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안에서 역사를 논하다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제4회 숙종, 북한산성을 오르다
글/심산(한국산서회)
사진/서영우(한국산서회)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이 회를 거듭하면서 점차로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 사전 참가신청자의 수도 늘어만 가고, 행사 당일에 펼쳐지는 질문과 토론의 열기도 뜨겁다. 등산행위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실행하자는 것이 애초의 취지였으니 여러 모로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다. 횟수를 거듭하면서 참가자들의 주문도 많아졌다. 그 중의 하나는 북한산을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4회 인문산행의 대상지는 북한산으로 정했다.
하지만 한나절의 산행으로 돌아보기에는 북한산이 너무 크다. 그리고 북한산은 너무 많이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1994년에 ‘단위면적당 탐방객수 세계 1위’를 기록하여 기네스북에까지 등재되었겠는가. 인문산행의 경로를 고민하던 주최측은 결국 ‘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문화사업팀’에 안내 및 해설을 부탁하기로 했다. 인문산행 최초로 외부 강사를 초빙한 것인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북한산성문화사업팀에서 파견하여 인솔 및 해설을 맡아준 심준용 씨(A&A문화연구소장)와 진행을 도와준 박종윤 씨(경기문화재단)는 매우 해박했으며 친절했다.
북한산성문화사업팀에서는 세 갈래의 길을 추천한다. 첫째, 숙종대왕의 행차길을 따라 가는 ‘숙종의 길’, 둘째, 훈련도감 순찰로를 따라가는 ‘원효의 길’, 셋째, 북한산성 암문탐방로를 따라가는 ‘비밀의 길’이다. 우리는 첫째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행사의 제목은 [숙종, 북한산성을 오르다]가 되었다. 2017년 6월 3일(토) 아침 10시, 미세먼지는 걷히고 햇살은 따가와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던 날, 인문산행팀들은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 앞에서 힘찬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북한산성의 최대 약점은 낮은 서쪽 계곡길
북한산성 내외에는 식량 및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인 군창(軍倉)이 8개소에 분포되어 있다. 산성 내에는 상창, 중창, 하창, 그리고 호조의 호조창, 훈련도감의 훈창, 어영청의 어창, 금위영의 금창 등 7개가 있었고, 산성 밖에는 평창이 있었다. 산성계곡 입구에서 하창까지 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대서문을 통과하여 가는 능선길(허가를 얻은 자동차의 출입이 가능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칠유암이며 향옥탄 등을 통과하여 가는 계곡길이다. 초여름 날씨의 산행이었으니 우리는 당연히 계곡길을 선택한다.
서암문에서 꿈틀거리며 달려온 산성이 대서문 쪽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당연히 수문(水門)이 있다. 예전에는 음식점이었던 건물을 인계 받아 한 동안 교육시설로 이용했던 곳인데 그 뒤편에 야외 강의에 적합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일행들은 땀을 식히며 ‘본의 아니게’ 산성이 끊긴 지역의 속살을 찬찬히 뜯어본다.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 37년)의 봄부터 가을까지 단 6개월만에 축조되었다. 어른 걸음으로 약 7,620보에 해당하여 거의 12K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성을 반년만에 쌓은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성의 기초에 해당하는 고성(古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그것을 1388년(고려 우왕 13년)에 쌓았다는 중흥산성으로 본다. 숙종은 축조 이듬해인 1712년 4월 10일(음력) 몸소 북한산성에 행차한다. 우리는 오늘 그 길을 따라가는 중이다. 산성을 둘러본 숙종은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重城)을 쌓지 않을 수 없다”는 진단을 내어놓았다.
북한산성은 외적의 침입 등 유사시 임금을 위시한 조정이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 피란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당연히 아름다운 폐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동쪽에는 보현봉 문수봉, 남쪽에는 용혈봉 용출봉, 북쪽에는 백운대 만경대 등 험준한 바위 봉우리들이 즐비하여 안심이 되지만, 유독 서쪽만은 그 지대가 낮아 취약점을 드러내고 만다. 간단히 말하여 의상봉과 원효봉 사이의 산성계곡이 아킬레스의 건이 되는 형국인 것이다. 그래서 숙종은 이곳에 이중의 성(重城)을 쌓으라고 명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성곽이 끊어진 곳에 서 있다.
