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9-08 02: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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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작가 지망생들에 대한 의문
[img1]
심산스쿨 홈페이지의 4대 메인 메뉴들 중에 [심산서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메뉴는 다시 여러 개의 하위 메뉴로 나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영화]이고, [영화]의 하위 메뉴들 중의 하나가 [할리우드작가열전]입니다. 제가 지난 2000년 1년 동안 [씨네21]에 연재했던 글이지요. 제가 선정(!)한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작가 50인의 라이프스토리와 필모그래피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제가 쓴 글이긴 하지만 도무지 원래의 파일을 찾을 수가 없어(몇 년 전에 멍청하게도 하드를 송두리째 날려버렸거든요...ㅠㅠ) [씨네21], [아트앤스터디], 모르는 사람의 블로그 등을 샅샅히 뒤져 가까스로 복원해 놓았습니다. 며칠 전 50개의 파일을 모두 찾아 이곳 홈페이지에 모두 올려놓으니 스스로 뿌듯했습니다...^^

그런데...[할리우드작가열전]에 대한 조회수를 살펴보노라면 문득 야릇한 의문(!)이 듭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조회수가 낮아서 삐진 거 절대 아닙니다. ..^^...제게 든 의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시나리오작가 지망생들은 무슨 공부를 할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거겠지요. “시나리오작가 지망생들은 영화를 보기는 하나?” 더 나아가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시나리오작가 지망생들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일종의 존경심을 품고 있는 ‘시나리오작가’를 한 명쯤 가지고 있을까?”

문학 쪽에 계신 어른들은 한탄합니다. “요즘 애들은 도무지 인문교양이란 게 없어. 뭐 도대체 읽은 책들이 없단 말이야!” 이를테면 ‘마땅히 읽었어야할’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나 [카프카 전집] 혹은 [황석영 작품집] 따위도 읽지 않았다는 거지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뜻에서 ‘문학의 시대’는 가고 ‘영화의 시대’가 도래한 거지요. 그래서 저는 어른들을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말씀 올립니다. “걔네들한테는 인문교양 대신 ‘영상교양’이라는 게 있는 거에요.” 분명합니다. 요즘 세대들에게는 뛰어난 영상교양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컴퓨터와 TV와 DMB에 노출되어 있으니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지요. 덕분에 뛰어난 ‘영상적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과연 영상적 감각만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까요? 과연 그것만 있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걸까요?

영화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되려면 ‘영화교양’이라는 게 있어야 됩니다. 소설가가 되려면 ‘인문교양’ 혹은 ‘소설교양’이 있어야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나리오작가 지망생들에게는 ‘영화교양’이라는 게 있을까요? 워크숍 도중 마주치게 되는 경우들을 보면 대답은 분명히 부정적입니다. 그들에게 앨프리드 히치콕이나 빌리 와일더 영화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겁니다(솔직히 말씀 드려서 처음에는 "쇼크"를 먹었는데...이제는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영화 속의 예를 들려고 할 때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들은 기껏해야 [반지의 제왕]이나 [살인의 추억] 혹은 [왕의 남자] 정도입니다. 이렇게 ‘대박’이 터진 ‘요즘 영화들’ 몇 편만 보고나면 이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걸까요?

