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바쁘단다. 3월달이라 새로운 각오와 계획으로 뭔가들 하고 있나 보다. 그나마 진기 형님조차 전날 인디반 번개에서 완전히 뻗으셨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그래도 거기까지 가서 그냥 올 수 없다. 무엇보다 간만에 북한산을 봤더니 가슴이 두근거려 진정이 안된다. ‘그래! 혼자 오르자!’ 대동문까지만 올라갔다와도 된다는 성훈 어머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수봉까지 오를 결심을 굳게 먹었다. ‘먹는 시간 빼놓곤 계속 올라야지!’
할렐루야 기도원을 타고 오르는 초입은 잔돌이 많아 껄끄러웠을 뿐 아주 평탄했다. 그러나 웬걸 이 때부터 빙판길이 계속 깔려있어 봄이라고 아이젠도 안 챙겨간 나는 산을 걸어 오르는 건지 기어 오르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대동문까지 간신히 올라가니 12시가 좀 넘었다. 점심시간이다. 북한산벽에는 홀로, 혹은 한 둘씩 올라온 등반객들이 점심을 까서 먹고 있다. 따뜻한 햇살이 눈부실 지경이고 산새들의 파닥거림이 귓속에 파 묻힌다. 어딘가 정말 봄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가서 밥을 먹고 싶다. 기어 올라왔더니 빙판길에 헤딩하는 것도 못할 짓이어서 칼바위으로 가면 빙판이 없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 길을 정하고 큰 바위에 엉거주춤 올라 진기형님 먹이려고 정성껏 싼 샌드위치를 펼쳤다.
종류별로 좋아하는 메뉴를 잡곡빵에 올려놓고 마구 진기형님 욕을 하며 허기를 채우는데 사방을 둘러보니 초봄인데도 짙은 녹음이 깔려 하얀 눈 위에 선명하다. 햐~ 정말 봄이로구나! 온통 봄에 폭 감싸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에 산에 올 때마다 맛 봤던 그 평화가 찾아온다.
그래, 이거다. 내가 산을 찾는 이유도, 산이 날 찾는 이유도 바로 이거다. 자연과 하나되었을 때의 이 평화... 선인들은 이 경지를 일컬어 物我一體라고 했음인가! 하지만 나는 ‘제자리 찾기’라고 하겠다. 사회가 언제나 목청이 터져라고 외쳐대는 인본주의는 어느덧 탈색되고 과장되어 모두들 자신을 우상으로 모시기에 여념이 없다. 아니, 인본주의 자체가 문제다.
내가 행복해야 된다.
내가 가져야 된다.
이건 내꺼다.
내가 중요하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
정말 짜증스럽다. 신으로 모시기엔 도무지 어디 하나 변변치 못한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 뭘 어떻게 한다는 건가? 내가 아니라면 바보같은 네가 중심이 되면 어떻게 행복하다는 건가? 젖을 떼기도 전, 타자(엄마)와 자신을 인식하던 그 순간부터인가? 이런 망상은? 아니면 사회가 불어넣어 주는 것인가?
그렇다. 산에서는 이런 잡소리, 개소리들이 없다. 내 인생에서 배운 모든 것보다 산에 배운 한 가지가 더 크게 다가온다.
난 그냥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래.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야만 하며, 앞으로 그렇게 죽어가리라. 때가 되면 나무가 잎을 벗고 다시 쓰듯이 부지런하게 자기 맡은 바 소임을 다 할 것이고, 산의 금수들이 자신의 존재를 과장하지 않듯이 내가 세상의 어느 구석임을 인정할 것이다. 해가 쬐면 눈이 녹듯이 스르르 죽어갈 것이다.
그래서이다. 이런 평화는.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면 구겨지듯이 우리는 자신의 존재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써 상처받고 울부짖는다. 다 억울하고, 다 남 탓이다. 하지만 산에서 배웠다. 내 자리라야 한다. 다른 자리에 있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 본디 자연의 극히 미미한 부분으로 태어났음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생만 지'랄맞다. 인디언들처럼 살아야 한다. 이런 배움은 극한 절망으로 일관해 온 지난 세월들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도록 했고, 자신을 돌아보고 해야할 일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게 했다. 감사하다. 제발 이 마음이 변치 않기를 그 자리에 앉아 간절히 기도했다.
둘러보매 온통 자연으로 둘러싸인 내 존재가 너무나 평화스러워 목이 메인다. 그래도 꾸역꾸역 샌드위치를 다 먹고 칼바위를 우회하기 위해 발걸음을 뗀다. 칼바위엔 아직도 눈이 두텁게 쌓였고 얼음이 꽝꽝 얼어 위험하기에 우회로를 물어 두었다. 머릿속에 ‘안전! 안전! 아직 할 일이 있으니 다치거나 죽으면 안 된다!’ 경보를 울리고 조심조심 오른다. 우회로도 생각보다 정말 험하다. 투덜투덜 욕이 나온다. ‘으씨! 쉽대매! 여하튼 다들 뻥만 쳐!’
어? 그런데 다 오르니 왜지? 칼바위 정상이다.ㅡ_ㅡ
산쌤이랑 같이 왔으면 럼두들 등반기의 정글이라고 마구 놀림 받았을 꺼다. 그뿐이랴! 먹을 사람도 없는 샌드위치는 3인분이나 싸왔으니 벌리가 따로 없고 미끄러지다 인수봉엔 오르지도 못해놓고 별 철학적인 사색으로 윤색하려 하니 바인더가 따로 없다.
다시 시작된 빙판을 기어 내려오는 길에 만난 아주머니, 아저씨들과는 동문서답만 늘어놓았으니 콘스턴트가 언어학에 대해 자문을 요청해 올지도 모를 일이다. 혼자서 럼두들 등반대의 반이다. 나도 참 대단하다...TT
이런 몽상에 혼자서 낄낄거리며 내려오니 아직도 2시밖에 안됐다. 참 가뿐한 산행이었다. 신경쓰거나 대화할 사람없이 혼자서 한적하게 하는 산행도 정말 별미이다. 머리와 육신이 한껏 정화되어 다시 정신 사납고 어지러운 세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자신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칸첸중가 팀들은 다들 무사히 다녀왔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어떤 모습들로 변했을까 가슴이 두근거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