현재의 북한동역사관 부근의 너른 공터가 과거의 하창지
그런 연유로 북한산성 안에는 두 개의 수문이 있다. 서암문과 대서문을 잇는 산성의 끊어진 곳에 하나, 중성문 옆에 하나. 수문 근처에는 그 옛날 공사를 책임지고 시행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를테면 축성패장은 누구, 수구패장은 누구, 석수편수는 누구 하는 식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공사실명제’에 해당한다.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토록 열심히 축조한 수문들은 그러나 지금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공사가 부실해서가 아니다. 이따금 폭우나 장마가 쏟아지면 커다란 바위들이 마구 굴러 부수는 바람에 파괴와 재건을 하염없이 반복했던 까닭이다.
아름다운 계곡길을 따라 오르며 칠유암(七遊巖)을 지나친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탁족회를 즐기던 곳인데 현재 남아있는 저 바위글씨는 시인 강박(姜樸, 1690~1742)의 것이라 전한다. 꽤 넓직한 바위 위에 차일을 치기 위한 바위구멍들이 여럿 남아있는데, 접근이 금지되어 있어 그림의 떡이다. 이윽고 대서문에서 이어지는 너른 길과 만나면 퀭하니 넓은 광장이 나타난다. 이곳이 예전의 하창(下倉)이 있던 하창지인데 현재에는 북한동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들을 닦아내며 심준용 강사의 ‘감춰진 옛이야기’를 듣는다.
심강사는 예전에 이곳에서 음식점 등을 경영하였던 본토박이 북한동 주민들 여럿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인터뷰들 중 흥미로운 일화들을 몇 개 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전에 이곳은 북한산에서 가장 큰 장터였다. 이 주변에 살던 이들이 약초며 산나물 혹은 땔감 따위를 이곳에 내다 팔았는데 벌이가 짭짤했다고 한다. 둘째, 이곳에 즐비하던 음식점들 역시 ‘먹고 살만했다’고 한다. 가끔씩 손 큰 등산객들이 돼지나 개를 한 마리씩 잡으면 ‘돈을 세다가 잠이 든’ 날들도 부지기수였단다. 셋째, 당시 북한산에 남아있던 절들은 이따금 비밀 도박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자면 ‘산중 하우스’였던 셈이다.
이쯤에서 나는 늘 궁금했던 의문을 피력한다. “왜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은 그렇게 되지 못했는가?” 심강사의 답변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정책들 중의 하나는 ‘현재 그 유적지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전래의 문화가 지속가능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현재에도 사람들이 거주하며 옛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이때의 문화란 각종 제례는 물론이거니와 의식주 모두가 포함된다. 그런데 북한산성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정책은 ‘거주민과 산장 혹은 가게들을 모두 내쫓고 청정 자연만을 유지한다’이다. 덕분에 북한산성은 유네스코의 기준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것이 최선의 방침인가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성문을 통과하여 중흥동 계곡 안으로
북한산성은 서쪽에만 이중의 문을 두었다. 외곽을 맡은 것이 대서문이고 내곽을 맡은 것이 중성문이다. 중성문의 양쪽으로도 역시 산성의 성벽이 보이고 제2의 수문이 들어서 있다. 중성문 바로 옆에는 시신들을 밖으로 내보내던 시구문이 있다. 산성 내에서 죽은 사람들은 이 문을 통해 나간 다음 최종적으로 서암문을 통하여 밖으로 옮겨졌다. 현재의 구파발 근처에는 최근까지도 24인용 혹은 12인용 상여들을 대여해주던 상여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북한산 안에는 유난히도 마애각문(摩崖刻文,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이 많다. 산영루와 비석거리에 이르기 전의 옛길 한 귀퉁이에도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북한산의 바위글씨들에 대해서는 오늘의 인문산행을 함께 하고 있는 조장빈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바 있다. 바로 [산서] 제27호(2017년 1월)에 실린 ‘북한산의 바위글씨’라는 소논문이다. 백운동문을 지나 비석거리 위로 빠져나오면 최근(2014년)에 복원된 산영루(山映樓)가 우리를 반긴다. 얼마 전의 답사산행에서 고려대 심우경 명예교수는 산영루(山影樓)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반론을 제시한 바 있다.
