빛을 잃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도 예쁜 것들은 빛을 잃지 않습니다.>

 

하산길은 의외로 길었습니다. 아까부터 다 내려온 듯한 분위기는 물씬 풍겨주지만,

절대로 끝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마침내 다른 등산객도 만났으니, 길은 길인가 봅니다.

 

피곤한 발을 차갑게 얼려준 졸졸 시냇물

<피곤한 발을 차갑게 얼려준 졸졸 시냇물>

 

어떤 아저씨의 타령가락이 울려퍼지는 하행길은 그렇게 나름대로 신선하고 즐거웠습니다.

중간에 잠깐 일을 보고 뒤따라가겠다는 민호씨를 뒤로하고 낼름 내려오다가..

아까 그 아저씨 일행에게 혼났습니다.

그래서 얌전히 기다렸습니다. 그 사이 쥐가 나서 고생했다더군요. 미안합니다.. 도움이 못돼서..

다 온 것 같은 하행길은 그 뒤로도 30분은 족히 내려온 듯 합니다.

다 내려오니 군인 두 명이 저희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더군요.

..군부대랍니다.

겨우 마을로 나와 길에 물뿌리는 아저씨께 가장 가까운 역이 어딘지 여쭈어보자

양재역이랍니다. ..역시.. 뛰어봤자 벼룩이었던 것입니다. 이상한 나라는 안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버스정류장을 물어보는 저희에게 그 아저씨는 직진하다가 (손은 왼쪽으로 꺾으시며)

오른쪽으로 가면 된답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같았습니다.

결국 버스에 올라타 서늘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퇴근 길 전철 속은 아침처럼 여전히 사람이 많았습니다.

뗏국물이 흐르는 얼굴에 땀냄새 푹푹나는 몸으로 서 있기 민망하야 바닥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노라니 한 아저씨가 내리시면서 자리를 양보해주셨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씻지도 못한 채 저녁하고, 청소하고.. 축구보다가 단잠에 빠졌을 때 즈음..

문자 때문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다른 분들이 많이 걱정하셨다는군요..

죄송합니다..

어쨌든 무사히 내려와서 한시름 놓으셨는줄 알았는데..

저는 나름대로 편안하고 즐겁게 내려왔는데, 다른 분들이 저희 신경쓰시느라 마음 불편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현명하게 길을 잃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위도 쉬고, 나도 쉬고.

<바위도 쉬고, 나도 쉬고.>

 

오늘의 교훈. 스테로이드는 함부로 복용하지 말자.

오늘의 소감. 민호군, 더운데 첫산행자 따라 고생했습니다. 몸조리는 천천히 하세요.

 

같은 산을 올라 다른 산을 내려왔습니다. 반쪽짜리 후기가 되어버렸네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이건 길도 아니고, 길이 아닌 것도 아닌 길 내려오며

무엇이 재밌었을까요??

자, 여러분들의 즐거운 상상 후기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이경오

2007.08.25 17:40
*.53.184.29
예술로 가는 법

한방 먹었어요.
후기 중에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보기는 쉽지가 않아요.
따를 당해서 그런가... 따를 해서 그런가...
즐거운가... 즐겁지 않은가...
항상 고민되는 문제가 있어요.
즐겁게 떠들고 돌아오면 즐거운가...
고독하게 산과 이야기 하며 돌아오면 즐거운가...

쏟아지는 잡목의 청계산을 안녕하고 돌아왔을 때.
다음엔 보기 힘들 거 같던 청계산이...
이렇게 흠뻑 젹셔질 줄이야...

수진씨, 같이 하는 즐거움도 다음에는 꼭 느껴보시길~~



<제법 잘 어울릴 법 한 음악을 걸어 보았습니다.>

profile

박민호

2007.08.25 20:15
*.142.232.179
오후 6시경 하산 - 오후 7시경 양재 도착 - 오후 8시경 버스승차--;;; - 오후 10시 이후 귀가..
퇴근길 양재부터 강남, 고속터미널을 거쳐 올림픽 도로가 얼마나 막히는지 제대로 알게 된 하루..
집에 도착하니 축구는 막 끝났다더군요..

SM산행중 산에서 내려와 맥주를 마시지 않은 첫 산행인것 같았습니다..^^
내일,어제 못 마신 맥주 마시러 나갈께요..

이시연

2007.08.25 20:23
*.215.170.96
수진이...보기보다 너무 멋진걸(girl)? ^^
혼자 멋지게 노는 사람 너무 좋아~!
profile

심산

2007.08.25 21:10
*.235.169.165
하하하 수진 그것도 나름대로 멋진 경험이야
길을 잃고 헤메다...^^
담에는 꼭 하산주 같이 하자구!^^

조현옥

2007.08.25 22:50
*.62.89.4
사진과 더불어 글이 있으니 감칠맛 나네요.^^
길을 잃고도 그 상태를 즐길 수 있는 힘! good!
사실, 수진씨 첫 산행인데 이렇게 되서 걱정 많이 했거든요. ㅡ_ㅡ
물론 다 컸으니 (^^) 잘 알아서 하시리라 믿었지만, 같이 뒤풀이 못한게 정말 아쉬워요. TT

조인란

2007.08.25 23:07
*.90.55.5
수진씨 후기를 보니 길은 우리가 잃은 것 같군...!^^

신월명

2007.08.25 23:21
*.53.184.29
난, 이제야 길을 찾은 느낌.

