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스쿨이 [크레딧클럽]을 만듭니다
동문작가들을 위한 매니지먼트 프로그램 [img1]
심산스쿨동문회 안에 [크레딧클럽]이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여 “충무로에 막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동문작가들을 위한 매니지먼트 프로그램”입니다. 크레딧클럽의 회원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종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 경력이 있거나,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판매계약을 성사시켜 본 경험이 있거나, 영화사에 불려가 각색 계약을 맺고 작품을 완성해본 경험이 있는 동문작가들. 충분조건은 간단합니다. 심산스쿨 크레딧클럽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으리라 판단되는 사람. 다시 말하여 필요조건은 갖추었으나 그 동안의 작업 과정에서 충무로의 신뢰를 잃은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겁니다. 크레딧클럽은 가입 신청을 받지 않고 초청제로 운영됩니다. 제가 초청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면 그것을 수락하는 형식으로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현재 심산스쿨 동문작가들 중에서 이 조건에 부합되는 사람은 대략 스무 명 남짓 되는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분야까지를 포함한다면 회원수는 더 늘어나게 되겠지요.
당선되고 계약을 마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위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는 것만 해도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그래서 당선되거나 계약을 하면 모두들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적인 문제들은 정작 그 다음부터 발생합니다. 당선되거나 계약을 한 작품들이 영화화되어 개봉하기까지에는 엄청나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신인 작가들이 이 과정에서 크게 상처를 입거나 좌절하게 되지요. 계약 자체도 문제입니다.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불공정 조항들로만 가득 차 있는 계약서인데도 무턱대고 도장부터 찍는 거지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사의 기획을 맡아 시놉시스부터 작성하거나 남의 작품을 각색하는 과정에서는 더 많은 위험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A라는 영화사에서 B라는 프로듀서와 C라는 감독이 연락을 해와서 함께 일하자고 할 때, 그들이 과연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으며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에 대하여 신인 작가들은 그 어떤 정보도 판단력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연락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기뻐, 무작정 계약서에 도장부터 찍고, 이후 타임프레임 없는 중노동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리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의 운영위원장입니다. 올 한해 동안 마켓에서 팔려나간 작품수는 무려 26편. 놀라운 실적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계약 이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조사해 봤더니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결과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D라는 영화사가 E라는 작가의 시나리오를 샀습니다. 계약조건은 계약금 500만원, 중도금 500만원, 잔금은 크랭크인 이후 1000만원. 여기서는 일단 ‘크랭크인 이후’라는 잔금지불 조항이 문제가 됩니다. 이런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 자체가 문제지요.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계약금 500만원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일단 이것만 받고 시작하자, 면서 D라는 영화사가 E라는 작가에게 지급한 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25만원입니다. 250만원도 아니고 25만원! 그리고 E라는 작가는 D라는 영화사의 요구에 따라 지난 수개월 동안 자신의 시나리오를 수없이 고쳐 써오고 있습니다. 아직도 충무로에서 이런 구시대적 악행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물론 마켓운영위원장으로서 몹시도 분개했습니다. 현재 저희 마켓의 자문변호사를 통하여 법률적인 검토를 진행 중이고, 검토가 끝나는 즉시 가장 강력한 법적 제도적 제재조치를 취할 계획입니다. D라는 영화사를 마켓에서 영구축출하는 것은 기본이고 가능하다면 법률적 제소조치를 행할 것입니다.
무력한 개인들이 감당해 내야하는 시행착오와 좌절들
도대체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등퇴장과 경쟁이 자유로운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시장(마켓)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는 불량투자자, 불량제작자, 불량프로듀서, 불량감독들도 있기 마련이지요. 불량작가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장의 자기정화 기능에 따라 이런 사람들이 도태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신인 작가들이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고 좌절을 맛본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마켓 시스템 안에서는 D라는 영화사가 E라는 작가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현재의 마켓은 다만 좌판을 벌려놓은 곳일 뿐이지요. 현재의 마켓에서 계약 당사자는 D와 E입니다. 그들 사이의 계약에 마켓 운영위원회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E에게 D를 만나지도 말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마켓의 역할에 대해서는 운영위원회 내에서도 아주 심각한 고민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일단, 마켓 시스템 가동 1주년이 되어가는 이 즈음, 그 동안의 대외적 성과와 실제의 성과들을 일일이 검토한 다음, 적절한 제도적 법률적 조치들을 취해나갈 계획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반드시 해결해 나가야할 문제이지만 그러한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작가들이 안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은 그들 각자가 ‘무력한 개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기성작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sgk)'이라는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작가조합이 온당한 권익을 얻기 위해서는 앞으로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되겠지만 어찌되었건 그들은 단결하는 방법을 알고 목소리를 높힐 방법도 압니다. 남은 것은 그들의 몫이지요. 문제는 작가조합에 들어올 수 없는 작가지망생 혹은 신인작가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전국적으로 족히 수백명은 되리라고 짐작됩니다. 현재 이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찾아보기 힘듭니다(장기적으로는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이 그 역할을 담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그러니까 심산스쿨 동문작가들의 경우, 사정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하려 하는 작은 단체가 바로 [심산스쿨 크레딧클럽]입니다.