쓰다 보니...글이 너무 무거워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왕 말문을 텄으니 끝까지 가보지요. 시나리오작가 지망생들의 ‘영화교양’을 측정해보는 가장 쉬운 방법들 몇 가지를 알려드리지요. 혹시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가 쓴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 1001편]이라는 책을 아십니까? 이 책에 실린 1001편의 영화들 중 몇 편이나 보셨습니까? 1001편은 너무 많다고요? 그럼 [필름4]에서 선정한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 50편] 중에서는 몇 편? 혹시 [WGA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시나리오 101편]이라는 문건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필름4]나 [WGA]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면 상황은 심각합니다. 필름4 선정 50편 중에서 절반도 본 적이 없다면, WGA 선정 101편 중에서 절반도 본 적이 없다면, 상황은 암울합니다. 인문교양까지 요구하지는 않습니다(물론 그것까지 갖추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영화교양이라는 것은 갖추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영화교양’이라는 것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그는 필름4 선정 50편 중의 45편 이상, WGA 선정 101편 중에서 90편 이상은 꼼꼼히 들여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쯤에서 분위기도 풀 겸 농담 같은 실화 하나. 서울대 영문과에 김성곤 교수님이 계십니다. 셰익스피어 연구로 유명하신 학자이지요. 그런데 이 분은 최근 영문학 관련 책보다는 영화 관련 책을 더 많이 쓰셨습니다. 어떤 기자가 물었죠. “왜 영문과 교수님이 영화 관련 책을 쓰세요?” 김교수님이 씁쓸하게 웃으시며 답했습니다. “수업시간에 셰익스피어 작품이야기를 하면 다들 못 알아들어요. 읽지를 않으니까.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하려면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예로 들면서 강의하는 수밖에 없답니다.” 서울대 영문과 재학생들조차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안 읽는 대신 [셰익스피어 인 러브]라는 영화를 봅니다. 이런 현상이 ‘문학에 대한 영화의 승리’를 의미하는 걸까요? 답변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들은 ‘문학도’입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려는 ‘영화학도’라면 다른 잣대를 들이대야 되겠지요. 여러분들은 셰익스피어와 관련된 영화를 몇 편이나 보셨습니까? 그 영화들의 시나리오는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어떻게 다릅니까? 알 파치노가 감독한 [뉴욕광시곡]은 셰익스피어의 [러처드3세]를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했는지 아십니까?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시나리오작가 톰 스토파드가 본래 현대 영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희곡작가 출신이며, 그의 감독 데뷔작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가 어째서 [햄릿]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칭송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시나리오작가 지망생들에게 ‘영화교양’은 필수입니다. 필수 중의 필수, 즉 거의 ‘기본’이지요. 시나리오작가가 되려면 이 ‘기본’ 위에 덧붙여 ‘남다른 전공’까지 갖추어야 합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시나리오작가들에 대한 교양’이라고나 할까요? 소설가 지망생들은 저마다 ‘존경하는 소설가’ 한 두 명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작가의 작품 목록을 줄줄이 꿸뿐더러, 여러 번 읽어보았고, 심지어는 필사작업(“베껴쓰기”)을 해보기도 합니다. 시인 지망생이라면 딜런 토머스나 자크 프레베르 혹은 황동규의 시 수십편 쯤은 줄줄이 외워야지요. 래퍼 지망생이라면 투팍샤커나 에미넴 혹은 리쌍의 노래들을 서너 시간쯤 쉬지 않고 읊어댈 수 있어야 하고요.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저만 해도 대학시절 조세희나 황석영의 단편들을 아주 여러 편 베껴쓰기 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이 쓴 전작품들이 언제나 책상 앞에 줄줄이 늘어서 있었지요. 그런데 시나리오작가 지망생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들께도 ‘존경하는 시나리오작가’가 한 두 명쯤 있습니까? 그 작가의 필모그래피를 줄줄이 외웁니까? 그 작가의 명품 시나리오를 베껴써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작가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까? 그 작가의 라이프 스토리에 대해서 눈꼽 만큼의 관심이라도 가져보신 적이 있습니까?

시나리오작가가 되고 싶어 하시는 여러분들께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탄탄한 인문교양과 폭 넓은 경험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책이라면 펼쳐보기도 싫으시다고요? 그렇다면 인문교양을 포기하시는 거지요. 좋습니다. 인문교양이 없다면 영화교양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고작해야 ‘지금 이곳’의 영화, 국내 박스오피스 1,2 위를 다투는 영화들만을 봐서는 ‘영화교양’이라는 것이 쌓일 리 만무합니다. 흔히들 ‘클래식’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을 찾아보세요. 위에 언급한 필름4 선정 50편, WGA 선정 101편,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 선정 1001편 등이 그런 영화들입니다. 하지만....시나리오작가가 되시려면 영화교양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시나리오와 시나리오작가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드세요. 비록 제가 선정한 것이지만 이곳 홈페이지의 [할리우드작가열전]에 거론된 시나리오작가들은 그 한명 한명이 모두 ‘박사학위 논문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들’입니다. 본인이 시나리오작가가 되려고 하는데, 존경하는 시나리오작가가 한 명도 없다면, 더 나아가 이름을 기억하는 시나리오작가조차 한 명도 없다면, 세상에 그렇게 허황되고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행여 이 글이 이곳 홈페이지를 찾아오시는 여러분들을 불쾌하게 만들지나 않았나 걱정이 됩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저 웬 개가 짖나보다...하고, 한 귀로 흘려들으시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내친 김에, 제 장점이자 단점인 ‘지나치게 솔직함’에 기대어 실토하자면, 제가 드린 말씀은 오래 전부터 느껴왔던 소회이자 에누리 없는 진실입니다. 저는 시나리오작가가 되려고 하시는 여러분들이 보다 넓고 깊은 인문교양과, 감독 지망생들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영화교양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언정 존경하는 시나리오작가의 필모그래피를 줄줄이 꿸 만큼 ‘시나리오작가에 대한 교양’을 충분히 갖춘, 그런 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할리우드작가? 경멸하기에 앞서 배울 점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입니다. 조만간 ‘충무로작가’에 대한 글들도 천천히 올릴 생각입니다. 좋건 싫건, 자랑스럽건 치욕스럽건, 그분들 모두가 우리의 선배님들입니다. 앞으로 [충무로작가열전]을 올리게 될 때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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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진