고수진

2007.08.25 23:40
*.177.69.189
경오님. 노래 좋아요 ^^* 소리가 안들려서 무음의 새로운 노래인줄 알고 힘들어했어요. ㅋㅋㅋ 그리고.. 따를 당한 것도, 따를 한 것도 아니에요 ㅋㅋ 별 생각 없이 그냥 가는대로.. ㅡㅡ 신화 마을 사람들은 이런 산행이나 후기를 써요~ 신화 마을로 오세요~ (홍보홍보홍보홍보!)

민호군, 정말 집에 가는 길 오래 걸렸네요~ ^^; 괜히 나땜 뒷풀이 참석 못한 것 같아 미안해요 ㅜㅠ 신화 마을도 뒷풀이 많아요.

시연언니.. 혼자 놀려고 한게 아닌데.. ㅜㅠ 민호군이 말동무 해줘서 재밌었어요~ 담엔 언니도 뵈요 ^^ 언니 신화반 2기는 들으세요?

산샘. 길을 잃어도, 안잃어도 다 좋아요. 헤벌쭉~ ^^* 다음엔 잠자리보다 좀 더 큰 거 잡아드릴게요.

현옥님. 걱정끼쳐서 죄송해요 ^^; 다 커서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 신화반은 아무도 걱정 안하고 잘해요. ㅋㅋ 담엔 파업하고 뒷풀이 참석할게요. ^^

인란님. 월명님. (근데 저.. 얼굴와 이름이 매치가 안돼요 ^^; 제가 사람 얼굴이랑 이름 기억 못하는걸로 유명해요 ㅋㅋ) 길만 안 잊어버림 되지 않겠어요? 아하하~ ..뭔소리래 ㅡㅡ 신화반 찾아오는 길은 알려드릴 수 있어요!

어쨌든 신입이니 성의있게 댓글 달았습니다. 아~ 힘들어요~~

조인란

2007.08.26 00:08
*.90.55.5
음...원익샘은 든든하시겠다!
수진양의 정체는 그리스신들이 작당해서 급파한 비밀요원...^^

김영희

2007.08.26 00:30
*.109.62.247
황당했을 군인들 얼굴이며... 손짓과 말이 따로 노는 아저씨며... 선하게 그려지네요^^
별명을 얻게 되실 듯... 이상한 청계산의 '엘리스'^^

신월명

2007.08.26 00:37
*.53.184.29
교정기에 무채녀가 월명이구,
고운 얼굴에 주방장이 인란이당.

김원익

2007.08.26 07:56
*.149.59.125
수진의 정체를 아는 건 란 언니뿐. 왜 다들 모를까?ㅋㅋㅋ
그래도 다행이다. 난 민호랑 우리 수진 요원이 스캔들 날까봐 조바심났는데.
수진이가 민호랑 단 둘이서 길 잃었다고 메시지와서 빨리
본대와 합류하라고 했지. 심산스쿨에 소문나면 큰일난다고.
역시 예상한대로 우리 SM 식구들 수준은 높아......^^
근데 노래 참 됴오타! 수진 글 분위하고 진짜 잘 어울리네.....

고권록

2007.08.26 10:29
*.63.83.79
이상한 정원을 한 바퀴 돈 기분이네 ^^/ 원익 샘님 왜 '조바심'을 냈을까? ㅎㅎ
profile

박민호

2007.08.26 13:49
*.142.232.179
원익 선생님~!
걱정하시던 그 스캔들은 이미 났다고 하더라구요..(당사자 둘만 빼고)
누구는 길 잃고, 일행 잃고, 길도 아닌 곳에서 당혹스러워 미치겠는데 그런 연락이 와서..
하산길 내내 짜증이 머리 끝까지 올라오는걸,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혼자 사진 찍기에 여념 없던 수진 누나를 보고 그나마 짜증이 많이 작아졌던것 같아요..

수진누나~!
누나땜에 뒷풀이 안 간거 아니예요, 뒷풀이 한다던 장소보다 양재에서 귀가 하는것이 저한테도 편했기 때문에 안 간거였어요..
괜히 미안해 하지 말길 바래요..
profile

이진구

2007.08.27 02:01
*.121.48.234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을 읽고 난 느낌이랄까...좋네요, 좋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3 청산에 살으리랏다 (뒤늦은 후기) + 23 조현옥 2007-10-15 1334
32 생일 날 + 29 조인란 2007-10-12 1467
31 북한산...이번엔 예정대로 다 갔다. + 28 윤혜자 2007-10-10 1335
30 감사합니다 + 12 박민호 2007-10-10 1090
29 눈앞에 아른아른 + 9 조성은 2007-10-09 981
28 저 자야 하는 거 맞지요? + 11 신월명 2007-10-09 1147
27 조용한 나만의 길....(후기요) + 10 최상식 2007-09-23 1203
26 9/21 산과 영화 + 12 윤기호 2007-09-23 1119
25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 12 조현옥 2007-09-22 1745
24 첫 산행...중독의 전초가 느껴진다 + 12 윤혜자 2007-09-22 1058
23 죄송합니다.. + 12 박민호 2007-09-22 999
22 9.21 북한산 산행 후기 + 11 임종원 2007-09-21 1001
21 산과 먹거리. 사람들. + 9 윤기호 2007-09-09 955
20 카카카카 ^^ 희태에요 카카카카 + 17 정희태 2007-09-09 1227
19 I WAS SORRY FOR 2 FACTS! + 14 심산 2007-09-09 1045
18 광인일기 + 14 조현옥 2007-09-09 995
17 여름아, 그동안 고마웠다. + 20 신월명 2007-09-08 1231
» 길 잘 잃는 법 + 15 고수진 2007-08-25 1398
15 다시 일상으로~~ + 12 정경화 2007-08-13 1232
14 산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25 조현옥 2007-08-11 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