[img2]크레딧클럽에서는 어떤 일을 하게 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의 공유입니다. 제작사와 프로듀서 그리고 감독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것입니다. 2007년의 영화제작 동향이라든가 주요 트렌드의 변화 같은 고급 정보들도 함께 나눌 수 있을 겁니다. 불리한 계약서에 무작정 도장부터 찍는 일은 지양할 겁니다.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선배작가들이 이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개별 시나리오에 대한 집단적 리뷰도 이루어집니다. 크레딧클럽의 회원은 다른 회원의 작품을 정독하고 리뷰를 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제작사와의 직접 연결 프로그램도 가동합니다. 제작사들 역시 적절한 작가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심산스쿨 크레딧클럽에 이미 검증을 받은 경험이 있는 역량 있는 작가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기꺼이 이곳을 찾아 자신들이 원하는 작품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작가를 찾게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제작자가 작가들을 상대로 ‘피칭’을 행하게 되는 거지요. 심산스쿨의 시나리오 워크숍 강사들은 크레딧클럽과 정기적인 회합을 가질 것입니다. 저는 물론이거니와 노효정 작가도 이미 동의해 주었습니다. 매달 한 번 정도의 정기모임을 갖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정보를 나누고 각자의 작업진행상황들을 체크해보고, 봄가을마다 한번씩은 수련회도 가지려 합니다. 어떻습니까? 감이 잡히십니까? 크레딧클럽을 통해서 해낼 수 있는 일들은 그 밖에도 무궁무진합니다.
시장으로부터의 요구와 우리의 대응
크레딧클럽의 설립에 대한 생각은 막연하게나마 오래 전부터 해왔습니다. 이제 그럴만한 역량이 축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올 겨울을 넘기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현장의 제작사들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국내 톱클래스의 제작사들로부터 자신들이 직접 역량있는 작가군들과 접촉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내건 조건들은 제법 괜찮습니다. 작가 전용 집필실을 제공하겠다, 시놉시스 단계에서부터 진행비를 지급하겠다, 시나리오 계약시에는 작가의 ‘지분’을 명시해주겠다. 어떻습니까? 괜찮은 제안이지요?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특정 회사로부터 돈을 받고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 그만큼 안전한 대신 운신의 폭이 좁아집니다. 회사에서 기획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게 되면, 훗날 이런 저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시나리오를 들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떤 회사에 ‘소속’된다는 것은 아주 신중하게 따져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충무로 현장으로부터, 보다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시장’으로부터 이런 요구들이 제출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현상입니다. 우리는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되,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모름지기 시나리오작가라면 자신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승부해야 된다.” 이것은 영화 제작환경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결코 바뀔 수 없는 최고의 지상명제입니다. 심산스쿨 크레딧클럽은 소속 회원들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완성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그것들이 온당한 대우를 받는 문제에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물론 사안에 따라 다양한 제작사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일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크레딧클럽은 심산스쿨과 여타 영화제작사들 간의 ‘산학협동 프로그램’이라고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심산스쿨 크레딧클럽은 올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제 모습을 갖출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 클럽에 가입할 수 없다고 하여 상심하는 동문들도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우선은 클럽의 콸러티와 파워를 높여 놓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일정한 자격을 획득하게 되면 언제라도 제가 초청할 것입니다. 작가를 찾고 있는 영화제작사와 감독들은 새롭게 설립되는 심산스쿨 크레딧클럽에 주목해 주십시오. 여기 이미 역량을 검증받은 신인작가들이 모여 있습니다. 시장의 요구에 기꺼이 부응할 자세가 되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집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작가들입니다. 간략히 소개하려 했는데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마지막으로 크레딧클럽을 만들면서 제가 갖게 된 야심적인 포부를 밝히려 합니다. “심산스쿨 크레딧클럽은 2010년에 개봉되는 한국영화의 시나리오 크레딧 중 4분의 1을 장악하려 합니다!” 너무 거창하고 황당한 포부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크레딧클럽은 시나리오작가학교로서의 심산스쿨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프로그램이 될 것입니다.