2006.09.08 09:03
뼈저리게 사무치는 지적이십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기본을 쌓아야겠습니다....

허연회

2006.09.08 09:56
헉....심장을 찌르시는 선생님의 말씀...따르게씁니다. 저는 무조건.....그리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분석하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게 작가로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김의선

2006.09.08 11:48
암울한 학생...
많이 찾아 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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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6.09.08 12:26
이 인간들이...동시에 집단적 반성모드로 돌입...?^^

김유진

2006.09.08 13:40
ㅠㅠ
맞습니다

더더욱 반성이 됩니다

많이 보고 많이 읽어야 겠습니다

사부님

김정호

2006.09.08 14:36
뜨끔!
마이 찔리네요....
- 암울한 학생

최상

2006.09.08 16:16
작가 열전을 보다 보면... 흑... 아무래도 갈 길이 멀어 보이고... 나름 암울해져요..-.-;;;
저도 반성모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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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6.09.08 16:29
감독 지망생들이 감독 열전을 보면 안 그럴까? 기업인들이 재벌 열전을 보면 안 그럴까? 다 마찬가지야...^^
반성 모드는 좋은데 암울 모드로 빠지면 곤란!^^ 별 거 아니네, 나도 할 수 있어! 이런 모드로 가야지...^^

최상

2006.09.08 16:56
네, 선생님^^ 명심하겠습니다(^.^)/

박주영

2006.09.08 22:18
다행이다 나만 찔리는게 아니구나^^;;

김의선

2006.09.09 00:54
ㅍㅎㅎ...떼거지로 이래 놓으면 다시는 쌤이 안 갈구겠지?(학의 깃털로 만든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음모의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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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6.09.09 01:08
너희들이 떼거지로 깨개갱~ 하는 것을 보고...이런 종류의 글을 정기적으로 연재할까 심각하게 고려 중이다.
진담이다! 이곳 홈피의 게시판을 통해 '작법'이 아니라 '태도'를 다루는...혹은 '충무로 시장의 법칙'을 다루는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 2]의 연재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은데...어떻게들 생각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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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범

2006.09.09 07:30
how to 보다 why to 가 중요하다는...ㅎㅎ. 쏘비박스에 올라온 인터뷰집도 멋진데 다운율 제롭니다. 현재는 ㅎㅎ.

박혜진

2006.09.09 10:34
저는 샘의 이런 글이 왜 좋을까요? 아마 다른 사람들 찔린다고 생각해서 그런가봐요..ㅋㅋ 나도 찔리지만ㅋㅋ
난 이상한 앤가봐... 흠..흠.. 기분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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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6.09.09 10:40
상범의 지적이 문제의 핵심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이런 것들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냉철한 판단력과 무시무시한 추진력이 필요한 거다...

김현중

2006.09.09 15:22
씨네21 연재될 때 싸이트에서 복사해다 제본했더랬죠... ㅎㅎ

권귀옥

2006.09.12 03:08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정환

2008.06.04 05:11
아, 이 글 조차 이제사 읽다니...
심장이 철렁 하다, 쿵! 했습니다.
두 번이나..

김은경

2009.06.19 01:53
오래전에 쓰신글이지만 지금 읽고 저 자신을 반성해봅니다.
저 자신에게 부과해야할 과제가 점점 늘어납니다.
그치만 부담보다 벌써부터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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