참가자들은 산영루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맞은 편 너럭바위 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점심식사를 즐기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산영루가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은 이정구(李廷龜, 1564~ 1635)의 [유삼각산기]이다. 그가 이 글에서 “산영루 옛터로 내려왔다”고 한 것을 보면 이 누각은 북한산성을 축조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듯하다. 외부 강사를 초청한 까닭에 오늘은 유난히도 침묵을 지키던 조장빈이 이설(異說)을 제기한다. 현재 복원되어 있는 산영루는 제 자리에 들어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수년 전 ‘마이아트’ 옥션 경매에 정선의 [인수봉도]라는 그림이 출품된 적이 있다. 하지만 북한산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림 속의 봉우리가 인수봉이 아니라 노적봉이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챌 수 있다. 이 그림을 들여다보면 현재의 중흥사 앞에 홍예교가 있었고 그 위에 누각이 하나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산영루라는 것이다. 그림 안에는 중창과 진국사도 보인다. 조장빈에 따르면 현재 복원되어 있는 산영루는 성능이 [북한지]에서 언급한 항해루(抗瀣樓)의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여기에서의 항해란 밤에 생긴 맑은 이슬을 뜻하는데, 보통 신선이 마시는 차를 의미한다. 향후 보다 진전된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어찌되었건 현재 산영루와 중흥사가 들어서 있는 중흥동 계곡이야말로 북한산성 안에서 가장 내밀하고, 아름답고, 안전한 곳이다. 현재 중흥사는 서울 잠실 불광사의 지홍 스님이 회주를 맡아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중흥사 앞에는 중창지가 있고,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호조창지와 경리청 상창지가 있으며, 그 위가 바로 행궁지이다. 행궁은 북한산성의 축조가 완성된 이듬해인 1712년 5월에 완공되었다. 대략 4,000평 안팎의 경사진 대지를 3단으로 조성한 이후 도합 124칸에 이르는 임시 왕궁이 들어선 것이다. 숙종과 영조가 이곳을 여러 번 찾았다.
참가자들은 북한산성 행궁지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명상에 잠긴다. 이곳이 북한산성의 핵심이다. 맞은 편 시단봉을 바라보면 동장대가 보이고, 뒤를 돌아보면 눈길을 가로막는 상원봉 아래 남장대지가 있다. 노적사 위의 북장대지에서도 이곳이 빤히 내려다보일 것이다. 북한산성의 행궁은 가장 안전한 곳에 자리 잡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음을 뼈저리게 느꼈던 조선왕조로서는 북한산성을 짓고 그 안에 행궁을 건설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 앞에 남아있는 행궁지는 그저 버려진 유적지요, 잊혀진 공간이며, 아직도 조사가 계속되어 파랗고 거친 천막들로 온통 제 몸을 가린 어수선한 발굴대상지일 뿐이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2년 조선총독부는 이곳을 영국의 성공회에게 10년간 임대해주기도 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들이 토사에 휩쓸려 간 것은 1915년에 들이닥친 대홍수 기간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역사는 고여 썩지 않는다. 우리는 무거운 상념을 떨치고 다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는 금위영 유영지에 들렀다가 금위영 이건기비를 보고 대동문으로 올라설 것이다. 북한산성을 축조한 이듬해, 유사시의 조정이 들어설 곳을 미리 둘러보고 향후의 대책을 논의했던 숙종의 길을 따라, 한국산서회 인문산행팀의 발걸음은 계속 된다.
월간 [산] 2017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